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나만이 없는 전쟁 (2)
“미래?”
천마 류운학은 마치 생전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두 글자를 입에서 굴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단어는 ‘미래’가 아니라 그 다음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보다…… 누구의 아들이라 하였느냐?”
난 지금 스스로를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혼연일체의 몰입을 한 배우. 연극에서 배우는 온몸으로 대사를 표현한다.
당당하게 손을 뻗어 그를 가리킨다.
“청성파의 일대제자였으나 지금은 천마신교의 8대 교주이신 류운학. 당신이 저의 아버지이고…….”
반대쪽 손끝엔 마녀가 있다.
“마굴에서 생체병기로 키워진 그라비타스 도미누스. 일레인 쿠디슈가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천마는 체통도 없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마녀를 가리켰다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이 할망구랑?”
그러나 마녀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제법 흥미로운 개소리를 일삼는구나, 갑옷의 사내여. 거짓과 기만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야.”
갑옷 속에 자리한 누군가의 폐부까지 꿰뚫어보려는 듯,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라고 주장하는 그 말이 옳다고 한다면…… 내 질문에도 답할 수 있으렸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어머니.”
어머니라는 내 말에도 조금도 움찔하지 않는다. 실로 참월의 마녀다운 반응.
이제 본게임이다.
“네 말대로라면 과거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는 것일진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느냐. 그건 내가 있던 세계에서 전설로만 내려오는 10서클의 중력 마법에만 가능한 이적이다. 훗날의 내가 결국 그것을 이뤘다는 말이니?”
첫 수부터 함정이다.
만약 내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마녀는 10서클의 중력 마법이 구현되는 이론이나 술식을 읊어보라고 할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걸 모른다. 10서클의 중력 마법이 실존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대신에 난 다른 대답을 준비해왔다.
“아니오. 어머니께선 끝내 10서클에 당도하시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를 과거로 보내는 블랙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셨지요. 그건 혼자만의 힘이 아니셨습니다.”
내 시선을 따라가던 마녀가 여전히 혼탁한 내면에 빠져 있는 천마의 얼굴에 꽂혔다.
“저자가 도와줬다?”
“네. 아버지가 품은 무극천마공의 초월식이 무엇인지 아시죠?”
“아수라대멸겁(阿修羅大滅劫).”
여덟 개의 팔로 여덟 개의 칼을 휘둘러 공간을 참하는 필살의 신기.
나는 단탈리온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수라는 알겠어. 그런데 대멸겁은 뭐야? 그냥 멋있으라고 붙인 이름일까?’
-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천마님의 세계관에서 ‘겁(劫)’은 시간을 재는 한 단위입니다. 우주가 개벽하던 순간으로부터 다음 개벽이 올 때까지의 시간. 즉,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재는 단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멸겁이라는 건 그렇게 까마득한 시간을 잘라낸다는 뜻으로 보면 되겠네?’
- 그렇습니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잘라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일격이라는 뜻을 담아 붙인 기술명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몹시 중요한 힌트가 되어주었다.
“무한의 시간을 잘라내는 아버님의 ‘아수라대멸겁’. 그것이 우주 전체의 공간을 짓누르는 어머님의 최종영창 ‘아스트로노미컬 디스트럭션’과 결합해 블랙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공간을 압축하는 내 마법과 시간을 잘라내는 저자의 마공을 합쳤다?”
마녀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떼었다. 생각의 속도를 가속시켜 내 말이 이치에 맞는지 계산하는 것이다.
내겐 그 짧은 순간이 마치 ‘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일리는 있어.”
휴우. 다행히 첫 관문 통과인가.
“하지만 이유는 없다. 네가 말한 이야기엔 ‘어떻게’만 존재하고 ‘왜’가 보이질 않는구나. 부모가 어찌하여 아들을 과거로 보낸단 말이냐.”
“그건…….”
여기서 한 번 뜸을 들인다. 감정을 추스르다가 결국 복받쳐 오르는 회귀자의 심리를 재현해내야 하니까.
“지금으로부터 18년 뒤, 삼월초원에 한 사내가 내려왔습니다. 그자의 이름은 ‘설공’. 단신의 힘으로 귀혼산장과 백묘탑을 무너뜨린 천마였죠.”
“뭣이? 설공이라 하였느냐?”
천마가 내 멱살을 잡을 듯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마녀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다는 말에 받았던 충격은 온데간데없이 철천지원수의 이름에 반응한 것이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힘을 합쳐 그를 상대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아들만큼은 살리고자 모든 힘을 짜내어 블랙홀을 만들어내신 뒤 저를 밀어 넣으셨습니다.”
“하나 내 계산으론 내 마력 회로가 두 배가 된다 해도 블랙홀을 유지할 순 없어. 구동원리를 모르니 백묘탑의 다른 형제자매들도 힘을 보탤 수 없고. 어디서 그런 막대한 동력을 얻었단 말이냐?”
마녀는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수를 바로 꺼내기로 했다.
“이것은 단탈리온이라는 마도서입니다. 공중에 존재하는 에테르를 수천 년 동안 흡수해온 탐식의 괴물이지요. 저는 백묘탑의 마법 서고를 뛰놀다가 우연히 이 녀석을 발견했습니다.”
“으흠?”
마녀의 머리카락이 치솟아 올랐다. 단탈리온이 갖고 있는 끝 모를 MP 수치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MP: ???,???]
이 녀석의 MP 수치는 측정불가.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유해가 보여준 상태창을 제외하면 최고로 높은 수치라 할 수 있다.
“블랙홀을 만들어내고 제가 무사히 과거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지켜준 고마운 녀석입니다.”
물론 단탈리온은 내 손 안에서 얌전히 있지 않았다. 자꾸 페이지를 펼치려고 꿈틀대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 힘을 풀지 않았다.
아마도 왜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느냐고 항의하고 있겠지.
비로소 마녀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일말의 가능성이 실존함을 깨닫고 생각에 잠긴 것이다. 반면 천마는 미래에서 자신이 왜 설공에게 패했을까 따져보는 것인지 분한 표정이었다.
1단계. 존재할 리 없는 무공과 마법을 보여줘 시선을 끈다.
2단계. 미리 설계해둔 이야기를 풀어내어 논리의 정합성을 증명한다.
3단계. 단탈리온의 마력을 엿보게 해 수단의 개연성을 보강한다.
이제는 마지막 단계를 행할 차례다.
바로 논리를 뛰어넘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
나는 천천히 흑기사의 투구를 벗었다.
“너는?”, “어찌?”
시원한 삼월초원의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전까지는 둘을 완벽히 속여야 했기에 표정을 가려야만 했지만, 마지막 단계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네. 저는 두 분의 제자가 아닙니다. 다만 가까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지켜보고 싶어서 그동안 정체를 숨겼습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부모님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다면 나는 어떤 심정일까.
하루도 쉬지 않고 나는 그것만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별도의 연습도, 훈련도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
“어? 용사야. 울었냐.”
제르비어스는 꼭꼭이에게 매달린 채 하늘에서 내려 왔다. 그러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은 것이다.
“메소드 연기의 일부라고 해줘라.”
나는 대충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흑기사의 장갑은 딱딱해서 감촉이 그닥 좋진 않았으나 눈물을 흘린 자국은 닦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천마와 마녀는?”
제르비어스의 질문에 나는 동굴을 가리켰다.
지금은 굳게 닫힌 문. 두 절대자는 지금 저 안에서 내가 남긴 편지를 읽고 있을 것이다.
둘의 경쟁의식은 여전했다. 마치 늦게 들어간 쪽이 대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는 듯 거의 동시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결계 같은 거라도 쳤나?”
“아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운명은 내 손을 떠났어. 나머지는 사부님과 스승님께서 서로 결정할 일이지.”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걸 후회하진 않겠어?”
“후회는 성립되지 않아. 만약 내가 어떤 치명적인 덫을 놓고 두 분을 동굴 안으로 들어가라 했으면 거짓말이 들통 날 위험이 있었어. 두 분이 스스로 저기에서 걸어 나와야 의미가 있다.”
정말 그것뿐인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왕. 녀석은 망토를 뒤로 한 번 펄럭이더니 아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뭐하는 거야?”
“오래 걸릴 거 아냐. 너도 앉아라.”
녀석의 말대로 주저앉았다. 아직 흑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던 터라 엉덩이가 쿡쿡 찔리는 느낌이다.
“용사야.”
“응.”
“어디에서 힌트를 얻은 거냐?”
처음 위화감을 느낀 것은 단탈리온을 만난 날이었다. 녀석이 자신을 테스트해보라며 답해준 질문 중엔 이것도 있었다.
천마와 마녀. 둘 중에 누가 더 강한가.
“거기에 단탈리온은 내가 지불할 수 없을 만큼 비싼 대가를 요구했어. 나는 그걸 이렇게 해석했지. 교도관장이나 교도관이 정보 열람을 막고 있는 거라고.”
그렇다면 왜 그들은 내가 그 정보를 아는 것을 막으려 했을까.
누가 더 강한지를 내가 알면 ‘반칙’이 되는 것이다.
또 어느 한쪽이 분명히 힘의 우위에 있긴 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 알 필요는 없어. 힘의 균형이 정확히 평행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다는 게 중요하지. 그런 싸움이 999번이나 이어졌다면?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이유에 달리 뭐가 있겠어.”
나는 한 가지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애정.
그것도 남녀 간의 애정.
“둘 중 한 명은 상대를 봐주고 있어.”
“뭐라?”
“애초에 이 쌍마대전이 천 번 가까이 결판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말이 돼? 천외천의 고수 둘의 존재가 서로를 견제한다지만, 그것은 불과 얼음처럼 완전히 반대되는 속성에서나 가능한 일일 거다.”
“상성싸움을 말하는 거냐. 한데 천마와 마녀는 공간과 중력을 다루지. 어떤 면에서는…….”
“그래. 그 두 분의 속성은 비슷해. 한쪽은 붓으로, 한쪽은 만년필로 결국엔 같은 그림을 그려 오신 거야. 어느 한쪽은 아주 근소하게라도 더 많은 페이지의 그림을 그려냈을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도 계속 무승부라면…….”
“이 평행 대치 상태가 계속되길 바라고 있다?”
“어. 자신이 등반 죄수가 되어 상대와 이별하는 것도, 상대를 먼저 올려 보내 엇갈리게 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거지.”
“만약에 말이다, 용사. 너의 몇 단계를 건너뛴 추리가 제대로 적중해서, 혹은 그보다 더한 경우라면…… 서로가 서로를 놓아주지 않는 관계일 수도 있지 않나.”
“그래. 세계 최강의 츤데레 두 명이 하필 서로에게 반해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었던 거겠지.”
*
동굴 안이 범상치 않다는 걸 먼저 깨달은 것은 천마 류운학이었다.
“할망구, 마법진 그릴 수 있어?”
“음? 그야…… 안 되는군?”
몇 번 시도해봤으나 마나가 전혀 모이지 않는다는 걸 일레인 쿠디슈는 금방 인정했다.
“결계인가? 잡스러운 함정이라면 곧 술식을 계산해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진법 같은 걸 쳐놓았다면 동굴 바깥에서 내 기감이 탐지했을 거다. 저건 그냥 평범한 문짝이야. 내공도 필요 없이 힘을 줘서 밀면 열릴 거다.”
그렇다면 슈바인 스트링거는 어째서 이런 장소를 번거롭게 마련해 놓은 것인가.
함정을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를 기껏 발견해놓고, 그러지 않았다는 건…….
마녀가 탁자 앞에 앉아 반대쪽 의자를 가리켰다.
“당신과 내가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라는 거겠지. 일단 앉아. 편지를 읽어보자고.”
천마는 쭈뼛쭈뼛거리다가 결국 빈 의자에 엉덩이를 대었다.
탁자 위에는 정갈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마녀가 그것을 펼쳤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움을 담아 이 편지를 씁니다. 두 분이 이것을 읽으신다는 것은 제 목을 따버리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겠죠?]
실제로 이야기를 듣기 전에 목을 따 버리려 했던 천마가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마녀는 그걸 무시하고 바로 다음 줄을 읽어나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목숨을 버려가며 저를 과거로 보내주셨으나, 제 운명은 지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머니라면 아시겠지요. 시간축에서 어긋난 존재는 공간축에서도 튕겨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지만 제 세계선에서 비롯된 ‘좌표’는 곧 기한이 다합니다.
네. 오늘밤이 지나면 저는 소멸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