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67화 (67/300)

#067. 초원의 불청객 (1)

결혼식 전날 밤.

나는 백묘탑의 알현실에서 천마와 마녀를 몰래 만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들아. 네가 층장이 되어 다음 층으로 올라가겠다고? 너는 마교의 소교주다. 어찌하여 부자의 연을 확인하자마자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 말을 천마 류운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달랐다. 삼월초원을 떠나야 한다는 내 말에 곧바로 연유를 파악한 것이다. 미약하게 불러온 아랫배에 손을 받친 그녀가 말했다.

“동일 시간선상의 좌표 때문이구나.”

“네. 어머니 말대로 저는 이곳에 더 있으면 위험합니다.”

내가 푸르가토리움에 처음 붙잡혀 왔을 때를 떠올려보자. 당시 죄수의 층을 배정하는 ‘연옥의 문’은 나를 보고 당황하며 이렇게 판정했었다.

- 영혼의 인식표와 육체의 좌표가 미묘한 불일치를 일으킵니다.

거기서 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

나는 박상식의 영혼과 게임 속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의 육체가 하나로 결합된 존재다.

둘.

그리고 적어도 이 감옥 안에선 영혼과 육체를 판별할 때 ‘인식표’란 개념이 있으며 그것은 ‘좌표’를 따라 분류된다.

‘쉽게 말해 영혼마다 고유한 바코드가 있고 이 감옥은 그걸 식별할 수 있다는 거지.’

마법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그냥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겠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위험하다?”

심각한 시선을 교환하는 모자를 번갈아보던 천마가 벌컥 성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여보. 본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뭔지 설명해 줘야 할 것 아니오.”

“슈바인은 미래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끝없는 전쟁을 벌이는 걸 멈추고 연모하는 마음을 꺼내들도록 만들었죠. 모두 그날 밤 일어난 일 덕분. 그래서 우리 아들도 다행히 차원의 잔상으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마녀는 천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에 올려다 놓았다.

“하지만 우리의 아들은 여기에도 있지요. 이 아이가 자라서 눈앞의 청년으로 성장한 걸 테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의 차원에 영혼의 좌표가 동일한 존재가 중첩되어버리는 겁니다. 자연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좌표. 중첩. 허용.

이런 단어가 마녀의 혀끝에서 완성될 때마다 천마는 고수의 통배권을 얻어맞은 것처럼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러면 뱃속의 소교주가 태어나게 되면, 눈앞의 소교주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만약 그 둘이 접촉하기라도 한다면…… 최상의 경우는 한쪽의 영혼이 한쪽에게 흡수되는 거겠지요. 흡수된 쪽의 육체는 사망하게 될 거고.”

“거꾸로 말한 것 아니오? 어찌 그게 최상의 경우라는 거요.”

“최악의 경우는 두 아들의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붕괴되어 시간선을 어그러트리는 경우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아들만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층 전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뭔가 다른 수가 없겠느냐고, 천마는 한동안 나와 마녀를 들볶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어차피 만들어낸 거짓말이라 해결책이 없었고, 마녀 또한 마도학의 깊은 지식을 뒤져봐도 대비할 수 없다고 했다.

“우주의 제1법칙은 인과율.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습니다, 여보. 원인과 결과가 한 시간선에서 중첩되었을 때 벌어지는 일은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어요. 그게 가능하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일 테니까.”

망연자실해 있는 천마에게 다가가 나는 손을 붙잡았다. 극마지경에 오른 무인의 손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두 분과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 소원을 이뤘으니까요. 층장의 열쇠로 다음 층의 문을 열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

“그게 먹혔어?”

“마녀의 도움이 컸지. 왜냐면 내가 진짜로 미래에서 온 아들일 경우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건 진실이니까. 원래 완벽한 거짓말은 절반 이상의 진실이 섞여야 완성되는 법이다.”

제르비어스는 내 얼굴 앞에 손바닥을 들어 박수를 쳤다.

“하여간 너의 잔머리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은 문제를 혼신의 구라로 돌파하다니. 앞으론 구라용사라고 부르마.”

“너도 욕봤다, 호색마왕. 너의 야설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묘안을 떠올리진 못했을 테니까.”

껄껄 웃던 마왕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소설책에서 발상을 얻었다 한들 그런 시나리오를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건 보통 재능은 아니다. 둘 앞에서 투구를 벗을 땐 울기까지 했잖아? 즉 연기력도 쓸 만하고. 용사 말고 변사를 했어야 했을지도.”

“변사? 그게 뭐야.”

“몰라? 도개교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내가 있던 세계에는 대단한 변사 네익스피어라는 사내가 있었지. 그 변사의 공연을 듣고 싶어서 박쥐대공의 귀를 빌려서 은둔한 적도 있었다고.”

이 녀석이 마법 서고에 처박혀서 독서삼매경에 빠진 건 역사가 있는 일이었군.

“변사라. 네가 있던 문명 수준에선 종이가 비쌌거나, 아니면 변사들의 언변이 유독 출중했던 모양이네. 방금 마왕 네가 말한 종류의 인간을 우리는 소설가라고 불러.”

“너희 세계는 소설가냐. 만약 탈옥에 성공해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그 소설가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봐. 이 감옥에서 겪은 일들을 마치 상상에서 나온 것처럼 꾸미면 되지 않겠냐.”

그러다 마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자못 심각한 얼굴이었다.

“인간이나 마족이나 결국엔 관성에 지배된다, 용사야.”

“관성?”

“이렇게 한 층 한 층 넘어설 때마다…… 목표가 흐릿해질 수 있다는 거지. 2층 열쇠를 거머쥔 것은 분명 마그마 볼의 우승만큼이나 대단한 일이야. 하나 우리의 목표는 탈층이 아닌 탈옥. 푸르가토리움을 벗어나는 거니까. 그러니 관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최대한 구체적인 소망을 만들어놓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탈옥이라는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

변사니, 작가니, 네익스피어니 하는 이야기는 다 이 본론을 위해 꺼냈던 건가.

제르비어스 폰타인.

이 녀석은 보통 헤헤실실거리며 마왕답지 않게 굴다가 가끔 이렇게 난데없이 진지해진다니까.

징그럽게.

하지만 녀석의 말에도 일리는 있기에 나는 대충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쓸 소설은 당연히 영웅 일대기다. 제목은 뭐가 좋을까. 정도로 할까.”

“SSS급은 뭐냐?”

“겁나 짱 세다는 뜻이야. 내가 지구에 있을 때는 소설에 그런 제목이 많았어.”

“나로선 감이 잘 안 오는데.”

“그러면 이건 어때. <최강용사는 탈출불가 감옥에 갇혀버렸다>.”

“어이어이. 왜 자꾸 제목에 용사만 붙는 거냐? 마용파의 리더로서 불쾌한데. 그 소설을 읽으면 사람들이 널 주인공으로 착각할 거 아니냐.”

“그러면?”

제르비어스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번뜩 뜬 녀석은 엄숙한 얼굴로 마치 그 네익스피어라는 변사에 빙의한 듯 말했다.

“<상태창이란 기분 나쁜 중얼거림을 하는 용사가 마왕인 제게 친구신청을 해왔습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잠시 두 개의 달빛을 받은 침묵이 평원을 가득 채웠다.

“크하하하하하! 걸작이네.”

“그렇지? 나를 자문으로 삼도록 해라, 구라용사.”

그렇게 한참을 웃어대는 사이 사위가 어둑해졌다. 해는 이미 꼬리만을 지평선 위에 걸쳐둔 채 넘어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한 가지가 못내 아쉽다, 슈바인.”

“뭔데?”

“천마에게 배운 무공과 마녀 밑에서 익힌 마법을 하나로 합친 ‘무극뭐시기’하는 그거 말이다. 그 둘과 작별해 다음 층으로 오르면 그 기술은 못 쓴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다.

내가 구사하는 것은 친구 목록에 오른 자들에게 빌려오는 것. 일전에 본 안내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1.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의 스킬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위력은 시전자의 숙련도에 정비례합니다. 단, 친구와 같은 층에 있지 않다면 기술은 봉인됩니다.]

MP의 한계치를 9,999로 올린 것은 분명 1층 못지않은 대단한 레벨업이었다.

하지만 삼월초원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보물이 있다면 그건 ‘무극참월공’. 간부들의 협공에도 죽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용사전용기 덕분이었다.

하지만 천마와 마녀를 짝 지워준 시점에서부터 나는 둘 모두를 등반죄수로 선택하길 스스로의 손으로 포기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무극참월공을 쓸 수 있는 것도 이 삼월초원에서만 가능해졌다. 한 층만 올라가더라도 비기가 손에 쥔 모래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거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더 큰 목표를 위해서 희생할 수밖에 없었어. 다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결국 삼월초원에선 등반죄수를 구하지 못한 셈인가. 안타깝네. 너랑 똑같은 능력을 지닌 죄수가 이 층에 있었다면 그 녀석 하나만 포섭해서 같이 올라가면 되는 건데.”

“하하. 그건 너무 편리한 전개 아니냐? 소설도 그렇게 쓰면 욕먹는다. 차라리 마왕 네가 무극참월공을 배워볼래?”

“아쉽지만 그건 불가능해. 마족은 인간과 신체 구성이 완전히 다르거든. 내공을 모을 단전이란 게 없어 천마의 무공은 못 익혀. 반대로 온몸이 마력 회로인 셈이라 마녀의 중력 마법 역시 원리가 달라 배울 수 없지.”

역시 그렇게 되나.

무려 천 명이 넘는 죄수들 중에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용기와 그만한 힘을 가진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생각의 흐름을 거기에서 돌리기 위해 나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보다 사실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어.”

“뭐냐.”

나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내가 마도서 단탈리온에 작전을 적으며 구상할 때부터, 그것을 실행하는 도중에도,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끝난 시점에 와서도…… 교도관이 계속 침묵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확실히 그렇군. 이 층의 룰인 ‘쌍마대전’을 설계한 교도관의 입장에서 너는 본 경기에 참가하지도 않고 판을 뒤엎은 녀석일 테니.”

“안 봐도 뻔해. 분명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걸. 그런데도 너무 조용하단 말이지.”

그건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내가 계획을 실행하는 중간중간 [교도관은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말이 새빨간 거짓이라고 고합니다]라거나 [교도관은 이런 억지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같은 메시지가 들려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왜 순순히 우리를 내버려 두고 있는 걸까.”

어쩌면.

뭔가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그런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경고!]

[2층 삼월초원에 불순한 존재의 침투가 감지됩니다. 교도관장의 관리 시스템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손상을 막기 위해 대응합니다.]

뭐라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자 제르비어스가 묻는 시선을 보냈다. 아마 녀석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봐서 메시지는 내게만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대응 실패.]

[관리 시스템이 부정한 방법으로 손상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교도관이 죄수 전체에게 알리는 게 아니라…… 교도관장이 내게만 보여주는 메시지라고 봐야 한다.

[자아를 가진 생명체 하나가 삼월초원에 발을 내딛습니다.]

[푸르가토리움이 만들어진 이래 최초의 사례로 기록됩니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내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는 걸 지켜보던 마왕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무슨 일이냐.”

“무언가가 방금 이 감옥에 침투했다는데?”

스산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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