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초원의 불청객 (3)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째서 내가 난생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토록 두들겨 맞아야 한단 말인가.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혈룡굉월참]
착각하면 곤란하다.
방금 기술을 시전한 건 내 쪽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참격을 피해 구르고 있는 중이니까.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그래비티 봄]
아, 이 중력폭발도 내가 펼친 술식이 아니다. 상대 쪽에서 나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다.
“이이이익!”
정신없는 마공과 마법 연격에 몰아붙여지던 내가 이를 악물고 반격에 나섰다.
일단 거리를 벌리는 것이 좋겠지.
[천마회풍일섬]
그러자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아스티나가 똑같이 검을 휘둘렀다.
[천마회풍일섬]
두 개의 검이 섬전 같은 궤적을 그리며 맞부딪혔다. 막대한 충격파가 일어나 내 흑색 도포와 그녀의 회색 도포를 찢어버릴 듯 펄럭이게 만들었다.
“이봐, 일단 진정하고 내 설명을 들…….”
“설명은 무슨! 감히 내 아버지의 무공을 훔쳐 쓰고, 어머니의 마법을 도둑질한 너를 반죽음 상태로 만든 뒤 단탈리온을 되찾은 다음에 듣겠다.”
두 개의 검이 동시에 검기를 발출시키며 상대를 밀어냈다.
치이이잉!
아스티나는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매섭게 덤벼들었다.
갑옷을 벗어던진 그녀의 움직임은 가히 신출귀몰.
마교 서열전과 천마와의 수련을 치르면서 강해진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쾌검이었다.
[그래비티 잽]
그리고 중간중간 섞어 들어오는 저 중력 마법. 그 술식 전개 속도가 나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능숙했다.
무엇보다 무극파천공의 초식들 사이에 끼어들어 전혀 다른 리듬으로 휘몰아쳐 온다. 막아내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반칙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줄곧 나와 대련했던 제르비어스의 심정을 이제 알겠다.
‘당하는 입장에 서 보니까 이거 완전 사기 전법이잖아?’
아스티나 류가 가진 힘과 속도는 나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동일한 출력을 가진 스포츠카 두 대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하지만 운전석에 탑승한 운전자의 컨트롤 실력이 달랐다.
내가 이제 막 초짜 티를 벗어난 레이서라면 그녀는 월드 그랑프리의 우승컵을 노릴 만큼 노련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숨 쉬듯 창의적인 연계 공격을 하지?’
나는 힘겹게 방어해내면서도 아스티나의 천재성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진짜 타고난 재능이란 이런 건가.
게다가 날 당황시키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정보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감옥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상대입니다.]
용사의 심안을 아무리 발동시키려 해봐도 메시지는 이런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감옥에 들어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이미 오래전에 죽어 영혼만 남은 파천황 르팔타커스를 바라볼 때조차 용사의 심안은 그 이름과 칭호 등을 표시해주었다.
나는 아스티나의 검초를 흘려내면서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다.
족쇄가 없는 것이다.
“너는 죄수가 아니구나?”
“당연하지. 나는 바깥세상에서 죄를 짓고 들어온 게 아니라 이곳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렇다면 물어볼 것이 있는데 그 칼 좀 치워줄래?”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의 그 검을 보니 또 화가 치밀어 올라. 내 청룡패웅검과 닮았어. 당연히 만검패웅의 손에서 탄생한 무기겠지?”
“어? 맞아.”
아스티나는 자신의 검을 가리켜 청룡패웅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번갈아 튀어나오는 네 영수 중에서 청룡을 쓰러트린 후 그 잔해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패웅 삼촌은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 그러니 분명 더러운 술수로 그 무기를 만들도록 협박한 게 분명해. 이 흉악한 죄수야!”
“답답해라. 나는 현무를 혼자 쓰러트리고 당당히 이 검의 주인이 됐어. 만검패웅이 이걸 만들면서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알…… 이익!”
말을 하던 와중에 검을 찌르는 게 어딨냐!
순간 천근추로 몸을 뒤로 누이지 않았으면 목젖에 구멍이 날 뻔했다.
“왜, 내 말을 못 믿는 건데!”
“단탈리온을 갖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숨겼잖아?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녀석을 어떻게 믿어?”
음. 얘, 검술만 매서운 게 아니네.
상대의 입까지 다물게 만들 줄 아는 언변의 소유자군.
내가 둘러댈 말을 찾고 있을 때, 아스티나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검을 회수한 다음 뒤로 제비를 넘었다.
파슈우우우웅!
그녀가 있던 자리에 지옥파쇄포가 굵은 선을 그리며 궤적을 만들었다.
아스티나가 기계체조 선수처럼 착지하며 제르비어스를 노려보았다.
“넌 또 뭐야?”
“여자를 상대로 협공하는 건 체면을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네 솜씨를 보아하니 체면 차릴 때가 아닌 것 같군.”
“그러면 체면 말고 그 뿔을 구겨줄게.”
우우우우웅.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에서 범상치 않은 검기가 뽑혀져 나왔다. 저걸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이미 중단전을 개통한 절정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마왕이 상대의 시선을 빼앗아 가준 덕분에 내 쪽은 비로소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일단은 좀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아스티나를 멈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 멈춰! 이 녀석을 원하는 거지?”
맹폭하게 돌진하려던 아스티나의 동작이 우뚝하고 멈췄다. 내 왼손에 마도서 단탈리안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네가 갖고 있었군?”
“일단 검기를 거두고 내 얘기를 들어.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은 잿더미가 될 테니까.”
나는 오른손으로 폭렬마법 업화의 쌍장을 시전했다. 손바닥에서 뽑혀 나온 보라색 불길이 마도서의 표지를 당장이라도 태워버릴 기세였다.
“먹히지도 않을 허풍 떨지 마시지.”
“허풍 같아?”
“응. 단탈리온은 허약하기 짝이 없어서 겁이 많아. 그런데 지금 네가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하는데도 조용하잖아? 파들파들 떨어야 정상인데.”
“…….”
“진짜로 단탈리온을 불태울 생각은 없는 거야. 나는 속일 수 있어도 ‘전지’의 마도서를 속일 순 없어.”
아스티나의 지적은 옳았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조금 바꿔야만 했다.
“자, 그럼 지금은 어떨까?”
나는 방금 전까지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탈리온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퍼덕이기 시작했다.
방금 내가 진심으로 단탈리온을 불태울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의 검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내 블러핑이 진짜 협박으로 돌변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 마.”
“네가 칼을 거두고 나와 이야기할 마음을 먹는다면. 나도 이 책과 그동안 제법 정이 들었거든. 쓸모 있는 녀석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쯤에서 휴전하는 게 어때?”
매혹적인 은발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동공을 가려주었다.
나는 더 재촉하지 않고 반응을 기다렸다. 치열하게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어차피 답은 나와 있다.
‘너는 선택권이 없어. 이쪽에서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알람음이 들렸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7. ‘침입자 살해’]
[용사는 적개심을 보이는 흑기사 아스티나 류와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마도서 단탈리온을 노리고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지 말고 죽이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감당 못할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그녀를 살해해야 합니다.]
[기한: 24시간]
[보상: A급 무기 청룡패웅검, A급 방어구 흑기사의 갑옷 (진품)]
[실패 시: 페널티 퀘스트로 돌입]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죽이라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교도관장은 지금까지 퀘스트의 보상을 제시함으로써 내 성장을 독려했다. 그리고 페널티의 무시무시함을 되새겨줌으로써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의지를 북돋워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죽이라는 퀘스트를 내린 적은 없었다.
차카 도기노브나 오르콰이움처럼 패악스러운 죄수와 대항할 때도 이겨내거나 버텨내라는 퀘스트를 주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죽이라’고 콕 짚어 표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퀘스트를 실행하지 않으면 받게 되는 페널티로 역시 퀘스트를 제시한 것 또한 이례적이었다.
“젠장. 페널티 퀘스트가 뭔데 그래? 어?”
하늘을 째려보았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외치면 교도관은 가끔 대답해주는 경우가 있었으나 교도관장만큼은 내게 직접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느닷없이 혼잣말을 하는 거지?”
아스티나가 어이없어 하자 제르비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 저런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완전히 돌아버린 건 아니니까 안심해. 살짝만 돌았어.”
“그래? 접수하도록 하겠어.”
뭐라고 떠드는 거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단탈리온을 집어넣었다. 일단은 아스티나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먼저다.
‘대뜸 죽이라고 하다니 말이야 방귀야?’
일단 저 정도의 강자를 죽이는 것이 지금의 내 실력으로 가능하냐 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교도관장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상 인형처럼 퀘스트를 따를 생각은 없었다.
아스티나가 검을 물린 채 팔짱을 끼었다.
“좋아. 일단 네 이야기를 들어보겠어. 하지만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검을 뽑을 거야.”
내가 제르비어스에게 턱짓하자 그도 마기를 거두었다.
“자리를 옮기자. 아무래도 은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
중립구역의 원탁.
바로 어젯밤에만 해도 삼월초원의 간부들이 치열하게 삿대질을 했던 장소였으나 지금은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널찍한 원탁을 사이에 둔 채 나와 아스티나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르비어스는 내 등 뒤에 서 있었고.
“제법 배짱은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팔짱을 낀 아스티나가 선공을 던졌다. 나는 그걸 가볍게 받아쳐주기로 했다.
“애써 살벌한 척은 그만 해도 돼. 너에겐 단탈리온이 반드시 필요하잖아. 우리를 쓰러트리는 건 네게 아무런 이득도 없을 걸.”
“뭘 안다고 떠드는 거야?”
“네 실력이라면 백묘탑을 지키던 마법사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대신 마법사에게 근접거리까지 다가서서 혈도를 짚어 제압하는 번거로운 방법을 썼어. 넌 목적을 위해 아무나 해치우는 살인마가 아니야.”
아스티나의 시선이 내 눈을 피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아.”
“훗. 그건 동의할 수 없겠는데. 나는 네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미래에서 왔겠지.”
아스티나는 흠칫 놀랐다. 물론 내 등 뒤에서 마왕이 헛숨을 들이켜는 걸 보니 이 녀석도 놀란 모양이다.
아니, 대체 넌 왜 놀라냐.
그렇게나 힌트가 많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있던 세계의 명탐정이 이런 말을 했었거든. 불가능한 것을 전부 제외하고 남은 것이라면, 그게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
은발머리에 흑기사의 갑옷.
아스티나 류라는 이름.
무엇보다 천마와 마녀를 딱 반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전투법.
“네가 정말로 천마와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야. 지금 마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난 인간. 그게 너의 정체겠지.”
“……맞아. 네 말대로 나는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날아온 시간여행자. 아직 내가 태어나지 않은 과거를 향해 찾아왔지.”
“내 가설을 한 번 들어볼래? 네가 직접 확인해줬으면 좋겠는데.”
“말해봐.”
“아스티나 류. 너는 천마와 마녀 사이에서 태어나 이 삼월초원에서 성장했어. 그러다가 성인이 된 해의 어느 날 선대 천마인 ‘설공’이 위층에서 내려와 혈겁을 불러왔지.”
“……그걸 어떻게?”
“계속 들어봐. 천마와 마녀, 그리고 그 밑의 모든 초마인들이 설공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어. 하지만 도무지 상대가 되질 않았고. 그 두 분은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운 딸 하나만큼은 살려내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블랙홀을 만들어 너를 그 안에 집어넣은 거야.”
“단탈리온이 말해준 거야? 하지만 나는 계속 널 뒤쫓아 왔어. 책을 펼칠 시간이 없었을 텐데.”
“맞아. 이건 그냥 내 추리야.”
“그게 말이 돼? 독심술이야? 아니면 예지 마법?”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그 명탐정이 남긴 말 중엔 이런 것도 있거든. 탐정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실 중 어느 것이 우연의 산물이며, 어느 것이 필연인지를 꿰뚫어보는 것이다.”
제르비어스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용사야, 네가 방금 한 이야기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다음 층으로 등반하기 위해서 밤새워 짠 소설에 불과하지. 그런데 마치 그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주인공이 지금 내 눈 앞에 있어.”
성별과 이름은 다르지만.
“나는 이걸 절대 우연이라 생각할 수 없어. 어떠한 힘이 개입해서 내 이야기를…… 필연으로 만든 거야.”
나는 인벤토리에서 단탈리온을 꺼내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아스티나의 오른쪽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힘을 사용해 이것을 빼앗아갈 수 있는지 계산해보는 것이다.
나는 단탈리온의 표지 위에 손을 올린 채 중얼거렸다.
“아이템 수납.”
슈욱.
단탈리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벤토리의 원리를 모르는 이가 보면 마술일 수밖에 없는 기적.
“봤다시피 나는 이걸 나만 아는 공간에 숨길 수 있어. 지금 여기서 날 죽인다 해도 빼앗아갈 수 없지.”
내 담담한 설명에 천마와 마녀의 딸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하, 하지만 내겐…….”
“들어봐. 단탈리온은 분명 대단한 마도서고 그걸 넘겨준다는 건 나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야. 하지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걸 간절히 원하는 너에게 넘겨줄 수도 있어.”
내가 급조해서 만든 소설에 등장하는 ‘과거로 날아온 흑기사’가 어떻게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는가.
그 이유와 영문을 밝혀낼 시간이다.
“그러니 아스티나 류. 네가 살아온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