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50화 (50/300)

#050. 무극과 참월 (5)

“공간을 극도로 압축한 끝에 블랙홀을 넘어서…… 시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

원수가 모두 죽었다 해도 마녀는 과거로 돌아가서…… 그들을 쳐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바깥세상에서 이룰 수 없었던 10서클이라는 대단한 성취를 이뤄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천마, 그 망할 놈을 이겨야만 하노라.”

머나먼 과거를 되짚던 마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이제는 눈앞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 본능이 말하고 있어. 그를 꺾어버리는 순간 10서클이 달성될 것이라고.”

마녀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미 천마 류운혁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바 있다.

100년이나 넘게 치고 박아야 했다면, 차라리 상대에게 승리를 넘겨주고 다음 차례가 오길 기다리면 되지 않느냐고.

그때 천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설공은 이미 삼월초원의 시련을 격파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녀석의 목을 쳐내려면 응당 본좌도 같은 위업을 달성해야하지 않겠느냐. 그 할망구도 못 이겨서야 설공을 이긴다는 건 요원해.”

무극과 참월.

한쪽이 다른 한쪽의 숙제다.

서로가 서로에게 넘어야만 하는 벽이다.

‘그래서 둘 다 양보를 할 수가 없는 거였어.’

자그마치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999번을 싸우면서 말이다.

나는 ‘탈옥’이란 메인 퀘스트를 받았다.

삼월초원의 열쇠는 내가 쟁취해야만 한다. 두 스승의 사연 역시 가슴 아프고 통탄할 만 하였으나, 나라고 관객석에서 박수만 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내가 어느 쪽 진영을 선택하든,

‘두 스승 중 한 명은 패배를 맛보게 되겠지.’

그것도 애지중지 모든 기술을 전수해준 제자의 손에 의해서.

그리고 한 진영을 승리로 이끈다 한들

‘승자의 손에서 내가 열쇠를 양보 받아야만 해.’

처음엔 두 최강자의 스킬을 빌려와 강해지기 위해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강함을 체감하면서 더 강한 쪽을 판별하려 했다.

그렇게 진영을 선택하면 ‘파천황의 권능’을 가진 나와 층을 함께 오를 수 있으니 열쇠를 넘겨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둘 다 이런 각오여서야 나에게 열쇠를 양보할 리 없어.’

내가 실력으로서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100년 동안이나 서로에게 열쇠를 양보하지 않은 두 독종이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제자에게 덥석 열쇠를 내줄 리 없다.

‘차라리 선택한 진영을 일부러 패배하게 만들어서 상대 쪽을 먼저 올려 보낸다면? 그리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다음 기회를 노린다면?’

잠시 생각해보던 나는 곧 그 계획을 폐기했다.

나는 지금 두 절대자를 속이고 있다.

제자로 받아 달라 자청하면서 동시에 상대 쪽의 제자라는 것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쌍마대전에 내가 참전한다면 이런 ‘기만’을 둘 모두 알게 될 터.

내가 선택한 진영이 승리한다면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을 것이다. 상대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면서.

하지만 패배한 쪽의 수장이 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리 없다. 박쥐같은 첩자라고 생각해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팽팽한 둘의 대결에 끼어들어 한쪽을 의도적으로 지게 만든다는 건, 한쪽을 이기게 만드는 것보다 백배는 어려울 거야.’

결국 그 생각은 결코 최선책이 아니다.

천마와 마녀의 바깥에서의 삶을 알고 나니 이 삼월초원이 내놓은 시련이 얼마나 괴악한 수준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에 난 두 스승을 모두 배신해야만 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만 것이다.

‘쌍마대전. 진짜 개떡 같은 난이도다.’

세 개의 달이 모두 떠오르는 쌍마대전까지 남은 시간은 3주.

나는 천마와 마녀를 한날한시에 공략해야만 한다.

각 분야에서 극마지경과 9서클을 이룩한 절대강자를 상대로.

이대로는 안 된다. 확률이 너무 낮다. 지금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확률을 어떻게든 올려놓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해.’

*

내가 천마와 마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 있었던 건 한 가지 강력한 전제 때문이다. 바로 두 진영이 상대를 극렬하게 미워하고 있으며 일말의 교류도 하지 않는다는 점.

두 진영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는 45일마다 돌아오는 쌍마대전이라는 전쟁터뿐이었다. 최소한 45일 동안 나는 안전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날 일어난 모종의 재앙을 결코 예상할 수 없었고, 그건 교도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날.

나는 천마와의 수련을 일찍 끝내고 귀혼산장 지하에 있는 대장간에 와 있었다.

“흐음. 확실히 교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천혜의 신체조건을 타고 났구나.”

귀혼오마 중 한 명인 ‘만검패웅(萬劍覇雄)’이 내 몸의 치수를 재며 하는 말이었다.

그는 의자 앞에 앉아 있었는데 불구하고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위압적인 덩치.

용사의 심안은 그가 온갖 무기와 암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살수조직의 대장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교주님께선 검(劍)과 도(刀)를 일공자에게 추천했다고 들었다. 허나 무기는 손에 쥐는 자와 궁합이 맞아야만 하지. 소협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는 역시 검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크하하하! 이 만검패웅도 그렇게 생각하네. 어디 보자. 손바닥을 펴 보게.”

그의 말대로 손바닥을 펴 보자 그는 세심하게 그것을 살피더니 등 뒤에 걸린 수십 개의 목검 중에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그 목검은 썩 괜찮은 그립감과 무게중심을 갖고 있었다. 만검패웅은 슬쩍 보는 것만으로 내게 딱맞는 목검을 건넨 것이다.

그러자 내게만 보이는 메시지가 떴다.

[용사가 주인 없는 물건과 접촉했습니다.]

[용사의 인벤토리에 수납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어라? 이런 메시지가 뜨네?’

확실히 천마가 빌려준 목검을 빌려 썼을 때엔 한 번도 뜨지 않았던 메시지.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면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다는 거군.

“자, 검기를 뽑아보게.”

나는 만검패웅으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뒤 푸른색 검기를 뽑아냈다. 길이는 검신의 두 배가 넘는 1미터 30센티미터 정도.

“딱 좋군. 귀혼죽림에 내 적당한 나무를 봐둔 게 있으니 며칠만 기다리게. 공자가 마음껏 무용을 펼칠 수 있는 목검을 만들어 두지.”

그가 다시 목검을 가져가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선배님, 그냥 이 목검을 써도 되는 것 아닙니까? 어디 상한 곳도 없고, 질도 좋아 보이는데요.”

그러자 살수이자 대장장이인 사내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본래 이 검은 당랑쾌마가 쓰던 녀석일세. 731번째 쌍마대전에서 장렬히 전사했지. 쓸개를 짜내는 고통을 감내하며 내가 주워왔어. 무사의 혼은 죽어서도 무기에 담겨 있는 법이야. 인연 없는 자에게 망자의 검을 건네준다는 건 당랑쾌마에게도, 공자에게도 크나큰 무례. 못 들은 걸로 하지.”

“아, 알겠습니다. 제가 선배님의 깊은 뜻을 몰랐군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다시 목검을 벽에 거는 만검패웅의 눈빛에서 익숙한 사내가 겹쳐 보였다.

화룡도 9번 방장인 실성 드워프 하스록 크라움. 어쩌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없는 고통을 느끼는 자들의 표정은 다 비슷한 건지도.

그래서 한 번 찔러 보았다.

“선배님. 외람되지만 사실 선배님께선 제대로 된 화로에서 철제 무기를 만들고 싶은 아쉬움을 억지로 누르고 계신 거 아닙니까?”

“호오, 제대로 봤네. 아쉬운 대로 나무를 깎으면서 달래고 있지. 이 감옥에서 제대로 된 광석을 캐낼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때문에 나무토막으로도 검기를 뽑아낼 줄 아는 고수들만 쌍마대전에 나설 수 있는 걸세. 경지가 그보다 밑이면 열외죄수 구역에서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만약 적절한 재료만 있다면 선배님께서는 제대로 된 명검을 두드리실 수 있을 텐데요. 그쵸?”

그가 콧김을 흥하고 한 번 내뿜었다. 그럴 기회만 온다면 전심전력을 다하겠다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목검은 아쉬운데 말야.’

용사전용검 아론다이트나 마검 디아볼릭을 아직 다룰 수 없는 내 근력으론 목검을 휘둘러야만 하는 처지가 아쉬웠다. 명장은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건 심검의 경지에 다다른 최고수들이나 해당하는 얘기고.

인벤토리를 슬쩍 열어서 재활용할 재료가 있나 찾아보았다.

‘S급 갑옷 드래곤하트 플레이트.’

전설의 금속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백색의 갑옷. HP수치가 만 단위로 올라야 입을 수 있다는데. 이걸 해체해서 검을 만들어?

잠시 궁리하다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바다 위에서 배의 돛을 부러뜨려 노로 삼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때, 귀혼산을 통째로 진동시키는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이이이이이이이잉!

“큭. 뭐야?”

앰뷸런스 사이렌의 출력을 한 50배 곱하면 이런 소리가 날까.

내가 귀를 틀어막고 눈을 찡그리고 있는데, 만검패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망치에 이마가 부딪혔는데도 그는 아랑곳없이 뛰쳐나갔다.

“이 소리는 분명!”

그의 뒤를 따라 대장간 밖으로 나가니 수련장에 있던 마교도들이 모두 뛰쳐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귀혼산장의 입구 쪽에서 붉은 빛기둥이 세 개나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다급히 만검패웅에게 물었다.

“뭡니까?”

“광멸복마진이 반응하는 것이다. 마법 서클을 심장에 새긴 자가 진법에 걸려든 것이지.”

“저 붉은 빛줄기는 그 신호고요?”

“그래. 경지에 따라 숫자가 매겨지는…… 그새 두 개가 더 늘었어?”

불길한 빛줄기는 이미 다섯 개가 되어 있었다. 말인즉슨 최소 5서클의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지금 이 귀혼산장에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때, 한 마교도가 경공술을 펼쳐 다급히 언덕을 내달리고 있었다. 귀혼산장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오크였다.

“누군가 광멸복마진을 힘으로 박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각기 다른 곳에서 세 개의 인영이 날아와 오크 앞에 멈춰 섰다.

귀검신녀. 마라혈귀. 그리고 폭암도인.

마교 서열의 최상위권인 귀혼오마 중 세 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귀검신녀가 물었다.

“침입자의 용모는? 마법사인가?”

그러자 팔짱을 낀 마라혈귀가 코웃음을 쳤다.

“신녀야, 보면 모르겠냐. 마법사가 아니면 저 진법은 애초에 발동될 일이 없어. 물론 다섯 개짜리는 나도 처음 보는 거지만…….”

그때 폭암도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일곱 개로 늘었다. 심상치가 않아. 어쩌면 육망성 중 하나가 진법에 걸려든 걸 수도 있다. 나찰대와 뇌신대, 적마단을 모두 소집해라.”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제르비어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 야. 너 지금 어딨냐?

- 백묘탑의 마법 서고에 있지. 왜 또? 잔소리 하려는 거면…….

- 아니야! 지금 거기 분위기는 어때? 별다른 거 없어?

- 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사서인 유진 쿤딜리니가 보이지 않는데?

유진 쿤딜리니. 빛의 마법을 쓰는 ‘섬광의 마녀’. 7서클 마법사. 온화한 성품의 그녀가 설마 침입자의 정체인가?

그런데 곧이어 마왕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 아, 찾았다. 유진은 서고 바깥에서 뛰어다니고 있는데?

- 뛰어다녀? 어째서?

- ……백묘탑의 주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용사야. 허둥대는 건 유진만이 아니야. 모든 마법사가 지금 참월의 마녀를 찾아대고 있어.

그와 동시에 붉은 빛줄기가 두 개 더 늘어났다. 이제 그것은 맑은 하늘을 거룡이 할퀸 자국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9서클 마법사의 침입.

이로써 확실해졌다.

일레인 쿠디슈가 지금 귀혼산장의 대문을 깨부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일공자, 피해랏!”

만검패웅이 나를 확 밀쳤다. 괴력의 사내가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꼈는지 손을 쓴 것이다.

내가 뒤로 넘어지자마자 무형의 기운이 귀혼산의 앞마당을 휩쓸었다.

쉬이이이이이익!

모여 있던 귀혼오마 삼인의 반응은 훌륭했다. 만검패웅이 날 밀치는 것과 동시에 귀검신녀와 마라혈귀가 하늘로 솟아오른 것이다. 폭암도인은 거꾸로 땅을 파고들어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바로 그 중간 지점의 공간이 칼로 벤 듯 잘려나갔다.

우르르르릉.

등 뒤를 바라보자 만마정 전각이 기둥째로 잘려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난 알아볼 수 있다. 이건 압도적인 마력으로 방출한 중력 마법의 상급 술식. ‘그래비티 슬래시(Gravity Slash)’다.

분기탱천한 마라혈귀가 허공에 머무른 채 외쳤다.

“어떤 새끼냐!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응답은 정문 쪽에서 들려왔다.

“냄새 나는 것들. 손님 맞이하는 매너가 영 꽝이로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쌍마대전은 아직 열흘도 넘게 남았다. 세 개의 달이 떠오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무슨 연유로 여기를 오신 거야?

한 여인이 우아한 걸음으로 귀혼산의 언덕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은발은 마치 한 가닥 한 가닥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넓게 퍼져 마치 은으로 세공한 공작새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숨을 멎게 하는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그녀의 혀끝에서 나온 말은 매서웠다.

“건물 하나를 더 날려버리기 전에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무지렁이들아.”

나른한 듯 가시가 박혀 있는 매혹적인 목소리.

나는 저 주인공을 알고 있다. 매일 여섯 시간씩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스승님이니까.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지팡이를 들어 복마전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그러자 월장석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너희들의 우두머리, 천마를 불러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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