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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48화 (48/300)

#048. 무극과 참월 (3)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로 꿇어 앉아 8대 천마 류운학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청성파의 일대제자 류운학은 죽었다. 무림인으로서의 긍지도, 천하제일인이라는 자부심도 전부 그 설산에 묻어버렸지.”

사라진 설공이 맞은 것은 푸르가토리움의 소환 빔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류운학이 그것을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설공과 가까이 있었기에 류운학은 들을 수 있었다.

‘살생의 죄로, 본좌를 가두겠다고?’

하얀빛에 휩싸인 설공의 마지막 중얼거림이었다.

“나는 복수의 상대를 눈앞에서 빼앗기고 말았어. 누가 빼앗아갔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남겨진 단서는 단 하나. 살생이라는 단어.”

그래서 류운학은 텅 빈 마교의 본거지에 홀로 걸어 들어갔다. 단전을 봉인당한 채 강제노역에 동원돼 있던 노예들을 풀어준 뒤 천마 설공이 기거했던 곳을 찾아냈다.

“온갖 영약과 비급, 마공서들이 그 안에 있었다.”

무극파천공.

류운학이 평생에 걸쳐 익힌 천지일기공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상극의 무공.

하지만 마교의 환단인 마령단(魔靈丹)을 집어먹고 복마전에서 폐관수련을 한다면, 정파제일인이라 불린 잠재력을 가진 류운학이라면 던져볼만한 한 수였다.

“그렇게 나는 무극파천공을 익혀 극마지경에 도달했다. 마령단의 힘으로 중단전을 개방해 만독불침의 몸이 되었고, 손에는 마교의 신물인 대라폭혈검(大羅爆血劍)이 들어 있었지. 다시 강호에 나왔을 때엔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정마대전을 가리켜 무림맹과 천마가 동귀어진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극파천공의 극의를 이루었기에 류운학은 같은 기운을 지닌 무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치 늑대가 한 번 맡은 냄새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듯.

그렇게 강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마교의 잔당들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마교의 신물인 대라폭혈검은 오직 마인들의 피만 묻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죽인 숫자가 일백을 넘어섰을 때엔 마교도들이 무리를 지어 습격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호법이었던 자를 혈전 끝에 쓰러트렸을 때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했다. 하늘을 뚫고 내려오는 흰색 섬광. 그것이 날 덮친 것이지.”

류운학은 그렇게 자발적으로 푸르가토리움의 죄수가 되었고, 2층인 삼월초원으로 배정받았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설공 역시 이곳에 있었어야 했지만.

“본좌가 너무 늦었다. 녀석은 등반죄수가 되어 오래 전에 위층으로 올라가버린 뒤였거든.”

류운학이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가 나에서 다시 ‘본좌’가 되었다. 눈빛도 청성파 류운학에서 무극 천마로 되돌아와 있었다.

“본좌는 놈을 쫓아갈 것이다. 몇 층까지 올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만 죽는 한이 있어도 추격을 멈추지 않을 터. 놈을 만나 생사결을 벌이는 것이 본좌의 숙명이다.”

참으로 무림인다운 대사로구나.

“본좌는 무극파천공을 익히며 깨달았다. 마교가 대체 어찌 그리 고강할 수 있는지. 마도천년의 기예가 선택받은 적전제자에게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류운학은 적전제자가 아니었으나 강해지기 위해 영혼을 팔았다.

마교의 마령단을 원수의 심장처럼 씹어 삼켰다.

무의 극에 달할 수 있다면 마귀가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정파의 명분?

“그런 건 사형의 심장이 꿰뚫리는 것을 막아주지 못했다.”

협객으로서 지켜야 하는 도의?

“그것은 친우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멈춰 세우지 못했어.”

무극파천공. 그것이 있다면 류운학은 자신 역시 설공만큼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천마를 죽이기 위해 본인도 천마가 된다.

“그렇게 본좌는 아수라의 칼날을 맨손으로 잡게 된 것이니라.”

잠자코 스승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되물었다.

“외람되지만 사부님. 이제 더 이상 사부님은 홀몸이 아닙니다. 쌍마대전의 선봉장이시며 휘하에는 육백의 교도들이 있지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복수는 포기한 채 이 층에 눌러 앉아도 되었던 거 아닙니까.”

그러자 천마는 벌컥 화를 냈다.

“무림인에게는 저마다의 숙명이란 것이 있느니라. 제자야,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은 저잣거리의 무뢰배들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야.”

“하지만…….”

“아해야, 무릇 사람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사, 사람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과연 정답이 있긴 한가.

“사람은 먹는 존재다.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먹힌 자의 생명을 죽여서 취하면 먹은 자는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지. 너는 네가 먹은 감자의 무게만큼의 명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삼킨 돼지의 마리 수만큼이나 무거운 업보를 걸머지고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본좌는 무림맹 정예 무인들의 심장을 먹었다. 본좌의 등에는 원통히 죽은 수백의 넋이 이 저주스런 수갑보다 더 단단하게 살을 파고들어 있노라.”

내 무릎이 다시금 땅을 파고 들어갔다. 힘을 준 게 아니다. 천마가 무의식중에 천마군림보의 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분노한 스승에 대한 예로 그것에 대항하지 않고 다만 받아들였다.

“그런데 인간이 그냥 생존하기만 하면 된다고? 웃기지 말거라. 제자야, 본좌는 오 갑자의 공력을 단전에 품고 있다. 하나 공력의 크기는 내 육체의 고강함을 증명해줄 뿐 내 정신의 어떤 가치도 드러내주지 못한다. 오직 그가 품은 숙명의 깊이만이 그걸 보여줄 수 있다.”

어, 이 꼰대 뭘까.

뭔데 갑자기 멋있지.

“무릇 무림인이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신이 믿는 신념 아래 싸우는 것이다. 천마 설공에게도 나름의 신념이 있을 수 있겠지. 본좌는 그걸 비웃지 않는다. 조롱하지도 않는다. 다만 깨부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본좌는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노라.”

*

하지만 사연을 가진 것이 비단 무극 천마뿐인 것은 아니었다.

참월의 마녀.

그녀에게도 절대 2층의 열쇠를 천마에게 양보할 수 없을 만큼의 사연이 있었다.

“내 별명이 왜 참월의 마녀냐고?”

“네.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후후.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이걸 보여줘야 하겠구나.”

마녀가 들어 보인 것은 그녀의 지팡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은 다른 마법사들과 동일했으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지팡이의 끄트머리에 작은 수정구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문스톤, 다른 말로 월장석(月長石)이다. 이 층에 뜨는 달 중에서 두 번째 달의 조각이지.”

“아닛, 그걸 어떻게 손에 넣으신 거예요?”

“몇 번째 쌍마대전이었던가. 성운의 마도사인 드라이푸스 형제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그의 7서클 마법인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나도 따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한데 난 운석을 소환하는 마법을 알지 못한다.”

마녀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달의 파편을 떼어 지면에 충돌시켜보려 했지. 비슷한 효과가 나긴 하더군. 이 월장석은 그때 회수한 것이다.”

“기가 막힌 마법을 성공하셨군요! 그런데 어째서 하나뿐이에요? 그걸 육망성 선배님들께 전부 나눠드렸다면…….”

그러자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2층의 교도관이 그 시도는 자신이 금지시켜 버렸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죄수 최초로 그런 발상을 해낸 패기를 인정해 형량 추가를 하진 않았다고 전합니다.]

“들었지? 삼월초원의 교도관은 꼬장꼬장한 녀석이야. 게다가 생색도 잘 내지.”

참월.

달을 잘라 내버린 마녀.

그것은 이 감옥에서 붙여진 별명이었구나.

마녀가 지팡이를 내려놓고 눈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수업이 끝나면 늘 차를 드시네요, 스승님.”

백묘탑에서 층수를 논한다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마법진이 재배치될 때마다 미묘하게 위층과 아래층이 바뀌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하지만 편의를 위해 한 번 붙인 층수의 이름을 매번 바꾸지 않았다.

마녀 일레인 쿠디슈와 나는 지금 61층인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는 45층 정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녀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투명한 찻잔에는 황금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말 속에 뼈를 숨겨 놓은 것 같구나, 제자야. 아무것도 먹을 필요도, 마실 필요도 없는 감옥에서 이 스승이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 거니?”

“유난이라고까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흐으음, 그래. 하나 마법사가 행하는 것에 의미가 없는 일은 없노라. 내가 매번 이 꽃차를 달여 먹는 것에도 응당 중요한 의미가 있지.”

“이 차를 마시면 마력이 증진되나요? 아니면 술식을 구사할 때 필요한 집중력에 도움이 됩니까.”

마녀는 내 천진한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살포시 웃었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마법진을 펼치지 않는 일레인 쿠디슈의 용모는 마치 빅토리아 시대 귀족가의 여식, 어쩌면 황궁의 공주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우아했다.

“아니. 그런 효과는 없다. 이건 달맞이꽃이라는 녀석으로, 백묘탑을 둘러싼 풀밭 어디에서나 자라곤 하는 들꽃이지. 너도 한 번 맛을 보지 않으련?”

마녀가 검지로 작은 반원을 그리자 테라스의 찬장에 있던 찻잔과 받침 접시가 허공을 타고 날아왔다.

달그락.

받침 접시 중앙에 정확히 내려앉은 찻잔을 기다렸다는 듯 주전자가 살포시 떠올라 기울여졌다.

쪼르륵.

나는 내 앞에 있는 찻잔에 동동 띄워진 노오란 꽃잎을 내려다봤다. 말려진 꽃잎이 물에 적셔지면서 운치를 자아냈다.

조심스레 들어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달짝지근하면서 끝 맛이 알싸한 것이 혀를 자극시켰다.

“달콤합니다. 끝맛은 조금 쌉싸름한 것이…… 생강 맛이 나는군요?”

“후후후. 그러하구나.”

“스승님이 느끼는 맛은 다르십니까.”

“나는 맛을 못 느낀다.”

“네. 맛을 느끼시지 못하…… 예?”

나는 찻잔을 든 채로 멍하니 굳어버렸다. 마녀의 말투가 너무나 여상스러워서 꼭 ‘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는 담소처럼 들린 것이다.

온열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지 주전자의 주둥이에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마녀는 그 수증기의 방향을 어루만지듯 손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미각도, 후각도 오래 전에 상실하였다. 마도병기로서 키워지는 각종 실험의 부작용이지.”

“……스승님.”

“괜찮다, 제자야. 시각과 청각은 여전히 남아 있노라.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없어선 안 될 감각들이기 때문에 제국 마법부가 그런 점엔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이지.”

거꾸로 말해 마녀들의 미각이나 후각엔 보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눈앞의 은발 여인이 덤덤하게 읊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송곳처럼 내 폐부를 찔렀다.

그렇다면 효능도 없으며, 그 맛과 향도 즐길 수 없는 처지이면서 한가로이 꽃차를 마시는 건 일종의 의식(儀式)일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마녀로서 품어온 제례다.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자매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감옥 안에 붙잡혀 왔지만 그녀는 살아 있다.

살아서, 아무 의미 없는 꽃차를 마시고 있다.

마실 수 있다.

“좀 더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스승님?”

그렇게 나는 마녀 일레인 쿠디슈와 그 자매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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