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57화 (57/300)

#057. 폭풍 전야 (4)

1층 화룡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야만’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이글거리는 용암. 바위에 굴을 뚫고 가둬진 죄수들. 돌을 캐는 노역.

무엇보다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와 그에 핍박받는 약자까지.

분명 그곳은 야만의 소굴이었다.

한데 문명이라고는 없었던 화룡도와 2층 삼월초원은 달랐다. 고차원적인 문화 생산과 향유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작가와 그것을 소비하는 독자가 여기 있었다. 심지어는 백년 넘게 으르렁대는 적군과 밀통하여 교환해보기까지 하고 있다.

제르비어스는 백발괴마가 건네 준 책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었다.

<색마협객 강호패도기 11권>

……문제는 저 불온서적 같은 제목이다. 도무지 진지해지다가도 어이없는 기분만 느끼게 될 따름이다.

“마용 클랜 형제들? 여긴 어인 일인가.”

꼬타루수라는 마법사는 그림들로 가득한 벽면의 공방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림들은 모두 똑같은 인물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여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심지어 꼬타루수의 등 뒤엔 실물 크기의 마네킹에 갑옷이 걸려있기까지 했다.

‘마치 토이샵에 걸어놓은 피규어 같은걸.’

한편, 제르비어스가 내민 서책을 받아든 꼬타루수의 얼굴에선 경계심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오오오! 따끈따끈한 신간 아니오! 백두독취가 이틀째 날아오질 않아서 걱정했는데. 형제들이 나를 살렸군요.”

“……어디 있나.”

“뭐가요?”

“색마협객의 이전 권들. 냉큼 내 놔.”

“아, 알겠습니다.”

마왕의 살벌한 눈빛에 꼬타루수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우릴 안내했다.

그곳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곳. 마법 서고였다. 낯익은 책장들을 둘러보면서 제르비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에 있는 책들은 모두 훑어봤는데?”

꼬타루수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윙크를 했다. 바람을 다루는 마법사라서 저렇게 짓궂은 소년 같은 걸까.

“서고의 사서이신 유진 쿤딜리니 자매의 엄격한 감시망을 피하려면 꼼수를 좀 써야 하니까요. 대충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한 책장 앞에서 멈춰 섰다. 마법 약초를 재배하는 실용서나 만드라고라의 울음소리에 대항해 귀마개를 만드는 제작도감 등이 꽂혀 있었다.

“내 칼이 울면 천하가 잘린다.”

꼬타루수가 암호를 외우자 책장이 소리도 없이 한 바퀴 뒤집혔다. 손때 묻은 각종 소설책들이 그 안에 비치돼 있었다.

나는 꼬타루수가 방금 내뱉은 말에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

“암호를 왜…… 그런 걸로 정했어요? 상대 쪽 세계관에 더 맞는 구절 같은데.”

“그래야 암호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이 책의 주인공이 적을 쳐부술 때 내뱉는 시그니처 대사입지요.”

꼬타루수가 책 한 권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흑협전설(黑俠傳說)>

제목부터 전해지는 강한 무협소설의 기운. 역시 꼬타루수는 백발괴마에게서 독수리를 통해 소설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교환이 이뤄진 겁니까?”

“621번째 쌍마대전부터였으니까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네요. 그때 백발괴마가 저를 흠씬 두들겨 패다가…… 제 품에서 흘러나온 <흑기사 연대기 3권>을 보고 흥미를 보였지요. 그때부터 이뤄진 비밀거래랄까요?”

나는 흑협전설의 첫 권을 몇 페이지 펼쳐봤다.

고딕 폰트의 한글로 쓰여진 소설. 물론 이걸 쓴 작가가 한국인이었을 린 없다. 통역과 번역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도록 해주는 교도관의 권능일 것이다.

“이건 마녀님에게도 비밀일 텐데,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뭡니까?”

내 직감에 따르면 꼬타루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마법사들 중에 어리석은 자는 있을 수가 없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두 분은 제게 백발괴마의 책을 전달해주셨잖아요? 그렇다면 거꾸로 이쪽 책들 역시 배달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복마전 지하에 있는 귀혼서림으로.”

귀혼서림?

복마전 지하에 그런 책방이 있었던가.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라고 대꾸하려고 했는데 제르비어스가 선수를 쳤다.

“그렇게 하겠다. 우리만 믿으라구.”

나는 마왕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왜 그렇게 적극적인 거야? 내 쪽은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그 복잡한 머리에 이 책들이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

그로부터 30분 뒤 나와 제르비어스는 복마전의 지하에 있는 음침한 서고에 당도해 있었다.

물론 난 순간 이동의 권능으로 날아온 것이며, 귀혼산까지 전력질주로 달려온 장본인은 마왕이었다. 평소보다 절반 이상 단축한 기록에 난 혀를 내둘렀다.

각종 무공 비급과 심법들이 한 곳에 정리돼 있었다. 물론 우리 둘이 이것을 배워 익힌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나나 제르비어스가 마법 개론서를 읽는다고 마법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서두르자, 마왕. 백발괴마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근시라고는 했으나 그는 우리의 얼굴을 목격했다. 나를 마법사로 오해하고 있는 그를 귀혼산장 안에서 마주쳤다간 소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 뻔했다.

한편, 마왕은 꼬타루수가 알려준 대로 책장들을 가로지르더니 외워온 암호를 읊었다.

“그녀의 마법진은 성운을 담아낸다.”

그러자 아무 것도 없던 땅 밑에서 책장 하나가 올라왔다. 마법 결계가 아닌 무공 진법.

그 책장을 빠르게 훑던 제르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었구나, <흑기사 연대기>의 다음 권들이. 내 짐작이 맞았어. 백묘탑에만 서고가 있다는 게 이상했거든.”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나려고 해, 제르비어스. 이것들이 신기하긴 한데 우리가 다음 층으로 오르는 데 무슨 상관이 있단 거야?”

“중요한 지점이 있지. 아무 상관없는 두 세력이 향유하는 책인데…… 그 주인공이 누군갈 떠올리게 하거든.”

“뭐어?”

그제야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제르비어스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사들의 서고엔 남장여자인 ‘흑기사’가 제국의 흑막을 격파하는 <흑기사 연대기>가 있으며, 귀혼서림엔 흑협이 무림의 악당들을 때려잡는 <흑협전설>이 있다.

그런데 흑기사는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를 모티브로 한 것처럼 보이고, 흑협은 몇 줄만 읽어봐도 천마 류운학의 성격과 똑같다는 것이다.

“일종의 팬픽이란 건가?”

“그래. 하지만 이상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야.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지만…… 두 주인공이 성장하는 스토리라인이 무서우리만큼 흡사하다. 같은 작가가 쓴 것도 아닌데 말이지.”

“이상할 만큼 유사하다?”

“물론 주인공이 무공을 쓰는가, 마법을 쓰는가의 차이점은 있지만 골자는 같아.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엔 이상하지 않나? 나는 어느 한쪽이 표절을 한 거라고 믿는다. 여기서 몇 개의 퍼즐을 맞춰 나가다보면 양 진영의 약점을 찾아내야 하는 네놈의 공략법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두 세력이 전쟁을 거듭해온 게 무려 백이십 년이다. 전혀 교류가 없었다면 모를까 백발괴마와 꼬타루수처럼 뒤에서 책을 교환해왔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나는 마왕에게 설명했다.

“우리 세계엔 ‘토끼와 거북이’란 동화가 있어. 바다 속 용왕의 명을 받아 육지생물인 토끼의 간을 빼와야만 하는 거북이의 모험담이지.”

“뭐? 그딴 이야기가 있단 말이냐. 그 용왕이란 놈 몇 대 패주고 싶군. 명색이 왕이란 자가 지 몸뚱이 아프다고 부하에게 대리 살육을 시키다니. 군주로서 정신머리가 틀려먹었다.”

“……거기에 반응하는 거냐, 진심으로? 어쨌든 그 동화가 내가 자란 나라에만 있었던 건 아니거든.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도 비슷한 전래동화가 있다고 했어. 우연인 거지. 그것과 같은 케이스가 이 감옥 안에서 벌어진 거라면?”

마왕은 내 추측을 부인했다.

“글쎄. 그것보다 더 합리적인 설명이 있어. 그것도 어느 한쪽이 베낀 거야.”

“네가 몰라서 그래. 내가 있던 지구엔 대양이라는 게 있어서 대륙과 대륙이 서로 까마득히 멀다고. 문화적인 교류를 하기가 겁나 어려웠을 거야.”

“훗. 반대로 생각해 봐라, 용사. 단순히 멀다는 이유로 문화적인 교류를 하기 어려웠을 거라 단정 짓지 마. 오히려 문화를 퍼트리고 싶은 욕망이 아무리 먼 바다라도 목숨을 걸고 건너게 만들었을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잖아.”

“너…… 마왕 맞냐?”

“문화에 대한 갈망은 대단한 것이다.”

제르비어스는 갑자기 자신의 손 안에 든 <흑기사 연대기 15권>을 품에 안더니 선포했다.

“슈바인, 나는 어떻게든 쌍마대전으로부터 이 작가를 해방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곳은 자연히 정해졌노니 바로 천마신교다! 넌 백묘탑을 선택해야 해.”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반박했다.

“네 말대로 내가 마녀의 편에 서서 천마를 쓰러트렸다 치자. 그 과정에서 <흑협전설>의 작가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넌 그 다음 권은 영영 못 보는 거야.”

그제야 낭패를 깨달은 제르비어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허어억! 이런 제기랄. 그런 함정이! 내가 애정하는 다른 명작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왕이 너무 잘함>은 문장력의 미흡함이 아쉽지만 호쾌한 스토리라인과 예측불허의 전개가 장점이고, <색마협객 강호패도기>는 장쾌한 필치와 생생히 살아 있는 인물들의 군상극이 압도적일진대. 으으윽!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대체 어느 편에 먼저 서야한단 말인가!”

“이제야…… 내 딜레마를 너도 공감하는구나. 과정이 꽤 많이 비틀려 있지만.”

마왕이 자신의 뿔을 붙잡고 절규하는 걸 보니 웃음이 났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말 골치 아프고도 어려운 선택이다.

문화.

‘인간의 문화에 대한 갈망이라.’

그래. 지구에서 나도 그랬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상에서도 짬을 내서 만화책을 읽거나 소설을 읽었다. 이야기를 소비했다. 잠깐이나마, 내 비루한 처지를 잊고 주인공의 모험담에 나를 넣고 싶었다. 주인공의 등에 업히고 싶었어.

“어? 잠깐만.”

순간 천마와 마녀의 얼굴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끝나지 않는 싸움을 거듭하는 두 절대자. 그들의 성격을 빼다 박은 두 종류의 이야기. 연관이 없을 것 같던 요소들을 묶는 끈이 있다면?

등불이 켜지듯 한 가지 묘안이 머릿속에 자리 잡으려 했다.

“제르비어스, 일단 <흑기사 연대기>와 <흑협전설>의 줄거리를 다 알아야겠어.”

“생각을 바꿔먹은 거냐. 좋아. 내가 도와주지. 아마 빠르게 독파하면 한 권당…….”

“아니. 쌍마대전이 불과 5일 남았어. 언제 그 많은 양을 다 읽냐? 요약본으로 알맹이만 건지면 돼.”

“요약본? 두 서고 어디에서도 그런 건 보지 못했다, 용사.”

나는 인벤토리에서 단탈리온을 꺼내들었다.

“이 녀석이 해줄 거야.”

제르비어스는 소설을 요약해서 본다는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마치 영화를 10초 스킵하며 보겠다는 말을 들은 씨네필처럼 분노한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이야! 신성모독이다. 소설의 정수는 문장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데!”

“내가 만약 탈옥해서 만화카페의 소파에 누워있는 거라면 생각해볼만한 제안이야. 하지만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워.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지.”

일단 백발괴마가 돌아올지 모르므로 우리 둘은 귀혼산의 인적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단탈리온. 할 일이 생겼다.”

나는 단탈리온에게 두 소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한 요약본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 마도서는 이렇게 답했다.

- 대마도사조차 제게 그런 제안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몹시 흥미롭습니다! 대가로 용사님의 마력 절반을 가져갈 텐데 괜찮겠습니까?

“응. 괜찮아. 빠르게 부탁해.”

합쳐서 25권에 달하는 대하서사시. 단탈리온은 그 두 개의 이야기들 중에서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흑기사가 안고 있는 비극적 가문의 역사, 흑협이 절벽에서 떨어져 만난 은거기인과의 비화, 그리고 두 인물이 세계관 최강자로 우뚝 서는 영웅 서사를 순식간에 몰입해서 돌파할 수 있었다.

걸린 시간은 약 두 시간.

마왕은 원래 3박 4일은 걸쳐 정복해야 할 이야기들을 속성으로 삼켰다며 불만을 터트렸지만.

나는 얻어야 할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좋았어. 이거…… 내가 생각한 방법에 엄청난 힌트가 되겠는걸, 마왕.”

“쌍마대전에서 승리할 방법 말이냐?”

“아니.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은 여전히 모르겠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단탈리온의 표지를 탁!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쟁을 끝내버리는 건 가능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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