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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65화 (65/300)

#065. 우주에서 가장 찬란한 (3)

나는 그렇게 기나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니, 찍었다고 생각했다.

999번을 목숨 걸고 싸운 천마와 마녀를 화해시킨 것도 모자라, 아예 합방을 시켜버렸으니 이제부터 삼월초원엔 평화만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내 생각이 짧았군 그래.’

귀혼산장과 백묘탑에 쌓인 원한은 그 건물들에 쌓인 녹과 먼지만큼이나 단단했던 모양이다.

“본녀가 최대한 참아주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성운의 마도사?”

비록 검은 뽑지 않고 있었으나 협상의 원탁에 앉은 귀검신녀의 얼굴은 매서웠다. 눈빛만으로 풍참을 날릴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하면 내 다시 말해주지. 백묘탑의 안위가 걸린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양보는 있을 수 없소. 반드시 별자리를 탐색해 제일로 길한 날짜를 정해야 하지.”

귀검신녀가 발끈하려는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마라혈귀가 원탁에 발을 올려놓으며 성을 냈다.

“이 정신 나간 마도사 새끼야. 벌써 만월이 두 개가 되었는데 별이 보일 턱이 있냐! 네가 눈깔을 아무리 부릅뜬다 한들, 별이 한 개도 안 보이는 하늘에서 무슨 점을 치겠다는 거냐!”

그 말에 원탁에 앉은 귀혼오마 다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귀의 말에서 틀린 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백묘탑 육망성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유진 쿤딜리니가 드라이푸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좌중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저자의 태도는 고까우나 내용은 반박할 수 없어요, 형제님. 다른 자매들도 결국 거사는 빨리 치를수록 좋다는 게 의견입니다. 삼만월의 밤이 뜨면 교도관의 영향력이 강해지므로 그 전에 날짜를 잡는 게 좋습니다.”

그러자 드라이푸스가 길게 자란 수염을 오른 주먹으로 말아 쥐며 괴로워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결혼식을 하루 만에 결정하는 게 말이 되냐고오옷!”

삼월초원의 간부 총 열한 명이 동시에 한숨과 탄식을 내쉬었다. 1000번째 쌍마대전을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혀 생각지 못한 사태로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중립구역의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려 급조한 이 회의실에 모든 간부가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천마와 마녀의 결혼식 절차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개중 침착한 성격인 만검패웅이 입을 열었다.

“그럼 혼례는 내일 정오에 열리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소. 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십시다. 본인은 곧 태어날 소교주 님의 요람을 만들어야 하므로 낭비할 시간이 없소.”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록시탄이 제동을 걸었다.

“일단 그대의 말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군요, 패웅. 마교의 소교주보다는 마탑의 도련님이 먼저 수식돼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누구 맘대로 벌써 요람을 만든다는 둥 설레발을 치시는 겁니까. 백묘탑에서 신혼집 장소를 양보할 것 같나요?”

빙결 마법을 쓰는 엘프의 기세는 서늘하고도 매서웠다. 그러자 폭암도인이 반격에 들어갔다.

“그쪽 마법사들의 탑은 호수 한가운데 지어지지 않았소이까. 어린 소교주를 물가에 내놓으라고? 그러다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위험천만한 발상이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마교가 자리 잡은 귀혼산의 숲속엔 주기적으로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나요? 백묘탑의 막내 도련님이 그런 괴물들에게 다리라도 물리면 책임지실 수 있겠어요?”

“갈! 우리 천마신교의 강고함을 의심하는 게요! 그대들의 백묘탑은 마법진의 힘으로 위태롭게 떠 있는데 거기에 신방을 차렸다가 와르르 무너지면 어쩔 텐가?”

“이익! 허구헌날 쌈박질만 하는 마교에서 우리 도련님이 뭘 배우시겠습니까! 어린 아이에겐 환경이 중요합니다, 환경이!”

“우리 귀혼산이 어디가 어때서! 공기 좋고! 물 맑고!”

“깡패들 소굴 아니오! 학구적인 열기로 가득한 백묘탑이야말로 교육에 최적화된 곳이란 말이오.”

“깡패라니, 말 다했냐!”

“그리고 댁들의 험악한 인상으로 아기에게 자장가나 불러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백묘탑엔 우아한 성대를 가진 세이렌(Seirēn)이 다섯이나 있다고요?”

“귀교의 나찰대엔 음공을 전문으로 수련한 교도가 아홉이다!”

“음공? 거보시오. 자장가 얘기하는데 또 전투기술을 들먹이고 있잖소. 무식한 돌대가리들 같으니.”

“됐고! 쌈박질로 정하자. 내 도끼 가져와, 시발!”

결국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지금의 저들은 탕수육을 부먹으로 먹을 건지, 찍먹으로 먹을 건지 결정하라고 해도 치열하게 으르렁댈 것 같다.

아니지. 그건 치열한 안건이 맞나.

먼발치서 나와 함께 구경하던 제르비어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다들 잔뜩 곤두서 있구만. 저래서야 뭐가 제대로 정해지겠냐, 용사야?”

“저렇게 실컷 서로를 향해 짖어대다가 결국엔 잦아들 거야. 왜냐면 이미 스승님과 사부님이 중요한 건 다 정해놓은 뒤거든.”

결혼식은 내일.

신혼집은 귀혼산의 복마전.

대신 둘의 아이가 성장해 다섯 살이 되면 백묘탑과 3년씩 오가며 양육.

그러다 열여덟 살이 되면 본인 스스로 마교도가 될 것인지 마탑의 식구가 될 것인지 결정.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난 상황이다.

“그러면 저 난상토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용사야?”

의미라.

사실 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가까운 회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셈이나 다름없다. 안건을 놓고 토론을 한다고는 하지만 본래 목적은 뭔가를 정하는 게 아니다.

“쟤네, 싸우는 것 같지? 하지만 아니야. 공감을 원하고 있는 거야.”

“……무엇에 관한 공감을?”

“저들은 긴 세월 동안 두 분을 절대적으로 섬겨왔어. 쌍마대전에서 죽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또 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리더에 대한 철통같은 신뢰.”

내가 섬기는 자가 층의 왕이 될 것이다.

층장의 열쇠를 쟁취하여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충의의 관계는 절대 일방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지배자 역시 피지배자에게 충성과 신뢰의 대가를 주어야만 한다.

“심지어 두 분은 전략만 짜고 정작 본인은 안전한 곳에 있는 지휘관이나 책사가 아니야. 가장 어려운 적수가 등장하면 직접 맞서 싸우는 장수에 가까워.”

그런데 누구보다 전쟁에 대한 열망에 불타올라 있던 두 우두머리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룻밤 새 아이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당황했겠지. 느닷없이 휴전이라니? 화도 나고 울분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자신들이 쌓아올리는 무공과 마법에서 각기 정점에 도달한 자. 덤볐다가는 두들겨 맞을 테니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는 거지.”

“그래서 자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 반대편 간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중이다?”

“응. 나는 그렇게 보이는걸. 마라혈귀를 봐. 평소 성격 같으면 문답무용! 이러며 당장 원탁을 박살내고 한 판 붙었을 텐데, 그냥 혓바닥만 놀리고 있잖아.”

물론 나도 저런 집단 인지부조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저들 모두가 생각 같아선 휴전 따위 집어치우고 모조리 뒤엎고 싶어 할 텐데.

과연 순탄하게 혼례가 치러질 것인가.

“내일 두 분의 결혼식…… 무척 기대가 되는걸.”

*

삼월초원의 태양은 외롭다.

자신과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는 달은 두 자매와 함께 45일마다 회합을 벌이지만, 이 세계에 빛과 열기를 가져다주는 태양만큼은 오롯이 혼자만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 외로운 태양이 묵묵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자신처럼 홀로 걸어가는 한 사내의 등을 비추며.

“본좌는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는다앗!”

무극 천마 류운학.

그는 집채만 한 바위를 짊어진 채 평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 켠에 일렬로 늘어선 600의 마교도들이 무릎을 꿇은 채 도열해 있었다.

누가 보면 천마의 무공 수련을 지켜보고 있는 줄 알겠다.

‘하지만 극마지경의 고수가 저런 무식한 수련을 할 필요는 없지.’

저것은 수련이 아니다.

길고긴 회의의 끄트머리에서 열한 명의 간부들이 마지막으로 결정한 것은 바로 혼례의 방식이었다.

간부 한 명마다 자신들의 고향에서 치러지는 혼인 풍습을 하나씩 제안할 테니, 신랑과 신부는 그것을 군말 없이 받아들일 것.

천마는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첫 타자는 폭암도인이었다.

“교주시여. 이 소인이 있던 세계는 돌과 바위, 지층에서 생명력을 얻는 세계이옵니다. 신랑이라면 모름지기 돌을 고르는 안목과 괴력이 있어야 하지요. 그 고장에서 가장 큰 돌을 짊어진 다음 걸어가 신혼집의 반석으로 삼는 것이옵니다. 돌의 크기는 신랑에게 있어 권력의 상징! 그것을 들고 옮기는 행진은 정력의 상징!”

신랑 입장.

그리하여 천마가 저 거대한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식장이 있는 귀혼산장까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떨어트리면 다시 시작점으로 가서 운반해야 한다는 것이 풍습의 핵심.

“으야아아아압!”

물론 단전에 모인 내공을 쓰면 저 바위 따위 스티로폼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 사뿐하게 목적지까지 달려갈 수 있을 텐데도 천마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단련된 육체에서 나오는 외공만으로 돌을 지탱하고 있을 뿐. 그것이 외공의 성취만으로 귀혼산의 간부 자릴 차지한 폭암도인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음 타자는 백발괴마였다.

그는 바위를 짊어지고 있는 천마의 앞으로 나서서 품에 있는 앵두 한 아름을 보여주었다.

“이 노구가 있던 세계의 혼인 풍습은 별 거 없소이다. 자고로 열매란 음양의 기운이 조화롭게 만들어낸 생명의 극치. 그것을 신랑에게 던져 건강한 자식을 낳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자, 받으소서. 천마여.”

백발괴마는 휴전 동안 백묘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동안 비밀리에 진행해 온 꼬타루수와의 서책 교환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천마는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교의 교도 중에서 정상적인 풍습을 가진 녀석도 한 놈쯤은 있어야지, 암. 본좌는 피하지 않겠네. 마음껏 던지게나.”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교도들 중 일 백의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앵두를 천마에게 집어던졌다.

툭. 툭.

따사롭고 귀여운 광경이었으나 일이 그렇게만 흘러가진 않았다.

빠아악!

누군가가 던진 앵두가 천마의 턱을 시원하게 돌려버린 것이다.

“아아닛! 방금 열매에 내공 실어서 던진 새끼, 누구냣!”

“나찰대는 아닙니다!”

“무슨 소리! 뇌신대가 그랬다는겨? 적마단 아녀?”

“어머, 시발? 억울하다!”

잠시 하객석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천마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걸로 보아 나중에 범인이 색출되면 ‘천마회풍일섬’ 한 대 맞는 건 각오해야 할 것 같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번엔 귀검신녀가 천마 앞에 하늘하늘 내려섰다.

아니, 귀검신녀들이라고 해야 하나?

천마를 둥그렇게 둘러싼 것은 총 여덟 명의 엘프였다.

“교주님, 무례를 용서하소서. 본녀가 있던 세계에서 신랑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짓에 현혹되지 않는 눈! 여덟 개의 분신 중에서 본체를 찾아내셔야 앞으로 보내드릴 수 있사옵니다.”

“기감을 펼쳐서 너의 본체를 찾아내면?”

“반칙은 아닙니다. 시도해 보시옵소서. 하나 안 될 겁니다.”

“끄음. 어렵구나. 분신들이 모두 동일한 기를 갖고 있어.”

천마의 한숨은 결코 엄살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신녀가 사용하는 분신술의 경지는 정말 대단했다. 행동과 몸짓이 모두 똑같은데다가 여덟 명 모두 그림자를 달고 있었으며…….

어이없게도 ‘용사의 심안’이 보여주는 상태창이 총 여덟 개의 이름을 띄워내고 있었다.

[이름: 딜라스틴 쿠레미], [이름: 딜라스틴 쿠레미], [이름: 딜라스틴 쿠레미]…….

아니, 교도관장이 내게 준 시스템에게마저 착란을 일으키는 분신술이라고? 완전 사기 아니야?

‘아니. 실용적이라곤 할 수 없나.’

분명 무적의 기술은 아니다. 귀검신녀는 쌍마대전에서는 물론 나와의 비무 때도 저 분신술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한 차례라도 공격을 허용할 시 무력하게 들통 나 버리는 술법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 간단한 방법을 지금의 신랑은 쓸 수 없다는 것. 그렇다고 여기서 신랑의 행진을 멈춰 세우면 나를 비롯한 모두가 곤란해진다.

‘별 수 없이 내가 도와드려야겠네.’

모두의 눈을 속이는 분신술?

어디, 이 용사가 간파해 드리지요.

때로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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