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무극과 참월 (6)
진법을 강제로 찢고 들어왔다.
대문을 박격포로 부숴버린 후 마당에 들어서는 것과 다름없는 무례한 행위다. 참월의 마녀는 지금 천마신교의 귀혼산장에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잠깐. 이미 100년간 전쟁 중이잖아?’
그럼 선전포고는 큰 의미가 없는 걸까.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한 발짝 나선 귀검신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다만 상대의 고강함 때문에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묘탑의 주인이신 참월의 마녀를 뵙습니다. 헌데 귀탑의 마법사들과 본교는 긴 세월 동안 상호불가침이었던 걸로 압니다만.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백발의 마녀와 흑발의 엘프가 서로 대치하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리따웠다. 그러나 마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결코 따사롭지 않았다.
“졸개와 나눌 말은 없는데? 천마를 데려오라 하지 않았니.”
퍼스슥!
그러자 폭암도인이 땅에서 쑤욱 튀어나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엄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려! 교주님은 마교의 하늘. 감히 외인이 오라가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오. 참는 데도 한계란 게 있소, 마녀여!”
“누구도 네깟 것들에게 참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단다. 강권하지 않은 인내심 운운은 스스로 겁쟁이라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겠느냐.”
절그럭.
잔뜩 화가 난 마라혈귀가 도끼를 고쳐 잡았다. 그는 긴 혓바닥으로 주둥이를 쓸어내렸다.
“씨발, 문답무용. 그냥 조져버리자, 사제들. 느닷없이 쳐들어와 우리 귀혼산장의 기둥 두 개를 잘라버렸는데. 순순히 요구를 들어줬다간 마교의 이름이 울지.”
만검패웅이 대장간 입구를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흉폭한 거검이 튀어나와 주인의 손으로 달라붙었다.
허공섭물.
상대의 막강함에 긴장한 만검패웅이 그 거검을 치켜들며 선언했다.
“마라혈귀의 말이 옳네. 적의 수장이 혈혈단신으로 눈앞에 서 있다. 저 여인의 목만 잘라내면 지긋지긋한 쌍마대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네.”
귀혼오마 넷이 펼쳐내는 투기가 일대를 진동시켰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몸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짙은 살기였다.
‘저걸 가까이서 혼자 받아내야 하는 스승님은 어떠실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인영이 대나무 숲속에서, 복마전의 지붕 위에서, 수련장의 담벼락 위에서 뛰어올라 마녀를 둘러쌌다.
“나찰대 일조장 이하 백 인, 명을 받사옵니다!”
“뇌신대 일조장 이하 백오십 인, 명을 받사옵니다!”
“적마단 단장 이하 이백 인, 명을 받사옵니다!”
이 정도면 귀혼산장의 마교도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그들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상대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포위진을 형성했다.
각 부대의 조장들을 선두로 만들어진 정교한 덫.
천라지망.
나는 이 층에 처음 떨어졌을 때 저것에 한 번 당할 뻔한 적이 있다. 때마침 날아온 마법사들이 천라지망을 외부에서 폭격하지 않았다면 나와 제르비어스는 낭패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녀는 태연자약하게 웃을 뿐이었다.
“가소로운 것들. 지금 이 몸과 한 번 붙어보자는 것이니?”
마녀를 중심으로 귀혼오마 사 인이 동서남북 사방위를 맡은 채 응전 태세를 취했다.
입을 연 것은 마녀의 후방을 맡은 귀검신녀였다.
“단 한 명의 적에게 본교의 무력을 총동원한다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지요. 하나 그대는 교주님과 999번 무승부를 기록한 마탑의 지존. 너무 원망은 마십시오.”
그 말을 받은 건 마녀의 전방을 감당하고 있는 마라혈귀.
“켈켈켈. 자만이 과했소이다, 마녀. 원거리에서 검사를 상대해야 하는 마법사 주제에 댁은 너무 가까이 달라붙었어. 이런 근접전이라면 우리에게 무조건 유리하지. 그 엿가락 같은 지팡이로 마법진을 그려내려고 하는 순간, 댁의 머리가 몸과 분리될 거야.”
뒷골목 무뢰배의 말투였지만 마라혈귀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마녀는 너무도 무방비하게 위험거리를 허용했다. 마법사가 아무리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내 술식을 전개한다 해도 그것이 절정고수의 쾌검보다 빠를 순 없다.
‘스승님, 무슨 생각이시죠?’
나는 그 답을 곧 알 수 있었다. 잠자코 도발을 듣고 있던 참월의 마녀가 입을 뗀 것이다.
“정했어. 처음은 너로 하겠다, 개구리야.”
터어어어어엉!
그 말을 마치자마자 마라혈귀의 몸이 ㄱ자로 꺾이더니 포탄에 적중된 것처럼 뒤로 튕겨나갔다. 그 범위에 진을 치고 있던 마교도들이 함께 휩쓸려나간 건 덤이었다.
나는 소스라쳤다.
‘마법진도 없이, 손짓 한 번도 없이 술식을 완성시켰어?’
차라리 내가 마법에 문외한이었더라면 덜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덧 3서클 마법사가 된 지금은 저게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는 장면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우랴아아아아압!”
“죽어라앗!”
마녀의 좌우에서 폭암도인과 만검패웅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패도적인 그들의 공격이 마녀의 두개골을 쪼개기 직전, 맥없이 튕겨나가 버렸다. 폭암도인의 턱은 돌아간 상태였으며 만검패웅의 가슴엔 움푹 구멍이 파져 있었다.
그렇게 둘을 처리한 마녀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이이이이이익.”
그러자 거기엔 굼벵이처럼 검을 휘두르는 귀검신녀가 있었다. 흡사 어린아이가 물속에서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처럼 느릿하기 짝이 없는 속도.
신녀와 한 번 맞붙어본 적이 있는 나는 저게 어떤 초식이나 속임수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강제로 붙잡힌 것이다. 마녀가 컨트롤하는 막대한 힘의 중력장에.
나른한 표정으로 마녀는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타깝구나. 너처럼 수려한 요정족이 마법이 아니라 무공을 익혔다니 말야. 백묘탑에 왔다면 이 몸이 어여뻐 해줬을 터인데. 쯧쯧.”
한 번 혀를 찬 마녀가 어느덧 자신의 눈앞까지 접근한 귀검신녀의 목검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기를 두른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검신의 밑 부분을 손가락으로 한 번 튕겼다.
티이이이이잉!
괴성과 함께 튕겨진 귀검신녀의 목검이 그 주인의 얼굴을 향해 휘둘러졌다.
충돌 직전 검기를 해제시킨 신녀의 반사신경은 경탄할 만했으나, 물리력만으로도 목검의 파괴력은 대단했던지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엘프는 맥없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마녀는 손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이래서 칼밥 먹는 놈들이 마법사에게 무시당하는 거란다. 뭐? 접근전이라면 유리해? 이 몸이 마법진을 그리지 못하게 만들면 이길 수 있어?”
그때 용사의 본능이 어떤 위화감을 알아챘다. 아직 대낮에 불과할 터인데 귀혼산장이 평소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마치 머리 위에 거대한 천막이라도 드리워진 것처럼.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하니 당하는 거란다, 무지렁이들아. 마법사가 생각 없이 저지르는 일은 단 하나도 없거늘.”
마녀가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를 둘러싼 수백의 마교도들이 마치 홀린 듯이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아닛, 저게 뭐야?’
그것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규모의 마법진이었다.
상공 100미터 위에 압도적인 크기의 마법진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도시를 통째로 뒤덮어버린 외계 우주선의 위용처럼.
대체 언제부터 만들어져 있었던 거지?
내가 스승의 과감한 전법에 감탄하고 있을 때,
“쳐라앗!”
“물량으로 승부한다. 한꺼번에 공격해!”
수백의 마교도들이 마녀의 수급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일순간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 정도의 일제 공격.
하지만 모두 부질없었다.
“꾸에에엑!”
“으아아악!”
마녀가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교도들이 보이지 않는 거인의 발길질에 걷어채인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마녀의 인식범위에 들어온 것만으로 발동되는 모양인지 술식 전개에 잠깐의 공백도 없었다.
정권을 내지른 나찰대 교도의 어깨가 뒤로 꺾였고, 일검을 찌른 뇌신대 교도의 안면이 땅에 처박혔으며, 적마단 단장이 뛰어오른 자세 그대로 공중에 정지하더니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그렇지, 우리 스승님!’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좋아하다가 순간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방금 발목이 꺾인 채 나가떨어진 녀석은 염사군인데, 저 녀석 죽지 않았으려나? 귀혼산 초짜인 내게 이것저것 알려준 순박한 놈인데.
내가 지금 스승님의 맹활약에 좋아해도 되는 건가. 귀혼산장에 와 있을 땐 나도 천마신교의 일공자인데 말야.
정체성의 혼란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벌써 기가 꺾였느냐? 더 덤벼 보거라. 혹시 아는고? 이 몸의 마력이 다 바닥나면 네놈들에게도 승산이 조금 생겨날지.”
마녀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면서도 접근해오는 마교도들을 무참히 박살내버리고 있었다. 교도들이 이를 악물고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잘라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상대가 안 돼.’
코끼리와 족제비떼의 대결이나 다름없다.
코끼리가 발바닥을 한 번 들어 밟으면 족제비 예닐곱 마리가 꽥 죽어버리는 형국. 물량으로 압도해버리기엔 한쪽이 지독하게 강해서 머릿수의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수준.
그럼에도 족제비떼들은 코끼리가 지쳐서 드러눕게 되면 자신들이 이빨을 박아 넣을 수 있다는 듯 연이어 맹공을 퍼부었다.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나? 도와줘야 해?’
그런데 누구를?
나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교도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마의 제자로서 응당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내가 이곳에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흑색 도포를 입은 내 모습을 보면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들키면 죽어.’
여기서 내가 노출되면 앞으로의 작전은 물론이거니와, 지난날의 끔찍했던 고생들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릴 거다.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전장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나직한 음성이 있었다.
“그만. 거기서 더 흉한 꼴을 보이지 마라.”
천마신교의 교주. 귀혼산장의 패자.
천마 류운학의 신형이 복마전의 지붕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기라도 한 듯.
천마어기행공.
경공이 극에 달한 자가 보여주는 절기였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천마군림, 만마앙복!”
마녀에게 돌진하려던 교도들이 모두 동작을 멈춘 채 일제히 합창했다.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인 마녀 또한 지팡이를 땅에 꽂은 채 천마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땅에 내려서길 기다리는 것이다.
곧 두 절대자가 불과 10미터의 거리를 둔 채 대치했다.
“할망구가 혼쭐이 나서 도망치는 꼴을 보면 실컷 놀려주려고 했거늘.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군.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인 거야?”
“글쎄. 어떨까, 천마야. 아무튼 면상 한 번 보는데 더럽게 힘들구나. 그렇지?”
“햇빛 아래서 얼굴을 마주하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 마녀여. 본좌가 봤을 땐 지금 그대의 마력은 삼 할도 남지 않았을 터인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구만?”
천마의 말대로 마녀의 이마에는 식은 땀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마력이 끝없이 샘솟지는 않는 법이다. 하물며 지금은 세 개의 달이 마력을 계속 불어넣어주는 삼만월의 밤도 아닌 대낮이다.
정곡이 찔렸는지 마녀는 입을 다물었다.
“형님! 왜 멈추게 하셨습니까. 지금 마녀를 조져버리면 다 끝나는 건데!”
왼쪽 얼굴이 피범벅이 된 마라혈귀가 소리쳤다. 천마는 그의 험악한 몰골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혈귀야, 본래 가장 탐스러운 사냥감은 독이나 덫으로 잡아선 안 되는 법이다. 정정당당하게 활이나 칼로 잡아야 진정한 무림의 사냥꾼이지.”
그러자 마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감히 누굴 사냥감 취급이니? 떼로 덤벼들지 않으면 감당할 자신도 없는 주제에. 우리 마탑의 마법사는 500명. 너희는 600명. 쪽팔리지도 않아? 정정당당 외치려면 쌍마대전에서 너희 쪽 100명은 버려두고 붙어야 되는 거 아니야?”
천마의 시선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와 동시에 듣고 있던 마교도들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숫자의 우위. 천마신교에게는 찔리는 부분이었던가.
그러나 밀리지 않고 소리치는 교도들도 있었다.
“잡혀온 죄수 중에 무림인들이 더 많은 걸 뭐 어떡하라고!”
“시발, 누가 전쟁을 머릿수 맞춰서 하냐!”
“그리고! 우린 귀혼오마인데 너흰 육망성! 간부는 그쪽이 한 명 더 많지 않느냐!”
하긴.
귀혼‘오’마보다 ‘육’망성이 한 명은 더 많겠지.
그래도 그건 좀 쪼잔한 논리 같은데.
“하긴. 무식하게 무공 쌓는 것들과 달리 마법은 재능의 영역이니까. 괘념치 않아. 무엇보다 어차피 쌍마대전은 결국 우리 둘의 맞대결로 승부가 날 테니 수적 우세로 생색낼 생각은 없어.”
저기, 스승님.
그런 것 치곤 생색 많이 내신 것 같은데요.
기세에서 밀릴 것을 우려하는지 천마가 팔짱을 끼며 내뱉었다.
“됐고. 볼일이나 말해라.”
“당신도 알다시피 이 감옥에는 교도관이라는 녀석이 어디선가 우릴 지켜보고 있어. 그닥 수다스러운 작자는 아니야. 나도 100년 동안 네다섯 번 정도 놈의 메시지를 받았던가 그랬지.”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 말인가. 본좌도 모를 리 없지. 그래서?”
“오늘 일어나보니 그 교도관이 내게 몹시 재밌는 이야기 하나를 전달해주더라고.”
교도관이 마녀에게 직접 전달을 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사지에 피어올랐다.
마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마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당신. 요즘 제자를 키운다던데, 맞아?”
이거,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