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무극과 참월 (7)
“그걸 확인하러 왔어. 당신이 요즘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교도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방금 뭔가가 철퍼덕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아하. 내 심장이 발 아래로 툭 떨어지는 소리였군.
미칠 듯이 쿵쾅거리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천마의 얼굴에선 어떤 미동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명경지수. 파문을 허용하지 않는 깊은 호수와도 같은 평정심이었다.
“흐음. 본좌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걸.”
“제법 능구렁이 같은 면모를 보이는구나, 천마. 하지만 그렇게 시치미 떼면 금방 민망해지지 않겠어? 당신은 표정을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뒤에 잔뜩 몰려온 부하들의 얼굴은 딱 걸렸단 표정이잖아.”
마녀의 말은 옳았다. 천마의 부동심과는 별개로 교도들은 확연히 동요하고 있었다. 저들끼리 웅성거리다가 마녀의 눈썰미에 다 들통나버린 것이다.
결국 천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할망구 네 말이 맞다 치자.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한 번 데려와 보지 않으련? 삼월초원 최악의 개새끼가 밑에 작은 개새끼를 거둬들였다기에 면상이 궁금해서 말이야.”
공격적인 어투에 만검패웅이 발끈했다.
“감히 교주님에게 그런 모욕을! 실언을 사과하시오, 마녀!”
그러나 천마는 여전히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오른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끼어들지 말란 뜻.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나, 마녀. 허튼 수작은 안 통해. 본좌가 적전제자를 둔 것은…… 그래, 이 감옥에서 처음 있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내가 절대 제자를 안 두겠다는 의미라기보단 이 마교본산 밑에 기어 다니는 무지렁이들은 어차피 모두 내 아우였기 때문이야. 특별한 일이긴 하나 특이한 사건은 아니라는 거지.”
허허롭게 턱을 쓸어내리던 천마. 그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운 창이 되어 마녀를 꿰뚫으려는 듯 내쏘아졌다.
“그러니 할망구 네가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본교의 아우들과 얽히는 걸 그리 싫어하면서도 손수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네 형제자매들이 다칠까 싶어서 실력에 절대적으로 자신 있는 혼자의 몸으로 왔다는 것은…… 마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네만.”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마녀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팽팽하던 기세 싸움에서 그녀는 방금 주도권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교도관과의 대화라면 나도 몇 번 나눠본 적 있지. 그놈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진 절대 우리에게 간섭하지 않는 존재야. 한데 이쪽의 수장인 본좌는 쏙 빼고 당신에게만 뭔가를 일러준다? 말이 안 돼. 그러니 이런 추리가 가능하지. 당신이 먼저 교도관에게 뭔가를 물어본 거야.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교도관은 내가 제자를 키운다는 정보를 흘린 것이고.”
과연. 그랬던 거라면 더 납득되는 상황이다.
확인사살하듯 천마가 내뱉었다.
“할망구 너야말로…… 요즘 제자라도 키우는 거 아닌가?”
“윽. 뭐라는 거야! 어쨌든 그 녀석, 얼굴이나 보여달라니깐!”
상대의 정곡을 찔러버렸다고 생각했는지 천마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상대가 원하는 걸 넙죽 해주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지. 이걸 어쩌지? 당신이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난 절대 내 제자를 보여주고 싶지 않구만!”
나는 대장간의 문짝 뒤에 철썩 달라붙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마녀가 그대로 백묘탑으로 돌아가주는 것도 바라볼 수 있겠는데?
하지만 마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정하지! 나도 제자를 키우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래서 쭈그렁탱이 네놈의 제자 얼굴도 한 번 보려고 했던 거야. 천마신교와 투닥거린 지 123년. 칼잡이라면 이제 슥 보기만 해도 경지를 알 수 있으니까. 그 제자란 놈팽이가 어느 정도일지.”
“허허허. 아직 가르쳐야 할 것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주먹 좀 쓴다 할 수 있지. 천마의 적전제자로서 어디 내놓기 창피할 정돈 아니로다.”
“그런데 왜 못 보여주니. 겁나? 쫄려? 뭐, 정 그렇게 보여주기 싫으면 그냥 갈게. 여인이 홀몸으로 적의 본진 깊숙이 와줬음에도 사내놈들이 이리 간덩이가 작아서야.”
마녀가 지팡이를 들어 천마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에레이. 그거 떼 버려라, 떼 버려.”
귀혼산장 일대에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아이고, 스승님!’
무극 천마는 극마지경을 달성한 무림의 절대고수. 그런 분께 유치원 놀이터의 꼬마들이나 할 법한 도발이 먹힐 리가 없잖습니까!
“이익. 망할 할망구가 정녕…….”
먹힌다?!
저런 저급한 술수에 제대로 걸려들었어?
천마 류운학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타올랐다.
“뭣들 하느냐! 지금 당장 본교의 일공자를 찾아서 데려오너라!”
나는 천마가 ‘뭣들’을 입에서 내뱉는 순간 몸을 납작 엎드려 숨었다.
큰일 났다. 이건 전혀 대비해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때, 누군가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공자, 교주님이 찾고 계시질 않소? 어서 나가보시오.”
나찰대의 각화도객. 마교 서열전 당시 풍뢰군과 함께 시비를 걸어온 무사였다. 물론 내게 무릎 꿇은 다음부턴 저렇게 깍듯하게 말투가 바뀌었다만…… 아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차라리 모른 척 좀 해주라!
‘이대로 나가면 스승님이 날 알아보고 기겁하실 텐데.’
그리고 천마 또한 어째서 자신의 제자를 보고 당신이 놀라느냐며 연유를 캐물을 터.
그야말로 파국이다. 두 초월자가 날 도륙해서 서로 그 시체를 가져가려고 아우성칠 것이 분명하다.
도망쳐야 하나.
스으으으으읏.
잔뜩 긴장해 있던 내 기감이 섬짓한 파동을 포착했다. 천마 류운학이 나를 찾기 위해 오감을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극마지경에 오른 그의 탐지력은 천리안이나 다름없다. 내가 아무리 빨리 튄다 한들 걸리고 말 거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몇 개의 잔꾀가 떠올랐다.
‘일단 나가서 부딪힌다.’
*
“사부님,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있는 힘껏 어깨를 쫙 펼치며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 천마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있다가 내 목소리에 환히 웃으며 맞아 주었다.
“크하하하! 제자야, 이리 와 보거라. 여기 이 할망구에게 너를 보여줄…… 으잉?”
천마 류운학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제자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몰골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자야, 헌앙했던 얼굴이 왜…… 떡이 됐느냐?”
나는 지금 목 위가 퉁퉁 부은 얼굴로 천마와 마녀 앞에 서 있었다. 국화 모양의 종기가 안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지라 용사의 수려한 이목구비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각화도객 옆에 있다가 이리 되었습니다.”
시선이 닿는 적수의 신체 부위에 종기를 불러일으키는 마공.
나는 각화도객의 멱살을 붙잡아 당장 내게 마공을 걸어달라고 협박했다. 이 기술을 미리 당해보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 이런 잔꾀를 발휘하진 못했을 거다.
“킥킥킥. 아주 못생겼구나, 정말.”
마녀는 체통도 없이 목젖을 드러내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다행히 본인의 제자를 전혀 못 알아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야 했으나, 묘하게도 원망스러움이 동시에 들었다.
“흐으음. 게다가 힘의 크기도 내 제자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지 못하는군.”
내 비장의 한 수는 각화도객의 마공에 스스로 걸리는 것뿐이 아니었다. 인벤토리에 있던 액세서리가 내 정체를 숨겨주는 데 공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 야만전사의 허리띠]
[착용자의 마법 방어력이 2배로 늘어납니다.]
[대신 MP의 최대치가 1/2로 줄어듭니다.]
마녀의 통찰력은 결코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저주에서 뒹굴어 MP를 극단적으로 키워왔을 때 한눈에 변화를 알아챈 장본인. 그녀를 속이기 위해선 이중의 눈속임이 필요했다.
휴우. 어쨌든 고비는 넘긴 듯하다.
“흥. 당신에게 제자가 생겼다 해서 내 제자와 싸움 붙이면 어떨까 궁금해했더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어. 외모도, 실력도 내 제자의 압승이야.”
마녀의 말에 천마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할망구가 키우는 제자가 어떤 녀석이든 내 제자가 질 리 없다. 무조건 이긴다! 안 그러냐, 제자야!”
“아, 그, 그러믄요. 저 마녀 할망구의 제자 따위에게 지진 않습니다.”
내가 나랑 어떻게 싸우라고, 미친 인간아.
다행히 종기로 얼굴이 퉁퉁 부어 내 당혹스러움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천마는 내 어깨에 손을 턱 걸치며 당당히 선포했다.
“똑똑히 듣거라, 마녀! 다음 번 쌍마대전 때 네 제자를 꼭 선봉으로 내세워라. 본좌의 모든 걸 전수한 이 아이가 그 녀석을 무극파천공으로 짓눌러버릴 테니까!”
“애써 키운 제자가 중력 마법에 척추가 접혀서 돌아가면 당신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네? 그 도전 받아들이지.”
“누구 맘대로 도전이냐! 할망구의 제자가 내 제자에게 도전하는 거다앗!”
“하여간 사내들의 허세란 밟아주는 재미가 있어. 세 개의 보름달이 뜨는 날이 기대되는군.”
마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휘익 돌아섰다. 잔뜩 긴장한 교도들이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천마의 손짓 한 번에 길을 터주어야 했다.
“막지 마라! 저 할망구가 탑으로 돌아가서 곧 뒈져버릴 제자랑 마법진 그리기 놀이나 실컷 하도록.”
천마는 평정심이고 뭐고 내던지고 마녀가 귀혼산장의 정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씩씩거렸다.
그제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상대가 키우는 제자의 수준을 보려고 여기까지 오다니. 그리고 이렇게까지 서로 으르렁대다니. 999번 싸우는 동안 쌓여온 증오의 두께가 여실히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천마 류운학의 눈이 이글거렸다.
“제자야, 앞으로 수련 강도를 두 배로 올리겠다. 본좌만 믿거라. 저 마녀의 제자 따위 한 칼에 목을 따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마.”
“조, 존명.”
이제 남은 건 한 가지뿐이다.
쌍마대전의 그날이 오면, 난 두 절대자를 동시에 속인 죗값을 치러야만 할 것이다.
*
“용사, 네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로군. 천마와 마녀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니.”
그날 자정.
나는 삼월초원의 중앙으로 제르비어스를 불러냈다. 기둥을 둘러싸고 초토화되었던 지역에 어느덧 풀들이 꽤 많이 자라나 있었다.
“그래, 내 꾀에 내가 걸린 셈이지 뭐.”
“두 개의 메인 디쉬만 먹겠다더니, 체할 것 같다는 거냐?”
“아직 그 정돈 아니야. 접시를 다 비우지도 못한 상황이고.”
“너는 화룡도 최약체들만 모인 7번 방의 죄수들을 데리고 마그마 볼의 시련을 통과했었지. 이번에도 묘안이 있나?”
“궁리 중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야지. 그걸 위해서 네 도움이 필요하고.”
“좋다. 나 역시 너와 운명공동체. 할 수 있는 한 힘을 보태겠어.”
나는 그렇게 위풍당당한 제르비어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녀석의 피부색은 회색과 보라색의 중간이라 처음엔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눈 밑이 시커멓게 어두워진 것이 보인 것이다.
“근데 마왕, 너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냐?”
“으, 응? 별 거 아니다. 이 몸 역시 쌍마대전을 승리로 이끌 묘안을 생각하는 데 골몰하느라…….”
내 눈썹이 자연스레 미간을 향해 모였다.
요즘도 백묘탑의 마법 서고에 긴 시간 처박혀 있는 모양인데.
“이 새끼, 야설 좀 적당히 읽어!”
“……눈치 빠른 녀석. 넌 가끔 소름 돋을 때가 있다.”
“내가 소름이 돋으면 너는 소름이 끼친다, 이 호색마왕아.”
“호색이라니! 언젠가 마녀들의 문화생활을 탐독한 내 지식과 통찰이 작전에 도움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다.”
“어휴. 말을 말자.”
그래도 제르비어스가 없었다면 난 애초에 저주를 통한 MP 스탯업이란 발상도 못해냈겠지. 그러니 구박은 적당히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용사.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뭐냐.”
나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설명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마녀와 천마, 두 분 밑에서 각기 따로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본 적 있어? 왜 둘은 내가 상대 쪽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발상 자체를 못하고 있을까.”
“흐음. 한 분야에서 세계 제일에 오른 자들은 그 자부심 때문에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는 거 아니겠나.”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두 분은 각자의 무학과 마학에서만큼은 절대 빈틈을 두시는 성격들이 아니야. 거기엔 나름의 확고한 이유가 있었어.”
나는 천마와 마녀 밑에서 수련을 거듭해온 결과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무공과 마법의 본질적인 차이점.
나아가선 둘의 궁극적인 공통점까지도.
무공이란 것은 자연에 떠다니는 ‘기(氣)’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단전에 응축한 기운을 혈도를 통해 온몸으로 보내고 신체를 강화한다.
마법은 다르다. 대자연에 존재하는 ‘마나(Mana)’를 마력 회로로 해석한 다음 일그러트려서 흐름을 만든다. 조화를 이해하고 있기에 비로소 혼돈을 창출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법사의 몸속에 있는 ‘써클’은 그렇게 코스모스를 카오스로 변환시킬 수 있는 다양한 술식이 입력된 계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공은 자연을 ‘수렴’하며 마법은 자연을 ‘방출’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발상을 떠올리게 됐다.
“들어봐, 마왕. 만약 하나의 신체로 수렴과 방출을 동시에 구사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말뜻을 이해한 마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겠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