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시간에 묶인 죄수 (1)
아스티나 류는 삼월초원의 빛이었다.
“아가씨! 당장 거기서 내려오세요! 위험하단 말입니다.”
“왜? 날아다니눈 게 얼마나 재밌눈뎁. 이 재밌눈 걸 유진 이모는 맨날 모타게만 하고.”
“그렇다고 화장실 간 척하고 창문으로 날아오르시면 다음부턴 화장실도 제가 따라갑니다!”
“그거 따댕활 치매야. 나 벌떠 여섯 짤이라고.”
“사생활 침해는 누가 알려준 거예요, 또?”
“운석 하라부지가. 지금 쩌 미테서 나 떠러지면 붙잡으려고 하는 하라부지.”
“아아악! 내가 못 살아요, 아가씨!”
섬광의 마도사 유진 쿤딜리니가 창틀에 머리를 집어넣고 악을 쓰고 있는 곳은 백묘탑에 새로 만들어진 화장실이었다.
물론 푸르가토리움의 죄수들은 감옥의 회복 시스템 덕분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으며 자연히 배변 활동을 위한 시설도 만들 필요가 없다.
다만 마탑의 막내 아가씨인 아스티나가 마법 서고에서 ‘화장실’이란 단어를 알게 돼 만들어달라고 떼를 쓴 덕분에 추가된 장소에 불과했다.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아스티나 역시 무언가를 먹지 않았음에도 하루 하루 커나가고 있었다. 그 답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교도관, 내 딸을 이 감옥에서 붙잡아두고 있는 명분은 뭐야? 이제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나.”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이 문제로 종종 교도관을 괴롭혔으나,
-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은 아스티나 류의 신병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전합니다. 그녀에게 예비된 운명은 다른 시간선에서 결정될 것이며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 합니다.
“내 딸을 두고 너희 교도관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절대 그냥 두고 보진 않겠어. 세 개의 달을 전부 박살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
아스티나 류는 삼월초원의 소금이었다.
“혈귀 삼촌! 이번 사냥에는 나도 데려가기로 했잖아.”
“소교주, 이 마라혈귀가 그런 약속을 했었소? 흐음. 애시당초 난 기억에 없는데. 건망증이 도진 모양이오.”
“열다섯이 되면 나도 사냥에 끼워준다고 분명 그랬어!”
“에헴. 그건 무극파천공을 5성까지 달성해 천마회풍일섬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
“천마회풍일섬!”
콰르르르릉!
“어때? 이제 나도 사냥에 끼워주는 거지?”
“아니, 작년까지만 해도 3성에 불과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이 경지까지 오르신 거요?”
“약속 지켜. 남아일언중천금 몰라?”
“누가 소교주께 그딴 말 가르쳐줬소? 아니, 됐어. 보나마나 만검패웅 그 꼰대 같은 녀석이겠지. 왜 영수를 때려잡지 못해서 안달이신 거요, 응?”
“패웅 삼촌이 기껏 검을 만들어줬는데, 써먹을 데가 없잖아. 무기가 생기면 당연히 시험해보고 싶은 거 아니겠냐고. 다른 삼촌이랑 이모들은 이제 나랑 대련도 잘 안 해주고.”
“그야 소교주한테 지면 굴욕이고! 이겨도 교주님이 십 주야 동안 잔소리를 해대시니 그런 거 아니오! 하여간 패웅, 그놈이 만악의 근안이군.”
“만악의 근안이 아니고 만악의 근원이겠지. 그런 거 헷갈리는 것도 건망증의 일종이야, 삼촌?”
“으이이이익! 말로는 못 이기겠군, 소교주. 알았으니 귀검신녀와 폭암도인도 데려오시오. 다칠지 모르니 간부들 옆에 꼭 붙어 있고!”
“헤헷. 알겠어. 드디어 그 청룡이란 녀석 볼 수 있겠군?”
“잔뜩 혼쭐이 난 다음 울지나 마시오!”
귀혼산장과 백묘탑을 오가면서 아스티나는 쑥쑥 자라났다. 천마신교의 교도들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으며, 백묘탑의 마법사들도 그녀의 말썽을 잠재울 순 없었다.
“딸아. 그거 못 보던 검인데, 어디서 난 것이냐?”
“저번 영수 사냥 때 청룡을 때려잡았더니 뿔이 떨어졌어. 패웅 삼촌이 그걸로 검을 만들어줬고.”
“으잉? 본좌가 영수를 없앴을 땐 그런 전리품 따위 나오질 않았거늘.”
“왜? 부러워? 아빠 줄까?”
“흠흠. 아니다. 하나뿐인 딸의 검을 가로챘다가 네 엄마한테 무슨 질타를 받을지 두렵구나.”
“맞아. 엄마가 이 검 손잡이에 월장석도 박아줬어. 이제 마법진을 그리는 속도가 엄청 빨라졌다? 볼래?”
“아니다, 딸아. 네가 복마전 4층을 부숴버린 게 불과 두 달 전이거늘. 여기서 시범을 보였다간 아비의 보금자리가 남아나질 않을 것이야.”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천마 류운학의 근심 역시 그만큼 커져갔다.
아무리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최강의 마력 회로와 아버지의 혈통에 어울리는 뛰어난 단전을 타고났다 한들, 아스티나의 발전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쳤고,
한 번 시범을 보여주면 다음 순간에 그 동작을 응용했다.
천재들만 모인 삼월초원에서도 아스티나의 재능은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소설로 치면 말이오, 개연성을 박살내는 수준이지.”
한 번은 백발괴마가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었다.
“본인이 읽는 소설에 소교주가 등장한다면 반드시 주인공일 것이오. 작가가 온갖 기연과 행운, 재능을 몽땅 한 명에게 몰아줘야만 탄생 가능한 존재란 것이지.”
“하지만 이 감옥에 작가 따윈 없어. 음흉한 교도관만 있을 뿐. 본좌도 그대도 그걸 알고 있지 않나.”
“그렇소. 어긋난 개연성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올 것이오. 지금 교주께서 불안해하시는 감정의 심처에는 바로 그것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걸 테요. 소교주의 운명에 예비된 무언가가 그녀로 하여금 강해질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
“정확해. 교도관의 입장에선 아스티나의 탄생으로 인해 십오 년 동안이나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셈. 단 한 명의 존재로 한 층의 죄수 전원이 시련을 유예시키고 있지. 만약 그 유예의 대가를 내 딸이 받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본좌의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겠구려.”
*
그래서 아스티나 류는 삼월초원의 모든 것이었다.
“엄마. 엄마는 예전에 백묘탑에서 제일 강했다며?”
“아니. 삼월초원 전체에서 제일 강했지. 네 아빠도 허구헌 날 엄마한테 얻어맞고 그랬단다.”
“아빠 쪽 얘기랑은 다른데. 엄마가 시무룩해질까 봐 많이 봐줬다고 그러던 걸.”
“원래 사내들이란 허풍 떨기를 좋아하지. 자기 부하들 앞에서 민망하니까 그리 말하는 거야. 아빠 말은 좀 걸러들을 필요가 있단다.”
“그러면 이건? 아빠가 그랬는데…… 원래 그만큼 강했던 엄마의 마력 회로가 나를 낳는 바람에 지금처럼 약해진 거라고 그랬어. 사실이야?”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던 일레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테라스의 석양을 받아 빛나는 딸의 얼굴은 자신을 쏙 빼닮아 있었다.
“아스티나. 원래 출산을 거치면 여자의 몸은…….”
“나는 마법 서고에 있는 책을 모두 다 읽었어, 엄마. 그러니까 단탈리온도 만난 거고. 보통의 여자들은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아도 엄마처럼 쇠약해지진 않는댔어.”
아스티나의 머리카락 색깔은 청룡의 비늘처럼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왜 아빠와 엄마의 머리카락 색깔과 다른가. 어렸을 적에 물었을 때 일레인은 ‘엄마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오래 받아서 이렇게 탈색된 거야’라고 대답했었다.
“이제 난 곧 열여덟이 돼, 엄마. 더 이상 동화 같은 대답이 필요한 나이가 아니야. 백묘탑의 막내딸은 진실이 알고 싶어.”
누굴 닮아 이리 고집이 강한 것인지 일레인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딸은 999번이나 전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두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니까.
“그래, 네 말대로 엄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평범한 마법사조차 아니지.”
일레인은 자신이 있던 세계에서 생물병기로 만들어진 마녀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스승에게서 전수되는 것도,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통해 성취되는 것도 아닌 마녀만의 강화 방식까지도.
“원래 세계였다면 나는 너를 낳자마자 처리되었을 거야. 갓 태어난 자식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로 말이지. 엄마는 널 낳은 순간 이 감옥에 붙잡혀온 이래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알겠니?”
“하지만 날 낳은 대가로 엄마의 마력 회로는 보잘것없이 쭈그러든 거잖아. 내가…… 빼앗아간 거잖아.”
울먹이려는 딸을 일레인은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저 달에 맹세코 단 한순간도 그 사실을 원망해본 적 없단다. 내가 이제 3서클만도 못한 마법사가 되었지만 너를 얻었잖니. 너라면 이 어미가 닿지 못한 곳까지 닿을 수 있어.”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아스티나는 귀혼산장으로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일레인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은발로 머리를 물들인 채 돌아왔다.
“귀검신녀 이모의 환영술이야. 이제 난 죽을 때까지 이 머리카락을 유지할 수 있대, 엄마.”
“……아스티나.”
“내가 마녀의 딸이라는 걸 잊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절대 모를 수 없도록 할 거야. 이게 내 각오의 증명이야.”
“무슨 각오를 말하는 거니?”
“엄마와 아빠를 위해 탈옥하겠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천마와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스티나 류는 등반을 선언했다. 비록 본인에겐 아무런 족쇄도 달려 있지 않았으나 아비의 원한과 어미의 숙원을 짊어진 채 꼭대기 층에 오를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니 열쇠를 나에게 줘요.”
그렇게 아스티나 류는 삼월초원의 층장이 되었다.
*
쌍마대전이 멈춘 지 18년.
삼월초원의 층장만이 가질 수 있는 열쇠는 아스티나 류의 손에 쥐어졌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1,100명의 초마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 모두가 함께 양육해 낸 마검사(魔劍士)를 배웅하기 위해서.
“소교주시여, 강녕하셔야 하옵니다!”
마라혈귀와 드라이푸스 카인의 얼굴은 똑같이 비통했다. 그들은 아주 긴 시간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자신이야말로 아스티나의 ‘첫 번째 대부’라면서.
“우리 백묘탑은 마탑의 막내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귀검신녀와 록시탄 역시 동족인 상대편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 둘이 아스티나를 요람에서부터 키워온 유모였기 때문에.
다만 한 명의 사내만큼은 도저히 딸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지 않겠느냐, 딸아. 이 삼월초원의 강자들 중 누군가 등반죄수로서 최종 층에 닿는다면 응당 본좌가…….”
“아빠는 엄마 곁을 지켜야지. 그리고 나한텐 꼬타루수 삼촌이 현무의 등껍질로 만들어준 갑옷에다 만검패웅 삼촌이 청룡의 뿔로 두드린 검이 있어.”
“하지만 아직 십이 성이 되기는 멀었다. 차라리 이 층에서 더 실력을 갈고 닦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지만 삼촌, 이모들은 전력으로 날 상대해주지 않잖아. 그리고 난 이제 혼자서 영수 한 마리를 때려잡을 정도로 강해졌어.”
아스티나의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천마의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으며, 부모의 눈에 찰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의지는 단호했다.
“이건 내 생존의 문제이기도 해.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년이야. 하지만 아빠의 형량은 400년, 엄마의 형량은 600년. 내가 이 층에 머무르면 필연적으로 부모보다 먼저 늙어죽게 될 거야.”
그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는 말에,
천마의 입은 결국 다물어졌다.
“여보, 우리의 딸을 믿어보도록 해요.”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천마를 위로했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색채를 발하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결국 진정한 부모의 역할은 품에서 떠나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거겠지. 가거라, 아스티나. 계속 감옥을 올라가서 네가 누구의 딸인지 교도관들에게 보여주렴.”
“응. 나만 믿어, 엄마.”
층장의 열쇠를 받아든 아스티나가 마음속으로 교도관을 불러냈다.
그러자 삼월초원의 허공에 둥그런 포탈이 생겨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그동안 건강히…….”
포탈을 등진 아스티나가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건넸을 때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포탈 속에서,
검은 무복을 걸친 팔이 쑤욱 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뭣이?”
공허한 눈빛을 한 사내가 아스티나의 정면에 내려섰다.
“그대가 포탈을 사용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18년이나 걸릴 줄은.”
경악에 가득 찬 1,100명의 초마인들이 그를 노려보았으나, 정작 그 사내의 시선은 오직 아스티나의 얼굴에만 못 박혀 있었다.
사내가 내뿜는 패도적인 살기에 위축되면서도 아스티나는 그 순간 상대로부터 기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긴 시간 낚싯대를 놓고 기다린 사냥꾼이 마침내 찌의 흔들림을 목격했을 때의 설렘.
“찾아냈다, 예언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