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무극과 참월 (8)
마법과 무공의 융합.
물론 불세출의 무공 천재가 마법의 극의를 엿보고 통달한다면 가능할 경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류의 천재가 아니었다. 내가 스킬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은 파천황의 권능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체득의 과정을 건너뛸 수 있어. 네 폭렬마법을 빌려 쓴 것처럼 스킬을 빌려 쓰는 것이니까. 그러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화룡도에서 르팔타커스의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을 항상 가동시킨 채 올쿠레 어르신의 스킬 ‘천년명마의 질주’를 써본 적 있다. 그 둘은 같은 액티브 스킬이었고 아무런 위화감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나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두 명의 가정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내가 상대편에게도 과외를 받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두 분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어. 마공과 마법, 둘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마녀 일레인은 일언지하에 부정했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해. 생각해 보거라, 제자야. 껍질을 까보니 반쪽은 사과이고 반쪽은 귤인 과실을 보았느냐. 그 천마 놈의 세계에 있는 단전과 마법사들의 마력 회로는 본질부터 달라. 저 귀혼산에 터를 잡고 있는 녀석들 중엔 빙백신권이라고 얼음의 기운을 뿌려대는 놈이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록시탄 자매의 빙결 마법과 닮은꼴이라고 착각할 수 있어. 하지만 현상이 비슷하다 한들 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완전히 다르단다. 그래, 마검사(魔劍士)라는 부류가 있지. 하지만 그들은 엄밀히 말해 지팡이가 아닌 검으로 마법을 펼쳐내는 것뿐이다. 넓은 범위에서 마법사라고 봐야 해. 결국 우리 분야인 거지. 하나 마법과 무공은 달라. 한쪽을 개발시키는 순간 다른 쪽은 영원히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란다.’
천마 류운학도 비슷한 말을 했다.
‘흥미로운 질문이긴 하다, 아해야. 의식을 둘로 양분해 성질이 다른 초식을 동시에 사용하는 무당파의 양의신공(兩儀神功)이라면 얼추 비슷한 흉내를 낼 순 있겠지. 허나 양의신공 역시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중원무학이라는 거대한 테두리 안에서 두 종류의 초식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뿐. 아예 무의 이치를 거스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마공과 마법을 한 몸에 사용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본좌의 평생에 걸친 무의 길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본좌는 두 개의 단전을 갖고 태어난 이형지체도 보았으나 그런 괴이한 체질이라 하더라도 한쪽 단전을 마력 회로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비슷해보여도 파헤쳐보면 극단적으로 먼 곳에 있는 것이 저 할망구의 마법과 이 본좌의 마공이렷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마녀와 천마가 왜 상대편의 수업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건지.
둘의 강한 호승심과 본인의 전공이 더 낫다는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두 개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리 없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분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지금부터 그걸 입증해 볼 거야.”
이미 사고 실험은 다 끝마쳤다.
남은 것은 직접 해보는 것뿐이다.
“좋아. 이쯤에서 던지면 되냐?”
제르비어스가 직육면체로 잘라낸 암석을 양손에 든 채 물었다. 날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왕은 스로인을 하는 축구선수처럼 암석을 내던졌다.
동그란 궤적을 그리며 나에게 다가오는 암석을 노려보며,
나는 스킬을 시전했다.
[친구 류운학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호심멸룡탄(虎心滅龍彈)]
무극파천공의 범용 원거리 공격인 호심멸룡탄을 왼손에 띄웠다. 하지만 아직 손바닥 위에 붙잡아 두고 발출하지 않은 채 또 다른 스킬을 빌려왔다.
[친구 일레인 쿠디슈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그래비티 잽(Gravity Zap)]
비어 있는 한손으로 마법진을 그린 뒤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좌표 지정이다. 중력탄을 생성시키는 지점은 다름 아닌 호심멸룡탄의 핵이 있는 중앙.
손톱 하나 정도만 차이가 나도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괜찮다. 이 층에 올라와서 단 한순간이라도 목숨이 아까워서 몸을 사렸다면 등반죄수가 되지도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술식 전개를 마쳤다.
‘죽어도 해낸다!’
그러자,
지이이이이이잉!
호심멸룡탄이 순간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맹렬하게 가속회전을 했다. 그래비티 잽과 거칠게 융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아직 아니다. 더 응축시킨 후 폭발시켜야 한다. 그러면 중력파와 기공탄의 파괴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곱절의 효과를 낼 것이다.
내 감각이 포착한 적시에 마공과 마법이 섞인 정체불명의 구를 내쏘았다.
그것이 날아들고 있던 암석과 충돌했다.
꾸아아아아아아앙!
순간, 제르비어스와 나는 서로 반대편으로 튕겨나갔다.
하지만 오래 누워있을 순 없었다. 무모한 시도가 성공했다는 쾌감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됐어! 됐다고!”
띠링!
[용사가 마공과 마법을 융합해 새로운 스킬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삼월초원이 만들어진 이래 최초의 순간이네요.]
[그래서 이 스킬엔 아직 분류된 이름이 없습니다. 용사여, 이름을 입력해 주십시오.]
작명 센스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만,
떠오르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두 스승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하나로 묶었으니 이름도 그 두 분에게서 하나씩 따 와야 하지 않겠나.
“무극참월공(武極斬月功). 그걸 방금 만든 스킬의 이름으로 하겠어.”
*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일식 축공탄(縮空彈)]
그것이 이 감옥에 들어와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스킬이었다. 언제나 친구의 스킬을 빌려오기만 했던 내 입장에서 그것은 무척 소중한 한 걸음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축공탄은 호심멸룡탄과 그래비티 잽의 혼합기. 각각 100의 MP를 소모시키는 두 개의 기술을 합친 것이다.
그런데 축공탄을 시전하면 순간 무려 300의 MP가 날아가버리는 것을 확인했다.
파괴력이 곱절로 올라가지만 대가 역시 그만큼 무거워지는 것. 아직은 실전에서 광범위하게 시전할 정도의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숙련도를 올린다면 MP 소모를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천마와 마녀에게 무극참월공을 써먹어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날 적대하게 됐을 때 살아남으려는 수단으로 만든 돌파구였기 때문에.
다행히도 내 욕구불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성취를 시험해볼만한 막강한 적수를 결국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사부님, 뭘 잡아오라고요?”
쌍마대전을 일주일 앞둔 날의 정오.
평소보다 거칠게 제자를 몰아치던 천마 류운학이 갑자기 일권을 멈추더니 내게 말했다.
느닷없이 영수(靈獸)를 잡아올 시기가 되었다는 것.
“제자야, 본좌가 어이하여 이 귀혼산에 터전을 잡았는지 아느냐?”
“흐음. 그야 백묘탑과 가장 먼 곳이라서 아닌가요?”
“그것도 일리는 있구나. 허나 정답은 아니니라. 본래 이곳은 삼월초원에서도 양기가 최대치로 모이는 산맥이었다. 그래서 신묘한 재주를 부리는 짐승들이 터를 잡고 있었노라. 요재지이에 나올 법한 귀물들 말이다.”
천마는 그런 영수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뒤 귀혼산장을 지었다.
하지만 쌍마대전이 임박하는 때가 되면 흩어져 있던 양기가 하나로 합쳐져 고강한 영수를 소환시킨다는 이야기였다.
‘게임으로 치면 리스폰 스팟(Respawn Spot) 같은 거군.’
천마는 영수를 사냥하는 수렵단에 나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얼마 전 마녀가 쳐들어왔던 사건 때문에 결코 상대 쪽에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연공장에 다른 교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좋은 경험이 될 터이니 실전에서 많이 배우고 오거라.”
“존명.”
일종의 야외수업을 위해서 나는 복마전을 빠져나와 연공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천마의 말대로 낯익은 두 교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나는 조금 놀라야만 했다.
“두 분이 수렵단이라고요? 이 정도면 과잉 배치 아닌가요?”
두 교도의 정체는 마라혈귀와 폭암도인이었다. 귀혼오마의 서열 1위와 3위. 그제야 나는 출몰한다는 영수가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라혈귀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형님이 너를 보내셨다고? 쌍마대전을 앞두고 제자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시려나 본데.”
폭암도인이 눈두덩을 긁적였다.
“수인거 소협과 함께 해야 한다면 평소보다 본인의 용력을 더 발휘해야 하겠군. 소협을 지키면서 싸워야 할 터이니.”
“그건 불초 후배가 듣기에 유쾌하지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도 교주님께 무극천마신공을 사사받고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어요.”
“하나 자칫 잘못하면…….”
“껄껄껄껄! 그렇다는군, 폭암도인. 귀검신녀는 마녀에게 발린 것이 분한지 폐관에 들어갔고, 만검패웅은 이 녀석에게 만들어줄 검을 제작하느라 바쁠 테니 형님께서 대타를 보내주신 것 같구먼.”
그렇게 말한 마라혈귀는 목제 도끼를 어깨에 걸친 뒤 앞장섰다.
방만한 태도 때문에 현혹되기 쉽지만 그는 명실상부 마교의 이인자. 폭암도인은 뭐라 꺼내려던 말을 집어넣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세 수렵단은 귀혼산장의 서쪽에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산으로 향했다.
두 간부를 따라가면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선배님들. 귀혼오마가 총 다섯 분이실텐데 저는 지금껏 신녀님과 패웅님을 포함해 네 분밖에 뵙질 못했습니다. 특별한 연유가 있는 건가요?”
마라혈귀가 도끼로 수풀을 베어내면서 답했다.
“백발괴마(白髮怪魔)란 녀석이 있지. 하지만 평소엔 어디 처박혀 있는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아.”
폭암도인도 콧김을 내뿜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녀가 침입해 들어왔을 때조차 손을 보태지 않더군. 본인보다 서열이 높지만 않았더라면 진작 귀혼오마에서 제외하자고 항변했을 터. 그렇지 않소, 마라혈귀?”
“워낙 게으른 놈이니까. 그래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야. 서열전을 치렀을 때 나도 괴마한테 질 뻔했거든. 종이 한 장 차이였지. 쌍마대전에서 마법사들 때려잡을 때는 볼 수 있을 거다.”
백발괴마.
내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천마신교 간부의 이름이었다.
귀혼오마의 두 번째 강자이자 마교 서열 3위.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깊숙한 계곡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울창한 침엽수림이 수렵대를 반겼다.
폭암도인이 내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
“여기다, 일공자. 저 안에 들어서면 영수들의 구역이지.”
양기가 모인다는 천마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스산해야 할 숲 속에서 은은한 열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껄렁대던 태도를 버리고 진지해진 마라혈귀가 손가락을 꼽으며 뭔가를 계산했다.
“이번엔 어떤 녀석이 나올 차례지, 폭암?”
“저번 사냥 땐 백호(白虎)가 튀어나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번엔 현무(玄武)겠군. 꼬리가 워낙 잽싸서 까다로운 녀석인데 말이야. 신녀가 빠졌으니 좀 오래 걸리겠어.”
사방신의 그 주작과 백호인가?
내가 그것을 물으려할 때 수림 안쪽에서 날카로운 괴성이 울려 퍼졌다.
끼우우우우우우우!
단순한 짐승의 포효가 아니었다.
침엽수는 본래 바늘모양의 잎들을 갖고 있어 가지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튼튼한 나뭇잎들이 저 포효에 실린 기운 때문에 파스스스 떨어지고 있었다.
괜히 영수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포효에 내공을 실어 쏘아 보낼 정도라니.
띠링!
[연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연계 퀘스트 #5-1. ‘현무 사냥’]
[이것은 돌발 퀘스트 ‘마교 서열전’에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입니다. 용사는 천마신교의 서열전에서 30위 안에 들어 능력을 인정받았군요. 그래서 위험한 수렵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사방신의 하나인 현무를 쓰러트린다면 용사는 아다만티움에 비견될 만큼 단단한 이 영수의 등껍질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기한: 5시간]
[보상: 현무의 등껍질 파편. (무기로 제련 가능)]
뭣이?!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등껍질이라고?
강렬한 물욕이 내 눈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얼마나 길었는가.
1층 화룡도에서 곡괭이에 폭약 가루를 뿌려 가까스로 코볼트들을 때려잡았던 내가,
SS급 성검 아론다이트나 S급 마검 디아볼릭을 들어 올리지도 못해 인벤토리에 쑤셔박고 다니던 내가,
드디어 제대로 된 무기를 얻을 기회를 잡았다.
“선배님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나는 애절한 목소리로 두 마교도에게 간청했다.
“저 현무란 놈…… 저 혼자서 잡도록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