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폭풍 전야 (3)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내가 화룡도의 마그마 볼에서 쓰러트린 보스몹이었으나 지금은 함께 탈옥을 맹세한 첫 번째 동료.
나는 녀석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폭렬의 부름이 들린다. 으아아앗! 변시인!”
제르비어스는 열외죄수들의 구역에 있는 공터에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양 주먹을 불끈 쥔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다.
“역시 안 되나? 그럼 이건 어떠냐!”
단탈리온의 글을 보더니 30분째 저러고 있는 것이다.
곧 마왕은 자신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양 뿔을 손으로 붙잡더니 눈을 감았다.
“깨어나라, 내 안의 흑염룡이여. 마왕의 진면목을 이끌어내라앗!”
하지만 아무리 온갖 포즈에 주문을 외워 봐도 마도서가 알려준 ‘변신’에 돌입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우스꽝스러운 도전을 계속 지켜보는 건 솔직히 웃음이 나는 일이었지만 안쓰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감옥에 불려오기 전 알파 테스터로서 공략했던 게임들을 떠올려 봤다.
‘그러고 보니 최종 보스들 중 어떤 마왕은 여러 개의 페이즈(Phase)를 갖고 있었지.’
처음엔 플레이어와 동등한 수준에서 무기를 든 채 싸운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마왕을 쓰러트리거나 HP를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트리면 2페이즈로 돌입해 변신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모든 스킬과 물약을 털어내서 가까스로 쓰러트린 보스가 더 강력한 파워와 패턴으로 무장한 2페이즈로 나타나면 플레이어는 좌절하고 울부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1페이즈에서 모든 용사를 때려잡은 마왕이 있다면?’
평생 2페이즈를 꺼내들 일이 없어 자신조차 변신 능력이 있는 줄도 모르는 마왕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바로 그 녀석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힘 그만 빼 인마. 감옥 바깥에서도 안 되던 게 갑자기 지금 될 리가 없잖아.”
“아니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 방금 내 뿔이 조금 길어지지 않았냐, 용사?”
“……아니. 그대로야.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제르비어스는 몇 번 더 용을 쓰고 심지어는 물구나무까지 서더니, 결국엔 실망한 얼굴로 포기했다.
“젠장. 탈옥하게 되면 마왕군 간부놈들부터 모조리 족쳐야겠어. 자기들 대장에게 변신 능력이 있었단 걸 알려주는 놈이 한 녀석도 없었다니.”
“너무 그러지 마라. 네 부하들도 몰랐겠지. 그러게 한 번쯤 용사한테 죽기 직전까지 처맞아보지 그랬냐.”
“그러기엔 내 세계의 용사들은 너무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자못 아쉽다는 듯 마왕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용사야, 이 층에 와서 천외천을 목격한 것은 너뿐만이 아니야. 나도 천마와 마녀의 성취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정도의 강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용사 네놈도 상식을 벗어난 방법으로 계속 강해지고 있고.”
그것을 지켜만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다.
‘이 녀석, 야설을 읽으려고 계속 마법 서고에 죽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자신의 폭렬마법을 연구할 방도를 찾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일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 번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온 죄수가 ‘더 강력해지는 것’을 나는 목격하지 못했다.
그것은 삼월초원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 귀혼산장의 고수들도, 백묘탑의 마법사들도 내가 처음 마주쳤을 때의 수준에서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이 감옥은 죄수의 레벨업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 용사님의 생각이 맞습니다. 푸르가토리움은 초차원감옥으로서 죄수들의 영혼에 ‘금제(禁制)’를 가하지요. 단, 교도관장이 용사님께 취한 ‘■■’ 덕분에 오직 용사님만이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단탈리온에게 반박했다.
“하지만 제르비어스의 ‘변신’이라는 건 원래부터 타고난 능력인 거잖아. 써먹어 본 적이 없을 뿐이고, 발동시키는 방법을 모를 뿐. 언젠간 발현될 수도 있지 않겠어?”
- ‘변신’을 스킬로 보는 관점이시로군요.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지식으로는 용사님의 추측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군요. 미래의 일이니까요.
나는 그 페이지를 마왕에게 보여주며 위로했다.
“봤지? 이 마도서도 아직 모른다잖냐. 그러니까 너무 울적해하진 마라, 폭렬마왕.”
“쳇. 기연을 독식하는 용사 족속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너 자꾸 삐딱선 탈래? 비무 한 판 더해?”
그때 하늘에서 퍼드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해서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날개를 편 독수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뭐야, 저건?”
혹여 현무와 같은 영수가 또 내려온 것인가 싶어서 기감을 펼치려 할 때,
제르비어스가 손을 내저었다.
“경계하지 마라, 용사. 아는 녀석이니까.”
“어?”
머리와 꼬리의 흰 깃털을 제외하면 몸체와 날개가 우아한 흑빛을 자랑하는 독수리가 천천히 비행의 속도를 줄였다. 그러더니 마왕이 내민 팔에 다소곳이 앉았다.
암살자의 단도에 비견될만한 날카로운 발톱에도 마왕의 팔은 멀쩡했다.
“우리 꼭꼭이 왔져욤? 내가 울적해하는 기분을 읽고 날아왔져욤? 우쭈쭈.”
“……그거 독수리 아니냐?”
“응. 고향에서 보던 녀석이랑 비슷하게 생겨서. 길들였다.”
“하늘을 날던 놈을 길들였다고?”
“훌쩍 뛰어올라 찐한 눈빛을 한 번 쏴주었지.”
동물에 대한 정신지배.
그것 또한 마왕의 특수능력이었다.
“자, 여깄다. 꼭꼭 씹어 먹어라, 꼭꼭아.”
제르비어스는 망토 안에서 고깃덩어리 하나를 꺼내더니 독수리에게 물려주었다. 녀석은 그 고기를 텁 하고 깨물더니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배고프면 또 와라, 꼭꼭아.”
그러고 보니 화룡도에서 만난 헬 판테라 밍밍이도 그렇고, 이놈은 감옥 안에서 동물만 보면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용사인 내 목은 툭하면 딴다고 하면서도 말야.
“방금 걔 엄청 깨끗하던데. 누군가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뭐, 어때. 목에 방울이 달린 것도 아니고. 어제부터 내가 집사하기로 했다. 다음번엔 내 뿔에 앉아보라고 훈련시켜 봐야지.”
나와 마왕이 그렇게 시시덕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겐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허름한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이 우리 둘을 스산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지팡이로 땅을 짚고 선 채로.
슬쩍 드러난 손목에 채워진 족쇄.
죄수다.
‘하지만 보통이 아니야.’
나는 제르비어스와 방금 전까지 강도 높은 스파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전태세에 가까운 수준으로 기감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인이 이렇게 다가올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공이 반박귀진(返璞歸眞)에 이르렀거나, 고위 서클의 보유자라서 마나를 극한까지 컨트롤하고 있는 거다.
“응? 대답하지 않는 겐가? 어느 쪽 녀석인지 물어보고 있지 않나.”
마왕이 슬쩍 내 등 뒤로 물러나서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적당히 둘러대란 소리겠지.
하지만 내 쪽에서도 응답하기가 빈궁하다.
‘설마 우리의 훈련을 지켜본 건 아니겠지?’
노인은 분명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라 판단하기엔 이르다. 저 지팡이로 내공을 뽑아내 싸우는 마교도일 수도 있다.
이쪽에서 정체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용사의 심안으로…….’
다가오는 노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띠링! 소리와 함께 정보창이 떠올랐지만,
그 창의 글씨를 파악하기 직전에 노인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보법.
“늙은이가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우앗!”
무림고수가 펼치는 금나수였다. 앙상한 손가락임에도 붙잡히면 팔이 뽑혀나갈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포스 필드 제너레이트]
나는 반사적으로 중력장을 형성해 공격을 방어했다.
“호오?”
노인이 강제로 튕겨나간 손바닥을 쳐다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반면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스킬을 잘못 골랐다.’
마교도에겐 무극파천공으로 대응했어야 했는데, 출수의 속도가 워낙 빨라 마법을 쓰고야 말았다. 만약 이자가 내 정체를 알아챈다면 다음 대응을 생각해내야 한다.
그런데 노인이 느닷없이 해맑게 웃었다.
“아, 뭐야? 마법을 쓰는 처자였구만. 다행일세. 더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겠어.”
“……네?”
“그래. 안 그래도 백묘탑의 사람을 찾아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거든. 그나저나 자네 참 미소년처럼 예쁘게 생겼구만. 누가 보면 남잔 줄 알겠어. 그러고 보니 목검도 없고. 송구하네. 이 노괴가 근시가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얼굴이 안 보여.”
정보창에 뜬 이름을 읽진 못했지만 난 이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백발괴마.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마지막 귀혼오마였다.
‘나를…… 여자로 착각하고 있어?’
대충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사고의 흐름을 유추해본다.
마법을 쓴다. 그런데 그 마법이 마녀가 사용하는 중력 마법이다. 남자가 아닌 여자구나. 이렇게 사고가 흘러간 모양이다.
재빨리 목소리를 얇게 만들었다.
“호, 호호호호호. 괘, 괜찮답니다, 어르신.”
“노괴의 사과를 받아주는 겐가? 마음씨 고운 처자로군. 그러하면 염치 불고하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나.”
백발괴마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넘겨주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드는 동안 마왕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이게 뭔가요 어르신?”
“백묘탑의 7층에 가면 이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 놈이 있을 걸세. 이름은 꼬타루수라고 해. 부탁 좀 합세.”
꼬타루수.
나는 그 마법사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이름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다. 바로 단탈리온이 내게 능력을 시험해달라고 했을 때 들었던 적이 있다.
<마녀의 황금 침실 3권>의 페이지를 뜯어갔다던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아, 혹여나 서책을 손상시키거나 잃어버리지 말아줬음 좋겠네. 그럼 이 노괴가 번거롭게 다시 와서 소저의 목을 따야 되는데 보다시피 허리가 안 좋아서 먼 거리를 오가는 게 영 번거로운 처지거든. 내 공손히 부탁합세. 부디 소저의 피를 내 손에 묻히지 않도록 해주게.”
어조는 조곤조곤하나 내용은 살벌하다. 역시 마교도의 간부다웠다.
나는 목소리가 굵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 천마신교의 일원이실 텐데…… 이렇게 우리 백묘탑과 뭘 주고받으셔도 되는 건가요?”
“뭐 어때. 직접 마탑 안에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책 몇 권 주고받는 것 정도야. 그래도 대전이 일어나면 노괴를 피해 다니게나. 자칫 휘말리면 뒈질 수 있으니.”
백발괴마는 돌아서면서 또 혀를 찼다.
“백두독취(白頭禿鷲)만 갑자기 실종되지 않았더라도 내가 이 중립촌까지 올 일은 없는 건데. 니미럴. 부정 타겠어. 부정 타.”
그러자 듣고만 있던 마왕이 물었다.
“백두독취가 누굽니까?”
“이 노괴가 키우던 독수리. 내가 백묘탑까지 직접 오가진 못하니 거둬들인 녀석일세. 한데 어제부터 갑자기 돌아오질 않더구먼.”
마왕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물론 내 얼굴상태도 저것과 똑같을 것이다.
“이 노괴를 번거롭게 만들어? 언 놈이 훔쳐갔든, 잡아먹었든 걸리기만 해봐. 사생결단! 이 백발괴마의 북두유영타에 곤죽이 될 것이네. 아무튼 고맙네, 형제. 아니, 자매님.”
백발괴마의 신형이 한순간 흐릿해지더니 이윽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신묘한 보법이었다.
듣던 대로 마라혈귀에 맞먹을 만큼 고강한 자였다.
기운이 빠진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 방금 죽다 살은 거 같은데.”
“둘이 동시에 덤볐으면 이겼을 수도 있다.”
“그러면 뭐해. 정체가 들킬 수도 있는 걸! 애초에 왜 그 독수리는 훔쳐 와서 이 난리를 만드냐!”
“우리 꼭꼭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인마!”
“됐고. 이 책이 뭔지 살펴봐야겠는데. 마교가 마탑에 전달하는 물품이라. 어쩌면 맹독 같은 게 발라져 있을지도 모르는…… 얌마!”
제르비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에서 책을 뺏어갔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책을 펼친다. 생각해보니 강물에 저주를 풀어대는 마왕이니 책에 독이 묻어 있다고 해서 저 녀석에게 문제는 안 될 것 같다.
아니, 그래도 책장을 여는 순간 폭발할 수도 있는 건데.
“이 헛뿔쟁이 새끼 진짜.”
“아아아닛. 이건!”
“왜 뭔데?”
“용사야, 오늘 훈련은 여기서 중지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백묘탑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마왕의 붉은 눈동자가 번쩍하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