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폭풍 전야 (5)
쌍마대전의 전제를 근본부터 뒤엎는다.
그것이 내가 세운 플랜의 골자였다. 물론 그것을 성공시키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 번째로는 무기.
“오래 기다렸네, 일공자. 이것이야말로 이 귀혼산에서 본인이 만든 무기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만검패웅이 내민 그것은 ‘목검’이 아니었다.
물론 손에 닿는 자루의 외피엔 목재가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검신과 그 검신을 지탱하는 고동과 검반은 모두 ‘현무의 등껍질 파편’으로 이뤄져 있다. 갈색 표면 위에서 영롱한 광택이 춤을 추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매끈하게 다듬어진 검신의 길이는 약 1미터 50센티미터. 평소처럼 내공을 불어넣자 무엇이든 잘라낼 수 있는 검기가 2미터 30센티미터에 가깝게 늘어났다.
“조심하게, 천장이 잘려나갈 수 있으니까.”
“대단하군요. 익숙해지면 사정거리가 목검을 쓸 때에 비해 훨씬 늘어날 것 같아요. 초식의 파괴력도 강해지겠죠?”
“두 말하면 입 아프네, 공자. 이 검을 만든 재질은 내공을 포효에 실을 수 있는 영수의 유해.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과는 비교할 수 없지. 자네의 검기를 훨씬 오래 지속시키게 해 줄 걸세.”
나는 검기를 해제한 다음 다시 탁자 위에 검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필생의 역작을 완성한 도공의 얼굴을 한 만검패웅에게 말했다.
“이 검의 이름을 ‘현무패웅검(玄武覇雄劍)’이라 하겠습니다.”
“으음? 본인의 별호를 검에 넣겠다고?”
“현무의 조각으로 패웅이 만들었으니까요.”
“흐하하하! 과연 공자가 장인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군. 현무패웅검! 마음에 드네. 이 검으로 마탑의 마법사들을 호쾌하게 쓸어버리도록!”
짤막한 목검과 달리 이 검은 허리춤에 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검패웅은 등에 편히 걸 수 있도록 걸이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친절한 대장장이다.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서 패웅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에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
두 번째는 갑옷.
“어라? 이렇게 빨리 다시 찾아오셨네요?”
지금까지 나는 귀혼산장에 있을 때는 흑색 도포를, 그리고 백묘탑에서 거닐 때는 회색 로브를 건네받아 입고 다녔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는 완전히 새로운 코스튬이 필요했다.
“네에? 저 마네킹이 입고 있는 갑옷을 빌려달라고요?”
마법사 꼬타루수가 난색을 표했다. 그는 양 손을 펼쳐서 마네킹을 막아섰다. 마치 강도로부터 금고를 지켜내려는 집주인처럼.
“제가 이걸 완성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습니다!”
“형제의 장인정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 그리고! 이건 겉보기만 그럴싸할 뿐 방어효과가 일절 없어요. 예쁜 깡통이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바로 그 예쁜 깡통이 제겐 꼭 필요합니다.”
물론 저 흑갑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흑기사의 무장처럼 전설의 금속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무를 잘라서 이어붙인 다음 검은색 도료로 칠한 것에 불과했다.
“끝내 거부한다면 앞으로 형제가 백발괴마와 서책을 교환하는 일은 어려워질 텐데요.”
바람의 마법사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흑갑에 손을 대었다.
[F급 방어구 ‘흑기사의 갑옷(레플리카)’을 얻었습니다.]
[용사는 정당한 소유권 대여를 통해 갑옷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무기와 갑옷이 갖춰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내가 마음껏 한바탕 난동을 부리려면 ‘장소’가 있어야 한다.
전장(戰場).
나는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삼월초원을 헤매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망할 용사야. 이게 반드시 효과가 있어야 할 거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걸어가고 있다. 녀석의 두 뿔은 정면을 향해 뻗어 있었고, 한쪽의 뿔이 꿈틀거릴 때마다 걸음의 방향을 미묘하게 바꾸고 있었다.
“오, 그쪽이냐?”
“흐음. 잘 모르겠는데.”
“안테나가 말을 안 들으면 때리라고 배웠는데.”
“아, 이쪽이 확실하다.”
삼월초원에 떨어졌던 첫 날.
마왕은 마력의 흐름을 탐지할 수 있는 뿔의 힘을 보여 줬었다. 나는 이제 그 흐름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다.
마나 스트림(Mana Stream).
자신을 인간탐지기, 아니 마족탐지기로 써먹는 것에 여전히 불만이 많은지 제르비어스가 가시 돋친 말로 물었다.
“용사, 네가 말한 그 구역이 이 층에 존재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확신은 못 해. 다만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생각만 하고 있는 거지.”
“어어엉? 단탈리온이 이야기해준 것도 아니고?”
“그놈도 만능사전은 아니야. 답을 듣는데 가격이 좀 비싸야지. 그러니 이건 온전히 내 추리에서 나온 부산물이다.”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인공적으로 블랙홀을 만들 수 있다고요?’
‘어디까지나 전설상의 10클래스 대마법사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블랙홀이 뭔지는 아는 모양이구나?’
‘어…… 우주에 있는 검은 구멍 아닌가요? 뭐든지 다 빨아들이고 그 안에는 시간까지도 왜곡된다고 하던걸요.’
‘정확히는 별을 짓누르는 중력이 한계를 돌파하면 생겨나는 천체현상이지. 결국 그 또한 통상 우주 어디에나 작용하는 힘인 ‘중력’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일. 중력을 다루는 마법사의 능력이 극의에 다다르면 인위적으로 그 블랙홀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스승님은 하실 수 있으신가요?’
‘아니. 나 역시 애써보았지만 불가능했어. 한 점이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주 어딘가에 모든 것을 뱉어내는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아직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화이트홀이 그것이지. 하지만 우주 어디에 있을지 모를 화이트홀의 좌표를 계산한다는 것이 과연 인간의 지성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구나.’
‘화이트홀이란 게 없다면요? 단지 허상의 개념이라서 좌표 탐색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 않을까요, 스승님.’
‘마법사는 자연의 힘을 다루는 자들. 그 자연의 대법칙은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것이야. 우주의 대법칙인 인과율 아래 모든 원인에 결과가 따라오는 것처럼 수렴의 반대편엔 방출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스승님은 내게 자연의 힘은 ‘순환’이 기본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렇다면 마나 스트림 역시 그렇다고 가정해볼 수 있지.”
“마력이 한 곳에 응집하는 이 세계라면…….”
“응. 어딘가엔 마력의 공백 지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게 내 추측이야.”
거대한 마력의 방출점은 이미 만나본 적이 있다. 삼만월의 밤에 떠오르는 빛의 기둥 말이다.
그렇다면 어딘가엔 수렴점도 있을 수 있지 않겠나. 그게 내가 마왕을 이용해 찾아내려는 지점이다.
‘물론 틀렸을 수도 있지.’
층 하나가 바로 교도관이란 초월적 존재가 꾸려나가는 ‘인공 스테이지’다. 그래서 방출점만 만들어놓고 수렴점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왕의 뿔이 있다면 도박을 걸어볼만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내 기대는 보답 받았다.
“여긴 것 같다, 용사. 아니. 여기일 수밖에 없어.”
삼월초원의 북쪽 끝.
오직 암석으로만 이뤄진 거대한 언덕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제르비어스가 가리킨 곳은 바로 그 동굴의 입구였다.
마나 스트림의 끝.
“여기서 기다려. 내가 가볼게.”
동굴 안에 들어서자 주변의 지형지물을 민감하게 느끼는 기감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해보려 했다.
하단전에서 출발한 내공이 사지의 끝과 정수리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일주천. 하지만 내공은 하단전에만 머물러 있었다.
‘마법을 써 볼까.’
술식 전개를 위해 마법진을 그려보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 위에선 동굴이 뱉어내는 암흑만이 헛돌고 있을 뿐, 마나는 모여들지 않았다.
“찾았다.”
이건 잭팟이다.
온라인 게임으로 치면 여기는 비전투 구역인 ‘마을’이나 다름없다. 스킬을 강제봉인당하는 영역인 것이다.
“제르비어스, 안으로 들어와서 업화의 쌍장을 꺼내 봐.”
마왕 또한 내가 겪었던 현상을 그대로 겪어야만 했다. 폭렬마법을 전혀 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녀석은 마족이어서인지 동굴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단 1초도 있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투덜거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슈바인.”
“천마와 마녀. 두 스승을 이곳으로 유인할 거다. 물론 지금 상태론 곤란해. 중립구역의 죄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줘. 말을 안 들으면 그 과정에서 힘을 써도 좋고. 이 동굴에 출입문을 만들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어야 하거든. 정확히 뭐가 있어야 하는지는 이제부터 써 줄게.”
나는 단탈리온을 꺼내 두툼한 페이지 중에서 한 장을 부욱 찢어냈다.
- 끄아아아악!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용사님!
“딱히 메모지로 쓸 게 없어서.”
- 쥐 잡는 데 용 잡는 칼을 쓰시는 거라고요! 제가 얼마나 귀한 몸인지 전혀 몰라서 이런 만행을 저지르시는 겁니다! 그렇게 다 뜯어내면 전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몇 장 더 뜯어내기 전에 글씨 지워라.”
- ……넵.
굳이 불필요한 말줄임표를 그려내는 게 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나는 뜯어낸 페이지를 단탈리온의 표지에 대고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왕이 뭔가를 발견하고 물었다.
“용사, 그 펜은 어디서 난 거냐? 화룡도에서 꽁쳐온 건 아닐 테고.”
“백묘탑의 마법 서고인 유진 쿤딜리니에게 빌려왔어. 내가 실전에만 강하고 이론이 약해서 학습 도구가 필요하다고 하니 선뜻 빌려주던걸.”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차라리 네가 마왕 해라.”
“이 잘난 얼굴에 뿔은 안 어울린다. 자, 여깄어.”
메모지를 제르비어스에게 건네주자 녀석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이것들이 다 뭐야? 천마와 마녀를 쓰러트릴 함정을 만들려는 거 아니였냐, 용사? 네가 써준 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유인한다고만 했지, 함정을 만든다곤 안 했어.”
“마법과 무공을 동시에 봉인할 수 있는 장소다. 그 둘을 제거하기에 이보다 더한 조건이 어디 있다고? 물론 용사, 너답지 않게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라고는 생각했다만.”
“오해야. 마법사인 스승님이야 그렇다 쳐도 사부님께선 내공이 봉인당한 채로도 나를 찜쪄먹으실 수 있을 거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나 부비트랩 같은 건 필요 없어.”
“알았다. 무슨 꿍꿍인지 몰라도 일단 다녀오겠어.”
“하루. 하루 안에 갖춰놔야 할 거다.”
“젠장. 중립촌을 탈탈 털어오란 거군.”
제르비어스가 중립구역을 향해 떠나자 나는 다시 동굴을 빠져나왔다.
두 개의 만월이 서로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달빛만으로 독서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계획의 점검을 위해 펜을 꺼내들었다.
물론 이번엔 단탈리온의 페이지를 찢을 필욘 없었다.
- 용사님, 그냥 불러주시기만 하면 저는 기록을 할 수 있습니다. 용사님이 직접 이렇게 글자를 쓰시면…… 에헤헤헥! 간지럽단 말입니다!
“물론 말로 하면 속도야 빠르겠지. 하지만 손수 써내려가면서 계획의 빈틈을 발견하고 메우는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어. 그리고 난 내 계획을 교도관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손으로 쓰는 데엔 그런 이유도 있다.”
당연히 교도관은 심통을 터트렸다.
[2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에게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봤자 자신이 만든 세계를 깨부술 순 없을 거라 경고합니다. 오직 쌍마대전의 정식 승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자부합니다.]
나는 마치 야수의 눈동자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계속 그렇게 자부하고 있어. 그래야 그 오만함을 깨부숴주는 맛이 있지 않겠냐.”
*
그로부터 또 하루가 흘렀다.
오전.
나는 평소처럼 귀혼산에서 천마와 무공을 수련했다.
“훌륭하다. 이젠 귀검신녀와 다시 맞붙어도 누가 이길지 확답하기 어렵겠어.”
오후.
백묘탑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녀의 비행을 추격했다.
“술식이 더 정교해졌구나. 이제는 스스로 탐구하며 경지를 가다듬는 것만 남은 듯하다. 내가 가르쳐줄 것이 없다.”
두 스승이 수업을 마치며 한 말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사흘 후”, “삼일 뒤”
“할망구의 제자를 만나거든”, “쭈그렁탱이의 제자 놈을”
“박살내거라.”, “조져버리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