#072. 시간에 묶인 죄수 (3)
이 감옥 안에 떨어진 후 여러 스킬들을 습득했으나 그중에 독심술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삼월초원을 내려다보는 저 은발머리의 여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겪어온 기구한 사연에 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림짐작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스티나 류는 중립구역의 높은 언덕에 서서 귀혼산장과 백묘탑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무복을 입은 마검사의 손목과 발목은 깨끗했다. 단단한 족쇄가 채워진 나와 다르게.
하지만 그녀는 죄수였다.
동일한 시간을 반복해서 회귀해야만 하는 시간의 죄수.
“눈앞에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군.”
옆에 선 제르비어스의 말이었다. 나는 마왕이 말끝을 흐린 뒷부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냥 이야기였어. 두 절대자를 완벽히 속여 넘길 수 있기를 바라며 종이 위에 적었던 계획표에 불과했다고.”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미약한 확률.
그것이 아스티나가 태어날 수 있었던 확률이다.
나는 이 층에 있는 두 개의 서고에서 소설들을 찾아 읽어냈고, 그 소설들에서 몇 개의 플롯을 뽑아 이야기를 대충 만들어낸 것뿐이다.
하지만 이 억겁의 평행 우주들 중에서는 진짜로 그 일이 일어난 십억분의 일의 확률이 어딘가엔 존재했으며, 나의 간절한 바람을 타고 그것의 인과(因果)가 완성됐다.
그래서 원래였다면 존재할 일 없던 ‘미래’를, 생생히 ‘과거’로 겪어낸 주인공이 저기에 있다. 두 발로는 땅을 짚은 채, 두 눈으로는 생생한 감정을 담아낼 줄 아는 살아 있는 존재가.
“만약 내가 행복한 이야기를 상상했더라면 어땠을까. 위층에서 내려온 괴물 같은 죄수를 이야기에 집어넣는 대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우연히 블랙홀을 발견해서 과거로 날아온 해프닝을 상상했더라면…… 그 무수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됐을 거야.”
“슈바인.”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어.”
불끈 쥔 주먹이 파르라니 떨린다.
“29,108번. 아스티나가 블랙홀에 몸을 던진 횟수야. 정확히 그 횟수만큼 삼월초원이 짓밟혔고, 그 숫자만큼 무고한 여인이 부모를 잃어야 했어.”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이다. 네가 죄책감을 갖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죄책감? 그렇지 않아. 이건 그렇게 가벼운 말로 대신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야.”
절정고수가 구사하는 천근추에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보다 수천 배는 더 고통스러운 부채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제르비어스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쳐다보았다.
“안 된다. 다시 생각해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는 얼굴만 봐도 알아. 네놈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땐 늘 무모한 짓거리를 계획할 때잖아.”
마왕의 손가락이 멀찍이 서 있는 아스티나의 등을 가리켰다.
“함께 가려는 거지? 저 여인을 친구목록에 넣어서.”
하여간 눈치가 없다가도 이럴 때는 또 귀신이다.
“그래, 맞아. 네가 그랬잖아? 나와 똑같은 능력을 지닌 죄수가 있다면 참 편리했을 거라고. 천마의 무극파천공과 마녀의 중력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마검사야.”
화룡도 7번 방의 친구들. 뚠 아티르의 스킬 ‘엄마 쟤 흙먹어’나 올쿠레 켄타의 ‘천년명마의 질주’ 같은 스킬들을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은 층에 있지 않으므로.
아스티나와 함께 감옥을 등반하면 그럴 일이 없어진다.
“그 막강한 스킬들을 일회용으로 남겨두기엔 너무 아까워. 아스티나의 존재 덕분에 나는 삼월초원에서 배운 것들과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까지 지켜낼 수 있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돼.”
제르비어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신 목숨을 포기해야 할 거다. 이번엔 상대가 강해도 너무 강하다. 그 강고한 천마 류운학이 전력을 다해도 물리칠 수 없었던 자가 설공이라며. 차라리 아스티나에게 단탈리온을 넘겨줘. 그러면 그녀는 다음 시간선으로 떠날 거고, 설공 역시 이 시간선에선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겠지. 굳이 벼락이 떨어지는 곳에 가서 팔 벌리고 설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벼락으로 내 배터리를 충전시킬 수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지. 이건 두 번 찾아오기 힘든 기회일 수도 있어.”
“정말 그것뿐이냐, 용사?”
“그, 그럼? 다른 게 뭐 있다고. 이게 다 내가 강해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아스티나는 쓸모가 있어.”
제르비어스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곧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녀석. 너는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잡혀왔다고 믿고 있어. 역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으면서 푸르가토리움에 붙잡혀 있는 저 여인과 너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걸 안다. 그런 인간을 가만 놔둘 수 없는 거겠지.”
“무슨 소리야. 난 쟤를 오늘 처음 봤어.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내 목을 따려고 든 여자라고.”
“무엇보다 네놈은 화룡도 7번 방의 죄수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낙인찍힌 낙오 죄수들마저 동료로 품었지. 넌 원래 그런 놈이야. 쓸모만으로 친구를 골랐다면 그때 이미 7번 방의 죄수들을 외면했을 걸.”
“쳇, 뭐래.”
“중간층에서 내가 그랬었지? 파천황의 권능 같은 기연이 왜 하필 너에게 찾아왔냐고. 그때 짜증낸 걸 사과하마. 아마도 너의 이런 면 때문에 파천황은 앞서 대기실을 거쳐 간 수많은 죄수가 아니라 네놈에게 권능을 맡긴 걸 테지.”
“뭐야…… 징그럽게 왜 그러는데?”
내 당황에는 아랑곳없이 제르비어스가 내 등을 툭 쳤다.
“마용파의 두목으로서 졸개의 결정을 지지하마. 가 봐라. 새로운 친구 후보가 기다리고 있잖냐.”
*
“슈바인 스트링거, 생각은 정리했어?”
“그 전에 하나만 물을게.”
아스티나는 담담한 얼굴로 내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내가 끝내 단탈리온을 내어주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야?”
“생사결(生死決).”
천마의 딸다운 선전포고였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덤벼오겠다는 뜻이다.
그 발언엔 한 치의 과장도 담겨져 있지 않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고?”
“……무엇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지. 나는 삼월초원의 모든 죄수를 사랑하지만 물정 모르는 바보는 아니야. 너 또한 이 감옥에 붙잡혀 왔다면 무수히 많은 피를 그 손에 묻혔다는 뜻. 학살자를 죽이는 데 있어 손속에 정을 둘 생각은 없어.”
내가 학살한 것들은 가상현실 속의 데이터들이었다고 변명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대신 준비해 온 제안을 건넸다.
“단탈리온을 주지 않는 대가로 다른 것을 너에게 준다면?”
“나에게 필요한 건 오직 그 마도서가 품고 있는 에테르야. 달리 뭘 준다는 건데?”
“자유.”
아스티나는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 못했다는 듯 흠칫했다.
“너를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 설공이란 죄수를 내가 막아주겠어. 그러면 넌 더 이상 회귀를 위해 블랙홀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자연히 단탈리온의 힘도 필요 없게 될 거야.”
“나를 우롱하는 거야? 너와 저 뿔 달린 친구가 백 명 있다고 해도 설공을 막을 수 없어. 그자의 무력을 겪어보지 못했으니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아스티나, 네가 그 기나긴 시간을 계속 회귀하면서 무슨 일념으로 버텨왔는지 나는 알지 못해. 하지만 어째서 그 청룡패웅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찌르지 않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지.”
하루 종일 이글거리는 마그마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어떤 사내의 등을 본 적이 있다.
이 감옥에 아무런 애착도, 희망도 없고 삶에 대한 의지마저 진작에 내다버렸지만 결코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선택만큼은 하지 못했던 노병의 등을.
“뭘 안다고…….”
“당연히 안다고 말하진 못해. 아니, 이 감옥뿐 아니라 전 우주를 뒤져봐도 너와 같은 처지에 빠진 인간이 또 있을지조차 모르겠어.”
“뭘 안다고 감히 나한테…….”
“하지만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어. 너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거고, 설공이란 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기 때문에 덤벼볼 생각도 할 수 있지.”
입술을 짓씹듯이 내뱉던 아스티나가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언제든 간단하게 목숨을 끊을 수 있었어. 상대의 혈도를 눌러 제압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경지야. 즉, 네가 본인의 사혈(死穴)을 누르기만 하면 큰 고통 없이 자살할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아스티나는 그러지 않았다.
삼만 번 가까이 회귀하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유혹에 시달렸을 것이다. 수백 수천 번을 갈등했을 것이다.
내공 한 자락만 실어 혈도를 누르면 돼.
마치 잠에 든 것처럼 보일 거야.
더 이상 무엇으로부터도 달아나지 않아도 돼.
“네가 지금 여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증명하고 있는 거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천마가 살해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마녀가 무사히 아이를 낳아 어린 너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무한한 시간선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기를.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회귀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기를.
“그런 세계를……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다는 거야?”
“내 등 뒤에서 잔뜩 폼을 잡고 서 있는 녀석 보이지? 아래층인 화룡도에서 스스로 폭군이 된 채 다른 죄수들이 등반할 희망을 거세해 온 마왕이었어.”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마왕의 귀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만나고 달라졌지. 다음 층으로 올라갈 길을 막아섬으로써 말소시켰던 불씨를 내가 다시 피워 올렸거든.”
나는 화룡도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마왕과 친구가 되어 이 삼월초원에 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천마와 마녀 각각의 제자로 살아왔던 일, 두 절대자를 속여 결국 결혼까지 시켜낸 나의 여정을 말해주었다.
“나는 수만 번의 시간선을 건너왔어. 하지만 그중에서 단 한 번도…… 너와 같은 죄수가 있었던 세계는 없었어. 당연히 나보다 먼저 단탈리온을 깨운 죄수도 본 적이 없어.”
“그래. 네 말대로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기 마련이니까. 내 목표는 이 푸르가토리움이라는 감옥을 탈출해서 교도관들로부터 해방되는 거야. 그를 위해서 동료를 모으고 있지.”
선택은 아스티나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제안을 거부하고 다음 삼월초원으로 어찌어찌 넘어간다고 한들, 그 시간선에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가 또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너는 29,108번의 회귀 끝에 나를 만났어. 이것이 카드 게임이라면 삼만 번의 섞임 끝에 처음으로 조커를 손에 쥔 셈이라고. 도박을 걸어볼만 하지 않아?”
차분하게 내 말을 듣던 아스티나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일이 잘못 되면 그녀는 또 한 번 피붙이가 도륙당하는 현장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고, 그건 아직 극복 못한 트라우마를 정면돌파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스티나가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임을.
띠링!
[페널티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페널티 퀘스트 #1. ‘설공 살해’]
[용사는 영겁의 시간을 반복하는 회귀자 아스티나 류를 만났습니다. 그녀를 살해하고 갑옷과 무기를 강탈하는 대신에 동반자의 길을 제안했군요. 하지만 그 길은 대적 불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방해꾼이 예정된 길입니다.
아스티나 류를 노리고 있는 설공은 푸르가토리움의 높고 높은 층인 8층 ‘■■■’에서 내려온 초강자. 아스티나를 당신의 친구 목록에 넣기 위해선 그를 처치해야 합니다.
그 절망적인 난이도에 합당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으나, 용사여. 부디 이 퀘스트에 도전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기한: 24시간]
[보상: 1코인(용사가 사망에 이르렀을 때 1회에 한해 목숨을 되살려 줍니다. 부활의 코인은 사용 즉시 소멸되며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목숨 하나를 더 준다.
실로 파격적인 보상이다. 1코인을 얻을 수 있다면 엄청난 강자를 만난다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의 가짓수가 비할 데 없이 풍성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나는 이제야 교도관장이 아스티나를 만나자마자 뜬금없이 그녀를 살해하라는 퀘스트를 내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경고의 의미.
내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일종의 팻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스티나를 죽이지 않고 친구로 삼는 길을 선택했고,
상대방 또한 방금 거기에 동의했다.
“좋아. 너를 믿어보겠어, 슈바인. 내가 뭘 하면 되지?”
손바닥을 치운 아스티나의 얼굴은 단단한 각오로 불타고 있었다.
[마검사 아스티나 류가 새로운 친구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스킬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죄수가 아니기 때문에 스킬 대여 효과가 없으면 어떡하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니었다.
아스티나 류가 가진 무극파천공과 중력 마법의 성취는 각각 8성과 7서클이었다. 내 성취도의 2배가 넘는 고수.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지원군이 될 것이다.
“우린 귀혼산장으로 갈 거야.”
아스티나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기암산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귀혼산장에는 형형색색의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직 천마와 마녀의 결혼식 피로연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쉽지만 저기에 찬물을 끼얹어야 하겠네.”
잔치는 끝났다.
이제 전쟁을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