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나만이 없는 전쟁 (4)
내겐 파천황이 빌려준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이 있다.
레벨이 낮았을 땐 상대의 공격 경로를 예측해주는 것에 불과했는데 어느덧 체술의 레벨이 3으로 오르자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됐다.
‘특히 수준이 비슷한 상대와 진심으로 싸울 때.’
서로의 급소를 노릴 수 있을 만큼 내밀한 간격 안에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공기 안엔 다양한 정보가 담겨져 있다.
발도 자세를 취하는 무의식적 습관, 페이크를 던질 때만 나오는 코의 찡그림, 비장의 한 수를 숨기기 위해 숨을 고르는 호흡 등.
베테랑 골키퍼가 페널티킥을 차려는 킥커의 사소한 동작에서도 방향을 유추할 수 있는 원리와 비슷하달까.
‘그러다보면 상대의 전투 습관뿐 아니라…… 더 깊숙한 일면도 엿볼 수 있게 돼.’
패도적인 타격을 시도한 뒤 곧바로 연격을 이어나가는 무인은 왠지 버스를 기다릴 때 차도로 한 발을 내밀고 있을 것 같다.
수비적인 자세로 일관하며 장기전으로 몰고 가 집중력 싸움을 걸어오는 마법사는 영화관에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기 전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그들의 전법에서 전혀 상관없는 부분의 성격까지 읽게 되는 것이다.
‘불과 몇 분 정도 싸워본 상대와도 그렇게 되는데.’
123년 동안 999번을 싸워온 남녀라면 어떨까.
정말로 상대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했을까.
*
“어째서…… 여기에 침대가 있는 거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천마였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침대의 머리맡에서 무릎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그 흑기사의 흉계이겠지. 뻔히 보이는 수작이로다.”
반대편 끝에는 마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자세도 경직돼 있긴 마찬가지.
“만약 이것이 본좌를 우롱하는 간교한 술책이라면 아무리 제자의 연을 맺었다 한들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내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겠다.”
“그래.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서 양쪽의 제자 노릇을 한 사기꾼 하나를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건 쉬운 일. 당신이 손을 쓰기 전에 내가 처단한다.”
두 절대자의 분노를 동시에 받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삼월초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본좌가 한다.”
“무슨 소릴. 양보할 줄 알아?”
천마와 마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팽팽하게 이어지는 둘의 눈싸움.
그러다가 마녀가 시선을 먼저 내렸다.
“하나…… 정말로 우리 둘의 자식이라면? 그러면 우린 부모된 손으로 자식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게 되는 셈이야, 천마.”
그렇다.
그것만큼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천마가 입을 열었다.
“마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나.”
“감옥 밖에서? 아니면 안에서?”
“그것이 중요한가.”
“……마녀는 오직 적국을 짓밟기 위해 만들어진 생물병기. 유일하게 우리 자매들에게 허락된 인간으로서의 소명이 아이를 낳는 것이었지. 하지만 난 자매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 우릴 둘러싼 세계는 오직 증오와 저주뿐이었거든. 그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게 뭐가 ‘인간’답다는 거야. 나는 그러기 전에 9서클을 달성해 내 대에서 노예로서의 족쇄를 끊을 생각뿐이었다.”
“바깥에서 족쇄를 끊자, 이 감옥 안에서 또 다른 족쇄에 묶여 버린 거군.”
“그러는 당신은? 자식을 만들고 싶어 했어?”
“선대 천마 설공은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베어냈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어. 나는 복수귀가 되기 위해 가문도 버리고 혈연도 내팽개쳤다. 설공을 죽인다. 오직 그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거니까.”
천마. 죽이기 위해 살아온 남자.
마녀. 살기 위해 죽여 온 여자.
“그대도 참 더럽게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군.”
“당신이야말로 안타깝다는 말 정도는 해주지.”
메마른 미소가 둘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횃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웃음이.
“첫 쌍마대전을 기억하나? 본좌와 당신이 처음 맞붙었을 때.”
“암, 나한테 센 척하다가 허리가 반절로 접힐 뻔하고 펄펄 뛰던 모습을 어찌 잊겠어?”
“무슨 소리인가. 그대야말로 필살기가 다 막혀서 질질 짰으면서.”
웃음에 나지막한 소리가 덧붙여졌다.
죽일 수 있었다.
사실은 서로가 상대를 완전히 꺾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둘 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결을 거듭할수록 자세한 사연 따위 몰라도 상대의 심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복수심을 보았기 때문에. 그 복수심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느꼈기 때문에.
그러나 교도관의 룰은 둘을 그렇게 놔두지 않았고, 휘하에 하나둘 죄수들이 모여들어 거대 세력이 되어버린 후엔 반목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안을 하나 하겠어, 천마.”
“무슨?”
“저 흑기사가 정말로 우리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면…… 시도는 해봐야겠지.”
“시, 시도?”
“저 아이의 얼굴을 봐. 조각 같은 미남이지. 아들은 엄마를 닮는 법. 나를 닮았기 때문에 꽃미남으로 컸을 거야.”
“한데 은발이 아닌 걸? 그걸 수상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마녀의 머리카락은 실험용액에 담궈지는 과정에서 탈색되는 거야. 본래의 머리색은 알 수 없지. 오히려 당신의 검은 머리가 열성 인자라면 설명 가능해.”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나! 본좌 역시 강호에서 꿀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헌앙했던 후기지수 시절엔…… 뭐하는 겐가?”
떨그렁.
마녀가 지팡이를 바닥에 떨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회색 로브의 옷고름을 움켜잡았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천마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그만! 멈추어라.”
“실험이야. 작전이라고 불러도 좋고. 당신도 동의한 거 아냐? 일단 일을 치르고 난 후…….”
“갈(喝)! 받아들일 수 없노라. 본좌는 극마지경에 오른 무극 천마.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첫날밤을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뭐! 어쩌겠다고! 나라고 결심이 쉬운 줄…….”
천마 류운학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레인 쿠디슈.”
이름.
참월의 마녀가 가진 이름. 123년 전 대기실의 생쥐 교도관을 통해 알게 되었던 여섯 글자. 그러나 자그마치 123년 동안이나 입 안에 담아본 적 없었던 그것.
그 이름을 눈앞의 사내가 입 밖으로 꺼냈다.
“나는…… 그대에게 정식으로 우, 운우지정(雲雨之情)의 약조를…….”
천하를 호령하는 마공을 펼치는 사내가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수줍게 연모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에잇! 답답해. 이리 와!”
마녀가 천마의 뒤통수를 잡아채 침대 위에 쓰러트렸다.
물론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도 류운학이 일레인에게 힘으로 당겨지는 건 농담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일레인은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여자였다.
“이, 이봐. 응당 이런 것은 사내가 주도해야…….”
“웃기시네. 이것 역시 쌍마대전이다. 장소가 초원에서 침대로 바뀌었을 뿐.”
마녀의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이 천마의 양볼을 간지럽혔다.
그런 지척거리에서 선전포고가 울려 퍼졌다.
“그러니 난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
“사부님과 스승님이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 2시간입니다, 용사님.
“상황은?”
- 일레인 쿠디슈가 류운학의 멱살을 잡아채…… 아, 멱살이 아니군요, 이 자세는.
“그만! 충분하다!”
내가 단탈리온을 덮자 제르비어스는 자못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턴 두 분의 프라이버시다. 마도서를 통해 엿본다는 건 금기를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성공한 것 같구나, 용사야.”
“그래. 절반까지는 왔어.”
이제 나머지 절반을 위해 한바탕 칼춤을 출 일만 남았다. 말발로 때울 수 있던 단계는 끝났다. 가장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야만 한다.
우르르르릉!
공기의 묵직함이 달라졌다.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은 제르비어스조차 멀리서 밀려오는 강자들의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귀혼산장 쪽에서 달려오는 숫자는 셋.
백묘탑에서 날아오는 숫자도 셋.
도합 여섯.
“왔다.”
우두머리 수컷을 잃어버린 늑대들은 예민한 코를 발휘해 흔적을 쫓게 마련이며,
“교주님의 기가 이곳에서 사라졌다, 찾아라!”
여왕개미의 부재를 깨달은 둥지는 병정개미들을 내보내 여왕의 페로몬을 추적한다.
“백묘탑의 안위가 걸려 있다. 어머니가 이 근처에 계시다.”
곧 그들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잠시 수색을 멈추었다.
나는 걸리적거리는 흑기사의 갑옷을 수납하고, 대신에 현무패웅검을 꺼내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들.”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것은 귀검신녀였다. 양옆엔 마라혈귀와 폭암도인이 형형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공자? 그대가 어이하여 이곳에 있는 겐가.”
내가 대꾸를 하려 했으나 반대쪽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엄하군! 그는 우리 백묘탑의 형제다. 어째서 제멋대로 공자라 칭하는가, 마교의 무뢰배들.”
밤바람에 희롱당하지 않는 꼿꼿한 백발의 수염. 그 소유자는 성운의 마도사 드라이푸스 카인이었다. 그의 양옆에는 빙결 마법사 록시탄과 섬광의 마녀 유진 쿤딜리니가 지팡이를 든 채 포진했다.
두 세력의 엘리트 간부들이 당파싸움을 벌이는 국회위원처럼 삿대질을 했다.
“약초를 잘못 처잡쉈나. 미치광이 마법사들아. 마교의 적전제자를 두고 뭣이?”
마라혈귀가 포악하게 외치자,
“그쪽이야말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지 마시죠. 마탑의 어머니께 마법을 직접 사사받고 계신 형제님께 사과하세욧!”
유진 쿤딜리니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응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상대편에게 육두문자를 날리고 그걸 되받아치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까부터 내가 한 마디도 보태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다는 것을.
영민한 자들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눈치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싸우지들 마세요. 여러분들 말이 다 옳으니까요.”
현무패웅검을 바닥에 꽃은 채 칼자루 끝인 폼멜에 양손을 얹는다. 은근하게 오만한 그 자세가 여섯 간부들을 멈춰 세웠다.
“저는 천마신교의 일공자가 맞으며, 동시에 백묘탑의 형제들 중 막내가 맞습니다. 무극 천마와 참월의 마녀. 두 분의 행방을 추적해 오신 게 아닙니까? 다들 눈앞에 범인을 두고 아웅다웅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삼월초원엔 두 명의 엘프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귀검신녀 딜라스틴이었다.
“공자, 본녀가 듣기엔 그대가 지금까지 마탑의 간자(間者)로 숨어들어 있었다고 자백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교주님의 총애를 배반했다면, 그 말에 책임질 자신은 있는가.”
또 다른 엘프인 마법사 록시탄이 비슷한 강도로 나를 압박해왔다.
“결국 숨겨둔 이빨을 드러냈구나, 슈바인 스트링거. 어머니께 내 그리 경고했었거늘. 마탑주의 신병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내뱉거라!”
나는 동굴이 있는 방향에 시선을 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을 억제하는 저 지역의 특성 때문에 지금 간부들은 천마와 마녀를 코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들을 동굴로부터 최대한 멀리 떼어놓는다.’
양쪽의 간부들에게 스파이로 오해받는 상황. 몇 개의 수를 쓰면 피할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일단 첫 번째로 오해가 아니거니와…….
띠링!
두 번째로는 퀘스트를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6. ‘자살특공’]
[용사는 삼월초원의 여섯 강자에게 세치 혓바닥을 놀려 무모한 어그로를 끌었습니다. 그들은 전심전력으로 용사를 살해하려 들 것이에요. 이것은 마교 서열전도 아니오, 마법사들의 학술대회도 아닙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간부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십시오. 먼동이 틀 때까지 죽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겠어요? 다 인과응보랍니다.]
[기한: 3시간]
[보상: 무극참월공의 레벨 +1]
[실패 시: 사망]
퀘스트 설명의 행간에서 뭔가 치졸한 분노가 느껴진다. ‘어디 한 번 엿먹어봐라’ 하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교도관장은 본분을 잊지 않고 쓸 만한 보상을 내걸었다.
그렇다면 응수해줘야지.
“천마와 마녀의 행방이 궁금하시다면 덤비십시오, 선배님들. 저를 먼저 쓰러트리시는 쪽에 진실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근거리에서 마법사들보다 무인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백묘탑의 간부들이 주춤하고 있을 때, 마교 쪽에서는 문답무용으로 선공을 날린 것이다.
[태산벽력부(泰山霹靂斧)]
훌쩍 뛰어오른 마라혈귀가 벼락의 힘을 담은 도끼를 힘껏 내리찍었다.
쩌저저저저적!
마른 땅에 날벼락. 땅에 움푹 박힌 도끼를 중심으로 황금빛 전류가 난폭하게 요동쳤다.
“피했다고?”
나는 도끼가 내 정수리를 찍기 전에 [무영보]를 시전해 마라혈귀의 등 뒤쪽으로 몸을 피한 뒤였다. 천천히 등을 돌리는 혈귀뿐 아니라 지켜보던 다른 간부들의 눈도 부릅 뜨여졌다.
이형환위. 배니싱 스텝.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으나 융합 스킬 무영보는 그것들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기다.
그리고,
“어딜 공격하시는 겁니까.”
이 말은 꼭 한 번쯤 던져보고 싶었다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