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55화 (55/300)

#055. 폭풍 전야 (2)

“이, 이걸 자네가 대체 어디서 구했는가?”

바둑판만한 현무의 등껍질 파편을 탁자 위에 올려놓자 만검패웅은 깜짝 놀라 눈을 비벼댔다.

“사부님의 명을 받아서 영수 수렵에 나섰습니다. 운 좋게도 현무를 때려잡으니 이걸 떨구더라고요.”

“신묘한 일이군. 우리 귀혼오마도 현무를 수십 번 사냥하는 데 성공했으나 신기루처럼 소멸돼버렸지, 이렇게 전리품을 남긴 적은 없었거늘.”

만검패웅이 고개를 갸웃하자 나는 대충 둘러댈 필요를 느꼈다. 물론 교도관장이 주는 퀘스트 때문이었다고 말하진 않았다.

“아마 귀혼오마 분들께서는 다수로 덤볐기 때문이 아닐까요? 반면 저는 혼자서 녀석을 쓰러트렸죠.”

“그러면 본인도 한 번 도전해볼까? 하지만 교주님이 아니고서야 영수와 단독 승부를 펼치는 건 무리일 텐데.”

“어쨌든 직접 보시니 어때요? 이걸로 제 검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이템의 설명란에는 분명 이것으로 무기를 제련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 한 줄이 없었다면 나도 굳이 현무를 단독 토벌하겠다고 모험을 걸진 않았을 것이다.

“어디 한 번 볼까.”

만검패웅이 망치와 정을 들어 현무의 등껍질을 두드려보았다.

까앙! 파지직.

망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정이 두 동강나고 말았다. 반면 현무의 등껍질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고.

“아쉽군. 본인이 가진 도구들로는 이 물질을 만질 수 없겠어. 이 층에서 얻을 수 있는 광물로 조각하기엔 터무니없이 강도가 약해.”

이런.

이건 생각지 못했던 난감한 상황이었다. 소재 아이템만 던져주고 그걸 제련할 도구는 왜 같이 안 준 거냐고.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선배님.”

나는 대장간을 슬쩍 빠져나와 인벤토리에서 단탈리온을 꺼냈다. 그리고 상황을 대충 설명한 뒤 방법을 물었다.

“현무의 등껍질을 검으로 만들 방법이 없겠어?”

- 광물을 제련하려면 그 광물보다 경도가 뛰어난 도구가 있어야만 하지요. 그런데 용사님은 이미 그걸 갖고 계시지 않나요?

“내가 이미 갖고 있다고?”

황급히 인벤토리를 주르륵 둘러보았다. 그러자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물건이 구석에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이름: 채굴용 곡괭이]

화룡도의 채굴장에서 노역용으로 나눠주었던 곡괭이. 독방인 절망의 탑 내부를 파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곡괭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 하스록이 이 물건으로 폭탄을 분해해서 재조립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광물을 부숴야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 그만큼 단단하지 않을까?

다시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곡괭이를 만검패웅에게 건네주었다. 곡괭이는 놀랍게도 현무의 등껍질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경도가 영수의 신체보다 더 뛰어나다는 반증이었다.

“오오오! 이건 또 어디서 난 건가? 일공자가 본인의 숙원을 해결해주었군. 만검의 이름을 걸고 굉장한 명검을 만들어보겠네!”

“아래층에서 우연히 주운 겁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크하하하! 딱 사흘만 주게. 잠도 안 자고 쇠질을 하겠어. 그럼 본인은 작업에 열중해야 하니 자리 좀 비켜주겠나.”

만검패웅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근육이 울끈불끈 올라왔다. 아무래도 나, 대장장이들에게 사랑받는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했나 봐.

[2층의 교도관이 타층 교도관의 권능이 행사된 물건에 불쾌감을 표합니다.]

대장간을 빠져나오자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이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곡괭이를 강제로 회수하거나 하지는 못하는 걸 보니 다른 층의 교도관이 만들어낸 물건을 없애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너무 짜증내진 말아달라고, 교도관. 내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으면 애초에 영수를 만들어내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2층의 교도관이 영수 소환은 자기도 달갑지 않은 현상이라 덧붙입니다. 자신은 오직 죄수와 죄수가 서로 무력을 겨루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고 말합니다.]

“어? 네가 영수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어?”

[2층의 교도관이 더 이상의 답변을 거부합니다.]

왠지 눈엔 보이지 않지만 토라진 교도관이 등을 돌리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기분 탓이겠지? 전달되는 메시지에 왠지 짜증이 묻어있는 느낌인데.

나는 다시 단탈리온을 꺼내들었다.

“단탈리온. 영수는 왜 만들어지는 거야?”

- 용사님이 지금까지 조우하신 두 마리의 영수는 본체가 아닙니다. 그들의 본체는 훨씬 위층인 7층 ‘■■■ ■■’에 머무르고 있지요.

“똑바로 안 해? 방금 쓴 글자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어.”

- 교도관장이 해당 정보의 열람 권한을 제한하고 있나 봅니다. 용사님께서 아직 7층에 오를 자격을 얻지 못하셨으니까요. 오오오! 신기하군요. 이런 식으로 교도관장과 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니! 역시 용사님을 선택한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

단탈리온이 흥분한 게 느껴져서 그냥 페이지를 한 장 넘겨버렸다. 사람으로 치면 강제로 입을 틀어막은 거나 다름없다.

“시끄럽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나는 현무라는 영수만 마주친 걸로 기억하는데, 왜 영수 두 마리라고 한 거야?”

- 용사님이 1층 화룡도에서 마주치신 마그마 엘리게이터 역시 해당 층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아닙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죠. 어떤 대상을 빛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나요? 현무나 마그마 엘리게이터는 7층에 있는 존재로부터 파생된 ‘그림자’ 같은 개념입니다. 본체가 아니므로 한 번 죽여도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본체가 지닌 힘보다 훨씬 약하게 만들어집니다.

마그마 엘리게이터는 제르비어스의 손에, 그리고 현무는 내 손에 격파됐다. 7층에 있을 녀석들의 본체는 그보다 훨씬 강하다는 이야기.

“왜 그런 일이 생기는데? 누가 아래층에 괴물들을 일부러 풀어놓기라도 하는 건가.”

-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용사님이 대가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군. 알았어.”

나는 미련 없이 단탈리온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녀석이 알려준 2개의 정보 때문에 MP 800이 날아갔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7층이라.

그림자만으로도 끔찍할 만큼 강했던 괴수들의 본체가 우글대는 곳.

이제 겨우 한 층을 올라온 내 입장에서는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숫자다. 만약 그날이 온다면 층을 오를 때마다 곱절이 되는 내 형량은…… 무려 6,400년.

하지만 등반죄수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각오한 바다.

깡. 깡. 까앙.

등 뒤에서 만검패웅이 곡괭이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강해져서 언젠가는 올라주마. 기다려. 또 한 번 등껍질을 벗겨줄 테니까.”

*

그렇게 또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나는 푸르가토리움의 대기실을 갓 빠져나왔을 때와 비교해선 압도적으로 강해진 상태였다.

훌륭한 두 스승이 있는데다가,

매일 밤 상대해주는 스파링 파트너도 있기 때문에.

[용사의 근력이 1 올랐습니다.]

“훌륭하다, 제자여. 초식은 단단하며 기세는 패도를 넘보나니. 그야말로 강력하구나! 싸우면서 일 초(招)마다 실력이 느는 유형이렷다.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마룡맹장타!”

매번 천마와 생사결 수준의 대련을 치렀고,

[용사의 민첩이 1 올랐습니다.]

“역시! 널 귀재라 평가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다음번엔 나 혼자가 아니야. 록시탄이 내 중력 마법에 빙결 마법의 속성을 섞어줄 것이다. 절대 영도의 중력장. 어디 이것도 피해보렴.”

매일 마녀와 마법의 진의를 파고들었으며,

[용사의 마법 이해도가 올랐습니다.]

“이런, 양아치 용사! 마법 다음에 바로 마공을 쏘는 게 어딨냐, 치사하게!”

“치사하다니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내가 이 고생을 왜 하는데. 마법과 마공을 숨 쉬듯이 쓰고! 궁극적으론 두 개를 융합하려고 하는 거라고. 다음엔 축공탄이다!”

그 성과를 마왕 제르비어스를 통해 복습했다.

[무극참월공이 Lv. 2로 올랐습니다.]

오전에는 마법 수련.

오후에는 마공 대련.

밤에는 마왕과 비무.

물론 그 과정이 게임처럼 간단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스킬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카드배틀 하듯 마음먹은 대로 쏘아지는 게 아니다. 내 육체를 컨트롤하는 것은 결국 직접 하는 것이다.

운동계에서는 핸드-아이 코디네이션(Hand-Eye Coordin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누구나 배트를 휘두르는 법을 알지만 정밀한 컨트롤과 타이밍을 모른다면 홈런볼을 날릴 수 없는 원리와 같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

앞과 뒤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공을 한 번의 스윙으로 둘 다 맞춰야 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해내야 돼.”

강해져야 한다.

계속 레벨업을 해야 한다.

1층에서의 레벨업은 강해지겠다는 일념만으로 덤벼들었으나,

2층에서는 각오가 달랐다. 최대한 나의 레벨을 높여놓는 것이 곧 나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주에 들어섰을 때,

나는 결국 벽에 부딪혔다는 걸 인정했다.

[MP: 9,999]

마녀와 천마가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융합 스킬인 무극참월공을 퍼부어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틈틈이 저주로 나를 달궜다.

그렇게 해서 결국 마력 수치를 체력 수치와 마찬가지로 한계점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MP의 수치만큼은 두 스승의 수준과 동일해진 거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내 공격을 전부 받아내느라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로 제르비어스가 다가왔다.

“사전 동작도 없이 오의를 마구 뿌릴 수 있는데도,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공격의 출력이 전부가 아니잖아. 제 아무리 무거운 망치를 휘두를 수 있더라도 맞춰야 의미가 있지. 공방의 묘리에선 천마의 수준엔 미치지 못하고, 전장을 장악하는 마녀의 전략에도 당하지 못할 거야.”

다만 시간이,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 알짜배기 수련을 10년, 아니 5년만 더 지속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 텐데.

[용사는 아직 진영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세 개의 달이 떠오르기 전에 진영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느 쪽 진영에도 설 수 없음을 알려드려요.]

하지만 삼월초원은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제르비어스가 물었다.

“용사, 아직도 못 정한 거야? 이제 겨우 5일 남았어. 또 다른 널 복제하지 못할 거라면 이제 마음을 정해야지.”

“방금도 교도관장이 재촉했다고. 너까지 닦달하지 말아줄래?”

“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다.”

“어?”

마왕이 손가락 두 개를 펴들었다.

“쌍마대전의 순간 네가 한 진영의 선봉으로 나선다고 치자. 반대쪽의 수장이 너를 발견하면 그 즉시 분개하겠지.”

“음. 그리고?”

“그러면 네가 파천황의 기연으로 얻은 ‘친구’의 권능이 제대로 작동하겠나? 당연히 한쪽으로부턴 절교를 당하지 않겠어? 즉, 스킬을 빌려올 수 없게 되겠지.”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친구를 파악해서…….”

그런데 마왕은 여기서 손가락 한 개를 더 추가했다.

“넌 지금 양자택일만 생각하나 본데, 정확히는 힘이 3분의 1로 줄어들 수도 있다. 네가 만들어낸 무극참월공은 천마와 마녀의 스킬을 빌려와서 합친 거잖아. 그중 하나를 잃게 되면…… 무극참월공을 쓰지 못할 수도 있어.”

어어어?

그건 생각해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내가 벙찐 표정을 짓자 제르비어스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급히 단탈리온을 꺼내들었다.

“어때? 제르비어스가 방금 한 말이 맞아?”

- 원래는 그 질문에 용사님께서 걸맞은 마력을 보유하지 않고 계시지만, 이번은 특별 할인가로 답해드리겠습니다.

“특별 할인가?”

- 교도관장이 용사님께 이 답변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경고의 의미겠지요.

경고의 의미라.

벌써 대답이 짐작되잖아.

- 융합 스킬도 결국엔 두 개의 스킬을 갖고 있어야만 발휘되는 법. 한쪽으로부터 절교당하면 용사님께선 결국 무극참월공을 봉인당할 겁니다. 아이고, 이건 저도 안타깝네요.

봉인이라.

하마터면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그르칠 뻔했다. 무극참월공으로 천마나 마녀를 상대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전략을 짤 때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정보였다.

그때, 단탈리온이 글씨를 만들어내는 걸 신기하듯 쳐다보던 마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내 패도적인 공격을 연달아 받아내고서도 멀쩡하게 서 있다.

내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정보는 아군 쪽에도 있었던 것이다.

“단탈리온, 하나 더 물을게. 제르비어스 폰타인. 이 폭렬마왕과 내가 전력으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느 쪽이 더 강하지?”

그러자 마왕 또한 솔깃한 질문인지 마도서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 그건 저도 모릅니다. 용사님의 마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에테르 스트림에서 제가 수집하지 못한 정보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신묘한 마도서가 연이어 또박또박 글씨를 만들어냈다.

- 제르비어스 폰타인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해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변신’도 달성해 본 적이 없지요. 정확한 답변을 위해선 그 변신 상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변시이이인?”

방금 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동공이 크게 뜨여진 폭렬마왕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낸 소리였다.

“나, 변신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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