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우주에서 가장 찬란한 (2)
지금까지 난 천마와 마녀가 서로를 봐줬다고 믿었다. 그런데.
[마왕군 폭렬마법]
[4급 오의 오메가 플레어(Omega Flare)]
마치 사슬을 벗어난 맹수처럼 상대에게 폭격을 퍼붓는 제르비어스를 보고 있자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줄곧 상대를 봐주고 있던 죄수는 바로 내 곁에 있었던 것 아닐까. 대련할 때는 내 기술에 죽네사네 했던 녀석이 작심하고 전투에 임하니 경천동지할 수준이었다.
‘저러니 녀석이 있던 세계엔 용사들이 씨가 마르지.’
마왕은 나와 교착상태에 있는 마라혈귀를 제외한 다섯 간부들과 거침없이 혈전을 벌였다.
나는 업화의 쌍장을 단검처럼 뽑아 쓸 줄만 알았는데, 그와 달리 숙련도가 극에 달한 제르비어스는 그것을 채찍처럼 늘여 귀검신녀의 발목을 붙잡아 땅에 내리꽂았다.
“방심하지 마라! 귀혼오마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놈이야!”
폭암도인이 주먹으로 제르비어스를 밀어붙이며 경고했다. 그의 철산고가 마왕의 허공분쇄마탄과 충돌하며 거대한 파공음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아아앙!
놀라기는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연거푸 작렬시켰는데도, 불덩이에서 멀쩡히 걸어 나오는 마왕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화, 화염면역?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란 말인가?”
평소라면 ‘마족이 아니다. 마왕이다’라며 받아칠 법도 한데 제르비어스는 묵묵히 전투에만 집중했다. 녀석도 지금은 여유를 부릴 틈이 없는 거다.
전황은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
예상치 못한 난입과 상상 이상의 괴력을 선보이긴 했으나, 전투가 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귀검신녀와 폭암도인이 상대를 분석해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으윽!”
귀검신녀의 귀영풍참과 폭암도인의 금강권 세례를 감당해낸 제르비어스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나는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마라혈귀의 손을 놓아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이 쉐끼이이!”
손을 놓자마자 혈귀가 도끼를 휘둘렀으나 진기를 몇 움큼 빼앗긴 터라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제르비어스를 일으켜주며 속삭였다.
“바톤 터치다, 마왕. 쉬고 있어.”
그러나 녀석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차라리 같이 싸우는 게 낫다. 이제는 내가 전장에서 빠지면 마법사들이 추격해 올 테니까. 간부들이 아직 서로를 견제하는 이상 차라리 한 장소에 여섯을 묶어두는 게 현명하다.”
“쳇. 알겠어.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이미 무리하고 있는 마족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말을 마친 우리는 서로 반대쪽을 향해 뛰어올랐다. 잔뜩 화가 난 마라혈귀가 짓쳐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놈을 같이 씹어먹어주마!”
그 뒤로는 완전히 체력전이었다.
나와 제르비어스는 최대한 방어에 치중하면서 생존하는데 집중했다.
나를 보호하느라 마왕은 무리해서 큰 기술을 남발한 후유증으로 벅찼으며, 나는 흡성대법으로 마력을 양껏 충전했으나 체력이 계속 고갈되는 중이었다.
“놈들이 지쳐간다!”
“그러니 물러서라, 교도들!”
“꼴통 마법사들. 상황이 이런데도 난리냐! 일단 다리를 잘라놓고 심문을 하는 게 어때!”
마라혈귀와 드라이푸스의 대화였다. 그들이 이토록 가까이서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우리에겐 안 좋은 신호였다.
마법사들이 계산한 우리와의 안전거리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고, 솔직히 거기에 반박할 만한 무기가 내 수중엔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제르비어스와 등을 맞댄 채 헐떡였다.
“버틸 만하냐, 마왕.”
“방금 언뜻 마왕성의 풍경이 보인 것 같은데?”
“아직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
한쪽 팔이 부러진 귀검신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하지만 공격이 닿을 범위 바깥에서 걸음을 멈춘 뒤 말했다.
“일공자. 아니, 비겁한 간자여. 본녀는 그대가 마교 서열전에서 수상한 약병을 섭취하는 것을 본 적 있다. 일순간 내공을 상승시켜주는 것 같더군.”
엘릭서를 말하는 건가.
나는 인벤토리에 엘릭서 4개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검신녀 쪽에서 그걸 알 리는 없다.
“빈손으로 보이지만 그대가 품속에서 요술처럼 물건을 꺼내는 걸 몇 번 보기도 했지. 하나 이번엔 그리되지 않을 것이야. 약병을 꺼내려는 순간 내 풍참이 그대의 목을 자를 테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가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내 뚜껑을 열고 들이마시기까지, 신속의 엘프가 그걸 보고만 있을 리 없다.
“그대도 그걸 알기에 흡성대법이란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것이겠지. 그러니 잠자코 목을 내놓거라.”
어쩜 저렇게 얄밉게 말할까.
그래서 나도 얄밉게 대꾸해주기로 했다.
“선배님, 제가 가진 요술은 물건을 꺼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서요. 미천하긴 하지만 독심술 비슷한 것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을 읽진 못해도 누군가 감옥 바깥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살짝 엿볼 수가 있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당신의 귀영검법 말입니다. 그거 칼에 달라붙은 귀신들이 이렇게 베어라, 저렇게 썰어라 알려준 거라면서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허를 찔린 귀검신녀의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그래서? 지금 그대가 죽기 일보 직전인 지금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지?”
“큰 연관은 없는데요. 제가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고 꼭 좀 전해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동병상련?”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를 톡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사실은 저한테도 재수 없는 귀신같은 게 하나 달라붙어 있거든요. 그 녀석도 대뜸 종소리를 들려주질 않나, 저한테만 들리는 목소리로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나. 아주 짜증나 죽겠어요.”
“…….”
귀검신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이어나갈수록 실실거리는 것에 일말의 불안함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 종소리가 말이죠, 방금도 한 번 울렸거든요.”
내 입가에 걸린 미소는 이제 함박웃음으로 진화했다.
띠링!
[돌발퀘스트 #6 ‘자살 특공’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해가 뜰 때까지 여섯 간부들의 맹공을 버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보상으로 무극참월공이 Lv. 3으로 오릅니다.]
내가 히죽히죽 웃자 귀검신녀의 어깨를 밀친 마라혈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내 목을 붙잡고는 도끼를 눈앞에 들이댔다.
“미친놈의 헛소리를 뭘 자꾸 들어주고 있냐, 신녀야.”
흡성대법에 당한 것이 아직 분한지 그가 갈라진 혓바닥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자아, 마교의 간부들을 우롱한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냐.”
“하하하하. 안 되었다고 하면 살려주실 겁니까.”
“헤헤헤헤. 아니.”
마라혈귀의 도끼에 파지직하고 부기(斧氣)가 맺혔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도관장은 내게 준 퀘스트에 완료 판정을 내렸다. 녀석의 눈엔 이번 싸움에서 내가 살아남게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눈앞에 이리도 살기등등한 간부들이 눈을 빛내고 있는데도 말이지.
‘이유는 하나. 내가 생존 요건을 달성했다는 거지.’
순간 마라혈귀의 어깨가 크게 진동했다. 뿐만 아니라 귀검신녀와 폭암도인 또한 비틀거렸다. 마법사들은 아예 지팡이를 놓친 채 엎드리기까지 했다.
“……이건?”
주변의 모두를 무릎 꿇리게 만드는 상승무공.
삼월초원의 죄수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천마군림보]
물론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내가 시전한 것이 아니다. 그 스킬의 본래 주인이 마음껏 존재감을 뿌리고 있는 것.
게다가 나와 제르비어스에겐 천마군림보의 압력이 가해지지 않고 있었다. 피해대상을 선택해 보법을 구사할 수 있다니, 나로선 꿈도 못 꿔본 경지다.
“본좌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구나.”
천마 류운학이 북쪽에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마교의 세 간부들도 저항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천마군림, 만마…… 에에에엑?!”
그런데 천마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마라혈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못 볼꼴을 보았다는 것처럼. 그 옆에 선 귀검신녀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동공이 흔들렸다.
“어, 어머니이임!”
마법사 쪽 반응은 훨씬 더 격렬했다. 수염을 쥐어뜯는 드라이푸스 옆에서 유진 쿤딜리니는 안경을 벗어버린 다음 그걸 손에 쥐고 깨트렸다. 그렇게 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천마는 홀로 걸어오지 않았다.
마녀를 다소곳이 양손에 안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천마의 어깨에 손을 두른 채 마녀가 싱긋 웃었다.
“왜 그래. 다들 귀신이라도 보았니?”
차라리 귀신을 보았다면 덜 놀랬을 것이다. 그들의 내공과 마법으로 때려잡으면 되니까.
하지만 있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자들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 충격에서 나와 제르비어스는 벗어나 있었고.
“축하한다, 용사.”
“어. 일단 그 축하 앉아서 좀 받자.”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목숨을 내던진 작전이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그만 긴장이 확 풀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제르비어스의 목소리에도 뭔가 경악이 깃들기 시작했다.
“용사야.”
“왜?”
나는 녀석에게 모든 작전을 사전에 다 알려주었다. 그러니 중매용사라고 놀릴 수 있었던 것.
그런데 왜 다른 간부들처럼 뿔이 떨어져라 기겁하고 있는 거지?
“마녀의 배가…… 원래 저랬냐?”
그제야 나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일레인 쿠디슈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턱이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둬야만 했다.
그녀의 배가…… 볼록 솟아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임신 3개월 차 정도에 접어든 임산부의 그것처럼.
“아니, 저게? 응? 어떻게…… 저렇게 되나?”
천마와 마녀가 동굴에 들어간 시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다섯 시간. 시간을 100배속으로 빨리 감지 않고서야 저런 기적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내 뇌리를 스치는 한 마디가 있었다.
처음에 마녀는 어째서 내가 중력 마법을 배우지 못한다고 했었던가.
‘중력 마법은 대(代)를 이은 출산으로 강함을 쌓는 방식. 즉 중력 마법을 배우기 위해 없어선 안 될 것은 바로 자궁(子宮)이니라.’
자궁.
그 말인즉슨 마녀의 마력 회로는 자궁을 중심으로 온몸에 뻗어 있다는 뜻이 된다. 과연 그게 평범한 신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렇게 초고속으로 태아가 성장한다는 말이야?
나는 순간 덮쳐오는 깨달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 계산에 저런 변수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대충 ‘중매’에 성공하고 나면 다음 층으로 튀어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참월의 마녀는 단 한 번의 ‘실험’으로 내 거짓말을 꿰뚫어볼 수단을 갖고 있었다.
‘만약 회임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말해 뭐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쯤 분기탱천한 마녀의 중력탄을 처맞고 요단강을 건너고 있었을 것이다.
“교도들이 많이들 놀란 모양이구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형제와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천마가 마녀를 땅에 내려주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두 발로 선 마녀가 한 행동은 살포시 곁에 있던 남자의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서, 설명해 주십시오, 교주 님.”
귀검신녀가 말을 짜내었고,
“그래요. 어, 어찌된 겁니까, 어머니?”
그것을 록시탄이 이어받았다.
두 절대자는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던졌다.
그리고 위엄 있게 선포했다.
“오늘로 본좌 류운학과.”
“나 일레인 쿠디슈는.”
“혼인의 약조를 맺었노니.”
“곧 다가올 천 번째 쌍마대전에…….”
먼동의 햇살이 새로 탄생한 한 쌍에게 거룩히 비추었다.
“휴전을 선포하노라.”, “휴전을 선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