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나만이 없는 전쟁 (3)
톡. 톡. 톡.
편지를 다 읽은 천마가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 말을 믿나, 할망구.”
“시끄러, 쭈그렁탱이. 집중 좀 하게.”
“본좌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로 저 흑기사가 우리 둘의 아들이라면?”
마녀는 섬섬옥수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의심 없이 순순히 믿으면 바보다. 시간을 어그러트리는 마법? 그건 내가 이 감옥에 들어와서 계속 고민했던 영역이야. 최강의 마력 회로를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던 데다 일평생 마도의 길을 걸어온 내게도 회색 지대라는 거지. 한두 번 시도해본 줄 알아? 수천수만 번 연구했지만 단 1초도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없었어. 그건, 신의 영역이야.”
“백묘탑의 탑주답지 않은 나약한 소릴. 마녀 너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본좌의 마공과 합일했다지 않은가. 본좌의 무극파천공의 기반에는 천마군림보라는 보법이 있다. 거리를 잘라내어 상대와의 간격을 좁히는 묘리지. 중력을 일그러트리는 할망구의 마법과 궁합이 나쁘진 않을 터.”
어느새 둘의 대화는 토론의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생각해 봐, 천마. 시전자의 자질이 문제가 돼. 이걸 해내려면 한 명의 육신에 마력 회로가 개발되어야 하고 동시에 단전이라는 게 자리 잡아야 해. 나는 그런 사례를 본 적이 없어.”
“물갈퀴가 달린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철석같이 믿고 있으면 실물을 눈앞에 두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 저 문 바깥의 아이가 보여준 보법과 참격을 그대도 보지 않았나.”
“하긴. 좌표를 짚어내는 능력은…… 마치 내 자식이라면 가능할 수준이었어.”
“그뿐인가. 자고로 고수의 싸움이란 기의 흐름을 다루는 것에서 판가름이 나는데, 그 영역에서도 탁월했다. 타고 났다고 봐야지. 본능적으로 강물의 물결을 읽는 뱃사공처럼.”
“물갈퀴가 달린 호랑이를…… 우리가 만들었다고?”
얼마나 집중했는지 그들은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졌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논의를 진행시켜보자고. 그대와 본좌의 피를 ‘진짜로’ 이은 자라면 시간의 장벽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천마는 상대를 그대라고 불렀고,
“제로의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뱉은 주제에 부끄럽군. 그래, 당신의 감각과 나의 기량을 동시에 갖췄다면 불가능이라 말할 수는 없겠어.”
마녀는 천마를 당신이라 호칭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거기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자는 없었다. 당면한 과제를 풀어내기 위해 머리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남네. 어째서 오늘인지에 대해서. 시간축이니, 공간축이니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 주겠나.”
마녀는 슈바인이 남기고 간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 접어 간단한 종이배를 만들었다.
평소였다면 마법진으로 척척 해냈을 일이었으나 지금은 원시적인 방식에 의존해야 하느라 모양이 삐뚤빼뚤했다.
그녀는 종이배를 좌에서 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내 중력 마법은 보통 완전한 ‘구’를 전제로 해. 그 구가 탄생하는 태초의 지점을 보통 좌표로 삼지.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고 해서 아무 곳에나 떨어질 수는 없을 거야. 당신이 강물에 비유했지? 하지만 아무리 노질이 뛰어난 뱃사공이라 할지라도 정박할 곳이 없다면 배를 세울 수 없어.”
직선으로 움직이던 종이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것을 붙잡고 있는 마녀가 흔든 것이지만. 천마의 눈동자가 그 움직임을 뒤쫓았다.
“자, 이 배가 흘러가는 궤적이 시간선이라고 생각해 봐. 본디 한 방향으로만 흘러야 하지만 마법의 힘으로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 중인 거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녀가 천마의 턱에 괴어져 있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 손바닥을 펴 종이배를 올려놓았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차원의 가능성 속에서 목표 지점에 도착한 거야. 시간의 강물을 거스르는 배가 부두를 만난 거지. 그 부두가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삼월초원이고. 좌표라는 건 아마 이 뜻일 거야.”
“응? 어, 응?”
“뭐야, 집중하고 있는 거 맞아?”
“크, 크흠. 그렇다네.”
마녀는 갑자기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천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쏘아보았다.
반면 천마는 지난 999번의 싸움을 복기해보고 있었다. 삼월초원의 기둥 앞에서 서로를 향해 무시무시한 절기들을 뿜어대었으나…… 충돌했던 것은 장풍과 중력파들이었다.
즉, 서로의 신체가 이렇게 직접 접촉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
“이제부터 중매용사라 불러주마.”
“하나도 안 웃겨, 독수리 사육사.”
“네 발상이 어떻게 시작됐는진 알겠다. 하지만 그들이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언제 확신했나.”
“확신은 못 하지. 말했잖아. 성공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내가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상태창에 뜨는 표식처럼 분명했다면 인류사에 비극적 로맨스 같은 것은 전해지지도 않을 거야. 원래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감정도 잘 들여다보지 못하거든. 그런데…….”
“그런데?”
“나는 두 분의 제자로 몇 주를 살아왔어. 그래서 그들의 기술체계와 거기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신념과 성격도 유추할 수 있었지. 사제 관계에서만 나오는 어떠한 유대. 마교의 귀혼오마는 사부님을 지나치게 두려워해. 백묘탑의 육망성은 스승님을 과도하게 경배하지. 공포와 경배는 둘 다 눈을 가려. 때문에 종종 잊어버렸을 수 있어. 자신들의 수장이 ‘인간’이라는 걸.”
나는 순간 0층의 대기실에서 눈을 떴을 때를 생각했다.
내게는 허락된 적 없으나 어쩌면 존재했을지 모를 IF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려 한다.
멀쩡했던 팔과 다리에 족쇄가 채워지고 내가 생면부지의 차원에 끌려왔으며, 거기가 탈출불가의 감옥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무서웠어.”
그런데 반대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철컹이는 족쇄의 마찰음.
“그렇게 무서웠기 때문에 저기 어딘가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크게 안도할 수 있었어. 물론 그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식인 홉고블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런데 내 입소 동기가 차카 도기노브가 아니었다면.
폭력과 살육의 화신이 아니고, 내 귀와 혀 중 어느 것을 먼저 씹어줄까 협박하는 괴물이 아니었더라면.
“젊고 싱그러운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참월의 마녀처럼?”
“아니…… 스승님처럼 아름다울 필요도 없어. 대화가 통하고 공감력이 있는 보통 수준의 사람이기만 했더라면.”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동질감, 어둠 속에서 교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을 때 자연히 의지를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때 두 분은 서로가 천마인 줄도, 마녀인 줄도 몰랐을 거야. 다만 사내 류운학과 여인 일레인으로서 얼굴을 마주 봤겠지. 철장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걸어 나와 교도관의 안내에 따라 그 기나긴 복도를 걸으셔야 했겠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말이야.”
나는 그때 무언가가 일어났다고 믿는다.
적어도 둘 중 한 명의 가슴 속에는 어떤 불씨가 피어올랐을 것이다. 기나긴 세월에도 꺼지지 않는 불씨가.
“동굴에 몰아넣고 둘이 맺어지길 기다린다. 정말 이 단순한 작전이 통할까? 나는 마족이지만 너희 인간 놈들의 상열지사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는 건 알고 있어.”
제르비어스의 지적은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 역시 여러 번 곱씹으며 되새김질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 지배력을 발휘해 온 백전노장들이지. 단순히 우리 속에 가둬놓는다고 짝짓기를 하는 금수들과 같다고 생각하진 않아.”
“거 봐라. 준비물을 넣었을 때 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라 하지 않았냐.”
“이익! 이게 장난인 줄 알아? 미래에서 온 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데! 그 옆에 떡하니 <마왕이 너무 잘함>을 두고 나오자고?”
마왕은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대마도사의 부적절한 성인식>은 왜 빼놓냐. 그 두 권을 놓고 왔다면 성공 확률이 20퍼센트는 올랐을 거다. 이 감옥에 술을 구할 데가 없었다는 게 아쉽군.”
푸르가토리움이 평범한 감옥이었어도 죄수들에게 술을 제공할 리가 없지 않나.
“하긴. 네 공로가 전혀 없던 건 아니야.”
“응? 이제야 인정해 주는 거냐, 중매용사.”
“마법 서고에서 전에 네가 그랬었지.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오욕칠정과 희노애락 어쩌구 하면서.”
“어…… 그랬나.”
전혀 기억 못하는 눈치다. 역시 그냥 헛소리를 주워 담았던 건가.
하지만 그걸 내가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흑기사 연대기>와 <흑협전설>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두 작품의 주인공이 초반에 만나는 상대에 주목했어. 흑기사와 흑협 모두 모험을 펼쳐나가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는 지점. 흑기사는 우직하지만 자신만의 철학을 관철하는 애꾸눈 집사와 사랑에 빠지고…….”
마왕이 내 말을 그대로 받았다.
“무림의 풍운아 흑협은 목청이 크고 입이 걸걸한 흑발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 어?”
“그 성격이 마치 서로를 암시하는 것 같지 않아?”
두 작품은 영웅의 일대기였다. 작가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위인화 시킨 것이다.
죽은 자의 위인전을 만들 때는 당연히 작가가 많은 부분을 지어내야 하겠지만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자서전을 집필할 때는 더 좋은 방법을 쓸 수 있다.
“작가들은 천마와 마녀를 각각 인터뷰했던 거야. 물론 두 분은 그게 인터뷰인 줄 몰랐을 수도 있고.”
그들이 감옥 바깥에서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청해 들었을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아. 흑협이 십만대산에서 분노하는 장면이라거나, 흑기사가 정체를 숨기고 남장여자로 활보해야 했던 장면 등.
“두 분이 내게 해준 이야기들과 많은 게 겹쳐.”
“그 작가들이 천마와 마녀의 이상형 또한 작품에 반영했다? 하지만 용사, 이번에 너의 추리는 잘못되었다. 천마는 애꾸눈이 아니고 마녀의 머리카락도 흑발이 아니잖나.”
“외모는 일부러 정반대로 바꿔서 대답했겠지, 멍청아. 하지만 캐릭터의 성격을 보란 말이야. 이상형이라는 것에 원래 외모는 큰 의미 없어. 성격을 봐야지, 성격!”
서로 절대 상대를 유추하지 못하게 정반대의 외모를 말했다는 건, 어쩌면 서로가 상대를 이성으로서 지극히 의식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게 다 내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행복회로에 불과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뭐, 이게 내가 지어낸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나리오가 되겠지.”
*
천마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다시 화제에 몰두했다.
“마녀, 당신의 말은 이해했어. 회귀자가 배라면 우리가 있는 이 시점의 삼월초원은 정박할 수 있었던 부두란 얘기지.”
“그 배는 지난 번 쌍마대전 때 닻을 내렸어. 세 개의 달이 만들어내는 마나 스트림의 폭류가 일어나는 날. 현명한 계산이지. 시간여행의 화이트홀이 만들어내려면 나였어도 삼만월의 밤을 노렸을 테니까.”
동굴의 벽에 누군가 박아놓은 횃불이 불씨를 틱틱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삼만월의 밤은 45일마다 한 번씩 찾아와. 실제로 우리는 999번이나 그것을 겪어 왔고. 즉, 저 흑기사가 하필 오늘을 택한 당위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무수히 많았을 999번의 후보들은 통과하고 하필 오늘을 좌표로 택한 이유. 어째서 이 배는 이때를 목표로 배를 멈추었는가.
그게 천마의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마녀는 진작 그 답을 알고 있었다.
“999번의 과거는 상관이 없어. 지금까지의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좌표로 지정했을 테니까.”
“음? 그대는 뭔가 아는 눈치인데.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무엇인가. 말해다오, 마녀.”
마녀의 은발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꽉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묘탑의 대모는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놀리는 거지? 내가 여기까지 말했으면 어련히 알아들어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인가. 본좌는 그대를 놀릴 생각이 전혀 없거늘. 적어도 지금은.”
콰아앙!
마녀가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는 소리였다.
“이 등신천치야!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그러니까 뭘! 본좌는 마법사가 아니란 말이다. 지금까지 잘 설명해놓고 왜 느닷없이 역정인가!”
“이익. 오늘 밤이라고! 이제까지 시간선에 존재하지 않았던 흑기사가 오늘 밤 이 세상에 처음으로 좌표를 남겼겠지. 그러니까 내일이 오면 존재할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거고!”
시간선. 좌표. 존재.
그것들을 하나로 묶자 천마 역시 강렬한 깨달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탁자를 때린 마녀의 손바닥보다 더 붉게 달아오른 것은 그녀의 양볼이었다.
천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 오늘…… 우리의 아들이 잉태되었다는 말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