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시간에 묶인 죄수 (2)
포탈에서 튀어나온 검은 무복의 사내.
무림 8대 천마였던 류운학의 철천지원수이자 7대 천마 설공이었다.
아스티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종달새의 둥지에 살모사가 머리를 집어넣었을 때에 아기 종달새가 느꼈을 본능적인 공포.
아스티나는 그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무력감을 맛보게 된 것이다.
“삼월초원, 오랜만이군.”
설공의 두 발이 지면에 내려섰다.
순간.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던 1,100명의 죄수들 전체가 보이지 않는 주박에 걸린 것처럼 굳어 버렸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대단한 성취를 이뤘으며, 이 감옥에 붙잡혀 온 후에도 천마와 마녀라는 절대자의 맞대결을 계속 목격해온 그들에게조차 설공의 ‘천마군림보’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
“너는 본좌와 함께 가자.”
그가 아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섬전 같은 금나수도, 쾌속의 기습도 아니었다. 그저 가벼운 산책을 종용하듯 여상한 손짓이었다.
그럼에도 아스티나에겐 그걸 피해낼 수단이 없었다. 설공이 내뿜는 기파에 짓눌려 호흡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설고오오오오옹!”
하지만 설공의 무극파천공을 ‘훔쳐서 익혀낸’ 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꿈에서도 설공의 얼굴을 잊어본 적이 없던 한 사내가.
“본좌를 기억하는가!”
자신의 탄생이 쌍마대전의 종식을 가져왔기에 아스티나는 천마 류운학이 진심을 다해 살초를 펼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패도적인 출수를 펼치는 귀혼산장의 주인.
거기에 딸바보 무인은 없었다. 다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 못하는 복수귀만이 있을 뿐이었다.
채애애애앵!
같은 색을 지닌 두 검기가 서로 충돌하며 일대에 막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잎새처럼 맥없이 날아가던 아스티나를 붙잡아 세운 것은 익숙한 중력장이었다.
“엄마?”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의 마법진이 아스티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 옆에 선 마녀는 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백묘탑의 주인. 그러나 지금은 낯빛이 어두웠다.
두 천마의 격돌에서 일합만으로 누가 우위인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미안하군. 본좌는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설공 앞을 막아선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뽑혀 나온 묵빛의 칼이었다. 경지가 하늘에 닿은 자가 구사하는 어검술(馭劍術).
“죽인 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무용한 일이며, 앞으로 죽일 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 또한 무익한 일. 그러한데…… 그대는 본좌의 무공을 쓰는군.”
“너를 죽이기 위해 마도에 들어섰다!”
천마의 목검이 설공의 검을 튕겨냈다. 그러나 묵빛의 검은 자연스레 그 주인에게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설공이 검을 쥐자 그가 발출하는 마기는 더욱 짙어졌다.
“감옥 바깥에서 연이 닿았던 자인가. 본래 여흥을 즐길 때가 아니다만…… 그대는 본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설공의 신형이 번쩍하더니 천마에게 짓쳐들어갔다.
그의 검격을 힘겹게 받아내는 것을 본 교도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뽑아들었다.
“교주님을 지킨다!”
“천라지망을 펼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설공에게 역부족이었다. 사력을 다해 그와 협공하는 다른 교도들이 없었더라면 여러 번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을 때, 마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안 된다, 아스티나.”
“아빠를 도와야지!”
“저자는 너를 노리고 있어. 나는 그렇게 놔 둘 수 없다.”
천마신교 전체가 하나의 적을 상대로 전력을 다한 공격을 펼치는 동안 마녀는 아스티나를 데리고 백묘탑으로 날아갔다.
“왜 이러는 거야, 엄마?”
마력 회로가 쇠약해진 마녀를 상대로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었으나 아스티나는 그러지 못했다. 마녀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서글픈 표정을 짓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너라도 살아야 한다, 아스티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빠를 도와 맞서 싸워야지!”
“가망이 없어. 저런 괴물에게 모두가 전멸당하는 건 시간문제야.”
마녀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설명했다.
설공이란 자는 오래 전 이 삼월초원에서 층장이 되어 위층으로 올라간 등반죄수. 그것만으로도 초월자나 다름없는 강자였을 텐데, 지금은 교도관이 압수했을 터인 본래의 무기까지 되찾은 상태였다.
“그렇다는 건 그가 계속 등반을 계속했다는 걸 의미해. 어디까지 올라갔을지조차 짐작할 수 없다.”
그런 자가 상대이니만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스티나의 질문에 마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괴물을 막아설 수 없다면, 엄마는 모든 걸 걸어서라도 널 지켜야겠어.”
마녀가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리자 누군가가 주저앉은 상태로 소환되었다. 왼쪽 어깨에 큰 상처를 입은 천마 류운학이었다.
그는 삼월초원에서 갑자기 백묘탑의 마법서고로 전이된 것에 당황했다.
“여보, 어째서 전투 도중에 나를 부른 것이오?”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나는 저자와 사생결단을 내야 하오.”
“우리의 딸을 살릴 방도가 있다 해도?”
그러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했던 천마의 움직임이 멎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은 천년의 복수심마저 멈춰 세울 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여긴 차원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오. 아스티나를 어디로 피신시킨단 말이오.”
“과거로 향하는 블랙홀을 열 거예요. 우리 둘의 힘을 합쳐서.”
마녀가 자신의 계획을 천마에게 설명하는 동안 육중한 진동이 마법 서고를 덮쳤다. 책장 두 개가 비틀거리며 장서를 내뱉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소. 당신 말대로 하겠소.”
천마가 자신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짚어 출혈을 멈추었다. 이제부터의 시도를 성공시키려면 모든 진기를 다 끌어 모아야 할 것이기에.
“단탈리온을 꺼내렴.”
아스티나가 주춤거리며 마도서를 꺼내들자 마녀가 단탈리온을 펼쳐들고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지? 블랙홀을 열기 위해 네가 모아온 에테르를 연료로 쓸 거야.”
그러자 단탈리온이 마녀의 손에서 꿈틀댔다. 마치 자신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그사이 또 한 번의 진동이 백묘탑 전체를 진동시켰다. 거기엔 시선도 주지 않고 마녀는 담담히 사실을 읊어댔다.
“네가 힘을 해방하지 않으면 어차피 이곳은 불바다가 된다, 단탈리온. 마도서로서 네 숙원인 아카식 레코드에 닿으려면 희박한 희망이라도 걸어야 할걸? 내 딸이 살아남아 다른 시간선의 너를 만나면 그 녀석은 숙원을 이룰지도 모르니까.”
그 말엔 설득력이 있었는지 곧 단탈리온에게서 막대한 양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녀와 천마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가와 아스티나를 껴안았다.
“엄마? 아빠?”
“반드시 살아남거라, 아스티나. 너는 아빠와 엄마의 전부란다.”
“다른 시간선의 우리 또한 너를 사랑해주기를 기도할게.”
그들의 포옹이 끝났을 때, 아스티나는 자신의 발아래 그려진 마법진에서 꼼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 돼! 난 안 갈 거야!”
청룡패웅검을 꺼내 마법진의 결계를 깨보려 했으나 단탈리온이 해방한 마력의 지배권 아래 마법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준비됐어요, 여보?”
“먼저 시작하시오. 따라서 출수하겠소.”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녀가 술식을 전개했다. 딸을 낳은 이후로 단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중력 마법의 최종영창을.
[아스트로노미컬 디스트럭션(Astronomical Distruction)]
그러자 천마가 무극파천공의 초월식을 선보였다.
[아수라대멸겁(阿修羅大滅劫)]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마법서고의 장서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마녀의 최종영창이 역중력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중에서 파르락거리는 책장은 마치 우아한 새들의 날갯짓을 연상케 했다.
쩌저저저적.
아수라의 현신에 마법서고를 둘러싼 벽들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공간의 일그러짐을 버티지 못한 잔해들이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아스티나의 눈앞에 검은 구체가 생성되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주변 풍광이 일그러지는 존재감. 시공의 벽을 허무는 블랙홀이었다.
그것이 아스티나의 양손을 빨아들였다. 아무런 고통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세계가 일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만 들었다.
“싫어! 난 가기 싫단 말이야!”
애타게 소리쳐보았으나 아스티나의 외침은 결계 바깥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그 왜곡된 시야 속에서 피를 뒤집어쓴 설공이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양손에 둥그런 물체를 하나씩 쥐고 있었는데, 조각조각 난 장면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아스티나는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라혈귀, 그리고 유진 쿤딜리니의 잘린 머리였다.
삼월초원에서 그 누구보다 아스티나를 금지옥엽처럼 지켜주었던 두 죄수의 얼굴이 싸늘한 무기물이 되어 있었다.
“아빠! 아아악!”
아스티나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설공의 묵빛 검이 천마의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쓰러지는 천마를 부축하며 오열하는 마녀의 모습.
무감정한 살인기계처럼 걸어오는 설공의 싸늘한 눈빛. 허공을 날아다니는 검을 회수한 채 마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습격자.
설공의 동공에 비춰진 것은 마녀 일레인이 마지막 힘을 짜내 발동시킨 마법진이었다. 설공이 직접 휘두른 검은 물리적 실체가 없는 마법진과 함께 마녀의 상체를 함께 베어냈다.
그것이 아스티나가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
“블랙홀의 힘으로 여기에 온 거구나. 네가 태어나기 전의 삼월초원으로.”
내 질문에 아스티나는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블랙홀을 빠져나온 아스티나는 18년 전의 삼월초원에 덩그러니 떨어졌다. 아직 눈앞에 생생한 유혈참극이 잔상처럼 달라붙어 떠나질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쟁패의 기둥을 순찰하고 있던 귀검신녀였다.
아스티나는 정체를 밝히라고 외치는 신녀에게 와락 안겼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돌봐준 여인에 대한 반가움에.
“하지만 당연히 이모와 삼촌들은 날 알아보지 못했지.”
귀검신녀는 천마에게 수상한 침입자를 잡아왔다고 보고했다. 복마전의 최상층에는 사지가 멀쩡한 류운학과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일레인 쿠디슈가 함께 신방을 차린 직후였다.
자신들을 보고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하는 웬 처녀의 모습에 천마와 마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상대를 진정시킨 뒤 연유를 물어보자 들려온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엄마의 마법과 아빠의 무공을 차례로 시연하고, 청룡패웅검에 박힌 월장석을 보여주자 두 분도 점차 내 말을 믿어주었어.”
초보 양육자나 다름없는 천마와 마녀에게 훌쩍 장성한 딸이 미래에서 날아왔음에도 둘은 지극정성으로 아스티나를 돌봐주었다.
눈앞에서 부모가 참살당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아스티나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시간들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어.”
문제는 마녀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인간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열 달이 걸리는 것과 달리 중력을 다루는 마녀의 출산 속도는 쏜살처럼 진행된 것이다.
아스티나가 회귀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다시금 그들과 작별을 해야만 했다.
시간을 거슬러서 겨우 다시 만난 부모다. 결코 헤어지고 싶을 리 없었지만.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면 너의 영혼과 좌표가 겹칠 테니까?”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렇게 아스티나는 또 한 번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층장의 열쇠를 발동시켰다.
아쉬움이 가득했으나 아스티나는 감옥을 등반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제 막 사랑을 확인한 부모의 모습을 두 달 동안 지켜볼 수 있었던 것 역시 다시 오지 않을 축복이라 여기면서.
그러나 이번에도 아스티나가 포탈을 통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천마 설공이 다시 포탈을 열고 나타났어.”
어떤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에 각인된다.
아스티나의 동공은 그 사내가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녀의 회귀에는 무거운 대가가 꼬리표처럼 달려 있었다.
설공의 출현.
폭주하는 천마.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죄수들.
절망을 깨닫고 아스티나를 피신시키는 마녀.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수순이 흘러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스티나는 또 다시 저주스러운 블랙홀 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렇게 지옥의 루프가 완성됐다.
“어떤 방법을 써도 결과는 똑같았어. 그의 출현에 대비해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도, 천마신교뿐 아니라 백묘탑의 마법사 전체가 설공에게 덤벼들어도 결과는 시체들의 산더미.”
그렇게 수백 번 천마와 마녀가 설공에게 살해당하는 시간선을 지나치며 아스티나는 작전을 바꿨다.
혼자서 블랙홀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혹독하게 연습했고, 결국 그것을 이뤄냈다.
“언젠가부터 나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와서도 엄마와 아빠를 찾아가지 않았어. 몰래 백묘탑에 숨어들어 단탈리온을 훔친 다음…… 삼만월의 밤이 오기 전에 다음 시간선으로 곧장 도망쳤어.”
흑기사의 갑옷으로 몸을 숨긴 채 삼월초원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또 다른 세계로 도망친다.
그게 아스티나가 반복해 온 도피의 여정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이 태어나 애정을 주었던 삼월초원이란 세계에 ‘설공’이라는 사신을 강림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아스티나에게 내가 물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시간여행을 했어? 대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그 도주를 반복해온 거야?”
천마와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몇 명의 용사를 죽였느냐는 내 질문에 마왕 제르비어스가 딱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횟수를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의 숫자.
비극의 당사자조차 이제는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켜켜이 쌓인 세월.
“단탈리온.”
내가 마도서를 꺼내서 같은 질문을 물어보자 하얀 백지가 숫자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서 두 자리.
금방 세 자리를 넘어선 숫자는 계속 추가되며 쓰였다.
- 29,108.
다섯 자리의 숫자가 주는 까마득한 무게가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