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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68화 (68/300)

#068. 초원의 불청객 (2)

삼만월의 밤이 되기까지 이제 고작 하루 남았다.

그런데 하필 이런 타이밍에 삼월초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가 튀어나왔다?

여기는 푸르가토리움이다. 차원을 넘어 죄수들을 불러오는 곳.

철조망을 두른 담장을 넘기만 하면 숨어들 수 있는 보통의 감옥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입’을 했다는 건…….

누군가의 술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제르비어스.”

나는 단탈리안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재빨리 펴들었다.

“침입자라는 녀석의 위치는 어디지?”

- 그자는 현재 백묘탑의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이야? 정체가 뭐냐고.”

- 답변이 불가합니다. 용사님께서 그만큼의 대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30,000만큼 가져가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갑니다.]

익숙한 상황이다. 단탈리온을 처음 만나서 테스트할 때도 녀석은 이런 답변을 내놓은 적이 있다. 천마와 마녀 중 누가 더 강하냐는 질문이었다. 교도관이 열람을 강제로 막을 만큼 중요한 정보라는 소리였다.

슬슬 열이 뻗쳐올랐다.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이 의심스러웠다. 그 녀석이 날 다음 층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자객을 보내기라도 한 건가.

‘이딴 식으로 나오시겠다?’

일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대처를 결정하는 건 그다음.

나는 백묘탑이 있는 동쪽을 향해서 힘껏 도약했다.

“따라와, 제르비어스! 침입자가 백묘탑을 떠나기 전에 따라잡는다.”

파아아앙!

천마어기행공으로 비행을 펼치는 내 뒤를 마왕은 곧바로 손쉽게 따라붙었다. 녀석이 땅을 박찰 때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아.’

백묘탑의 육망성은 물론이거니와 대다수 마법사들은 현재 귀혼산에서 펼쳐지는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해 있다. 그곳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회포를 풀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이 탑에 계셨다면 순간이동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약 십오 분 후.

우리는 초원과 평야를 지나쳐 백묘탑이 세워져 있는 호숫가에 당도했다.

“탑의 색깔이 원래 저랬나?”

도착하자마자 드러난 광경은 심상치 않았다.

백묘탑은 수백 개의 마법진이 건물들을 공중에 띄워 지탱되고 있다. 그래서 파란 마법진들이 마치 네온사인처럼 환하게 호숫가 전체를 밝혀준다.

그래야 했다.

“탑 중간 부분의 마법진 몇 개가 돌아가지 않고 있어. 빛도 나지 않고.”

“결혼식 퍼레이드를 위해 개조했다가 원상태로 되돌려야 했겠지. 그 과정에서 실수가 생긴 거 아닐까.”

“나도 그런 거였으면 좋겠지만…….”

그랬더라면 입구 주변의 땅이 저렇게 폭염에 그을린 흔적으로 가득하진 않았을 거다.

“저기 누가 있다!”

네 명의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손에 쥔 채로 쓰러져 있었다. 처음엔 시체인가 했는데 미약하게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보법을 시전해 그들 앞으로 내려섰다.

“형제님들! 괜찮습니까.”

“흐어어어…….”

나는 엎드린 채 쓰러져있던 한 마법사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 화염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였다. 주변의 그을린 흔적은 이자가 침입자에게 저항한 흔적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거죠?”

“으으으…….”

분명 눈은 부릅뜬 채로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는데 말을 잇지 못했다. 로브를 살펴봐도 핏자국이나 꿰뚫린 흔적 따윈 없다.

“무공의 고수에게 혈도를 제압당했군.”

내 옆에 착지한 마왕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마교도의 소행이란 거냐? 결혼식 피로연 날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대체 누가?”

“모르겠어. 일단 이자를 깨워보자.”

내가 달성한 경지로는 혈도를 눌린 자를 손가락 몇 번 눌러 깨우는 치료 따윈 불가능했다. 그러나 대상자의 몸에 막대한 내공을 흘려보내면 혈도를 풀어낼 수 있다.

밧줄의 매듭을 풀지 못한다면 녹여버리면 그만인 원리.

무극파천공의 기운을 화염 마법사의 몸에 주입하자 그의 혈도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 회로를 가진 마법사에게도 통하는 방법이라 다행이었다.

“허억! 허억! 감사합니다, 막내 도련님.”

“정신이 좀 들어요?”

“누, 누군가 탑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너무 빠르고 강해서 막아설 수가 없었어요.”

“혹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온몸을 검은색 갑주로 뒤덮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검은색 갑주? 제르비어스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이 삼월초원에서 누군가의 온몸을 가려줄 만한 검은색 갑옷이라면 하나뿐이다.

“그거 꼬타루수의 갑옷 아닐까?”

“하지만 그건 아직 내가 갖고 있어. 이틀 동안 정신이 없어서 돌려줄 틈이 없었지.”

인벤토리를 확인해보았다. 바람의 마도사 꼬타루수에게 강탈하다시피 빌려왔던 흑기사의 갑옷 레플리카는 여전히 아공간 창고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한 개를 더 만들어뒀을 리도 없다. 그랬더라면 내가 빌려 달라 했을 때 그렇게 필사적으로 거부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화염 마법사가 가리킨 곳은 마법진이 정지된 탑의 한가운데였다. 나와 제르비어스에게도 익숙한 층이다.

“용사야, 저긴 마법서고다.”

무공을 익힌 마교도가 검은 갑옷을 입고 마법 서고에 침투한다?

나는 일련의 징후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형제님은 여기서 다른 마법사들을 돌봐 주세요.”

“조, 조심하십시오!”

우리 둘은 걱정 어린 표정의 마법사를 뒤로 하고 마법 서고를 향해 뛰어올랐다.

서고의 문을 열자 드러난 것은 난장판이 된 실내의 풍경이었다. 사서인 유진 쿤딜리니의 깔끔한 성격 덕분에 언제나 정갈함을 유지하고 있던 서고가 엉망진창이었다.

마왕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떤 자식이냐! 누가 책들을 이렇게 다 헤집어 놓았어?”

빽빽이 도열한 책장을 짐승에 비유하자면, 내장이 전부 파헤쳐진 듯 책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때, 서고 한구석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젠장. 어디지? 어디에 있는 거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음성.

뭔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로 미뤄보아 침입자는 이 서고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으며,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나는 만전불패의 체술을 일깨운 다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다가갔다.

‘저 녀석인가.’

화염 마법사의 말대로였다. 철컹거리는 흑기사의 갑옷을 입은 자가 책을 한 권씩 꺼내며 제목을 확인하더니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다.

“어이, 거기. 뭐하는 거지?”

흑기사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그러곤 천천히 뒤를 돌아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투구 안쪽에서 시퍼런 안광이 내뿜어졌다.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라.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흑기사는 그렇게 한 번 내뱉더니 다시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저 목소리…….’

마치 음성변조기를 거친 것처럼 들리는 중후한 음성. 내가 꼬타루수의 갑옷에 달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기능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내 인벤토리에 있는 흑기사의 갑옷과 놀랄 만치 닮은 외양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재질이 훨씬 정교하고 단단해 보인다는 점일까.

내가 상대의 갑옷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제르비어스가 주먹을 꺾으며 경고했다.

“너야말로 지금 당장 그 짓을 그만둬라. 그러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걸. 아앙? 내 소중한 인생작들을 그 따위로 다룬단 말이지?”

마왕은 자신이 아끼는 야설들이 거침없이 내팽개쳐진 풍경에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분노의 포인트가 묘하게 빗나가 있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흑기사가 마왕의 살기에 반응한 것이다.

“정말 귀찮게 구는군.”

흑색의 장갑에 들려 있던 책이 다음 순간, 맥없이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책을 들고 있던 흑기사의 신형이 일순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신속의 보법!

흑기사가 다시 나타난 것은 내 왼쪽이었다.

녀석은 망설임 없이 내 목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오랜 시간 수련을 거친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금나수였다.

철컥.

“막았어?”

흑기사는 내게 오른손을 붙잡힌 것이 의외인 듯 물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가 혈도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효과적인 혈도로 이어지는 예상 투로를 막아서면 되는 거니까.

“이래봬도 삼월초원에서 먹은 짬이 있어서 말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곧바로 반격을 시전했다. 흑기사의 팔을 놓자마자 천마회선장으로 그의 복부를 후려친 것이다.

퍼어어어엉!

허공에 붕 떠오른 흑기사가 책장 세 개를 박살내며 튕겨나갔다. 등 뒤에서 마왕이 머리를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저긴 <마왕이 너무 잘함>이 꽂혀 있는 책장이라고.”

“지금 그딴 소리 할 때냐. 저 녀석 좀 보라고. 아무런 대미지도 입지 않았어.”

내 말대로 흑기사는 마치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는 중이었다. 어깨를 툭툭 터는 동작에서 미약한 분노가 느껴졌다.

‘분명 천마회선장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자유자재로 궤적을 꺾는 천마회선장은 당한 상대를 그냥 밀어붙이기만 하는 장법이 아니다.

내부 장기로 파고들어 진동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무공. 그걸 초근거리에서 얻어맞고 멀쩡하다?

한 가지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저 녀석이 입은 갑옷. 허접한 소재에 색칠을 한 레플리카 따위가 아니다. 희귀한 소재로 만든 진품이야.’

흑기사 역시 방금의 일합으로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알겠어. 왜 평소와 달리 이렇게 헤매야만 했는지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겨냥하며 물었다.

“너, 금발머리. 이름이 뭐냐?”

“슈바인 스트링거다.”

내 대답에 흑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내 이름을 훑어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엔 이쪽에서 묻지. 네 이름은 뭐야? 백묘탑엔 왜 쳐들어온 거지?”

“쳐들어왔다는 건 어폐가 있군. 주인이 제 집에 돌아온 것도 쳐들어왔다고 하나?”

“뭐? 그게 무슨 소리…….”

흑기사는 내 말을 자르며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그보다 내 질문에 답하라. 단탈리온은 어디 있지? 분명 네놈들이 데려간 것 같은데.”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질문. 하지만 나는 이름까지 알려준 마당에 더 이상의 정보를 내비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뻔뻔하게 되물었다.

“단탈……리온? 그게 뭔데?”

정말로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과 의아해하는 목소리.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였다. 어때? 천마와 마녀도 속여 넘긴 솜씨라고.

그런데 흑기사는 갑옷을 들썩이며 웃었다.

“되지 않는 수를 쓰는구나. 이로써 네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차라랑.

그러더니 등 뒤에서 푸른빛이 도는 검을 꺼내들었다. 목검이 아닌 진검이었다.

“……어떻게?”

“단탈리온을 정말 몰랐다면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어야지. 그게 ‘뭔데’라고 묻는 대신에 말이야.”

제길. 무의식중에 흘린 실수를 상대에게 들켜버리고 말았군.

흑기사가 자세를 취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기를 내뿜으면서.

나는 녀석의 검에 집중하며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흑기사의 검 손잡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와 동그란 원을 그려냈다. 의심의 여지없는 마법진.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뭣이? 무공뿐 아니라 마법도 쓴다고?

[그래비티 슬래시]

중력 마법의 비기인 그래비티 슬래시가 펼쳐지며 마법 서고를 일거에 휩쓸었다.

“크윽!”

보법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다급히 포스 필드를 만들어내며 방어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대응이 늦는 바람에 서고의 벽면을 부수며 바깥으로 날아가야 했다.

시야가 휙휙 돈다. 하늘과 탑과 호수가 번갈아가며 균형 감각을 어지럽혔다.

추락 직전 가까스로 리버스 그래비티의 효과로 충격을 중화시킨 다음 지면에 내려섰다.

꽝!

그러자 흑기사가 정면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섰다.

아무래도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현무패웅검을 꺼내 발검식을 취했다.

그러자 흑기사가 놀라며 물었다.

“패웅이 만들어준 검을 들고 있어? 단탈리온을 찾아낸 것만 해도 깜짝 놀랄 일인데. 넌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다! 너야말로 뭐하는 자식이길래 꼬타루수가 디자인한 갑옷에 참월의 마녀만 쓸 수 있는 중력 마법을 사용하는 거야?”

“…….”

그러자 흑기사는 대답 대신 갑옷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히어로슈트가 촤촤촥 벗겨지듯 갑옷이 해제되어 왼쪽 팔목에 부착된 방패로 변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그것은 찰랑이며 그 주인의 허리춤까지 내려와 밤공기를 희롱하고 있었다.

“……여자?”

흑기사의 갑옷 속에 숨어 있던 건 낭창한 몸매의 젊은 여성이었다.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도포 안에 입는 무복의 형태. 그런데 색깔은 백묘탑의 마법사들의 로브와 같은 회색.

기묘한 융합이다.

“내 이름은 아스티나 류.”

“아스티나……뭐?”

그녀가 밝혀온 이름에 또 한 번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아스티나 류라니, 뭔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름과 성씨가 하나로 결합된 것 같은 모양새잖아?

“나는 무극 천마 류운학과…….”

아스티나가 낯익은 발검식을 취하며 읊조렸다.

나는 저 동작을 잘 알고 있다. 천마가 나를 몰아붙이기 전에 취하는 자세다. 무극파천공 특유의 패도적인 기수식.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의 하나뿐인 딸이다.”

그녀의 검이 내 목을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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