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47화 (47/300)

#047. 무극과 참월 (2)

스물세 번.

내가 삼월초원에 떨어진 이후 바라본 석양의 횟수다. 다음 번 쌍마대전이 돌아오는 날까지 중간 반환점을 넘은 것이다.

그동안 나는 3써클 중력 마법사가 되었고, 무극파천공의 묘리를 3성까지 달성했다. 쉽게 말해서 마법과 마공 두 분야에서 스킬 레벨이 3까지 오른 것이다.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칭호: 천마신교 서열 28위, 3써클 마법사]

[HP: 9,999], [MP: 7,510], [근력: 215], [민첩: 196]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 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미친 성장 속도.

당연히 쌍마대전의 두 수장 역시 날로 기대감이 커져가는 중이었다.

내 일격을 튕겨내는 천마 류운학은,

“굉장하다, 제자야. 이제 귀혼오마와 맞붙어도 제법 그림이 나오겠구나. 마탑의 그 할망구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것이 눈에 선하다!”

이렇게 흥분하며 말했고.

중력장을 펼쳐 날아오르면서도 중력탄을 열두 방향에 펼쳐낼 수 있게 된 걸 본 마녀 일레인 쿠디슈도,

“육망성도 이젠 긴장해야 할 것 같구나. 매일 매일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는 걸 보니, 이 마녀의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려나 보다.”

라며 설레임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치 채무자의 엉덩이를 뒤에서 찌르는 사채업자처럼 메시지창이 눈을 어지럽혔다.

[용사는 아직 쌍마대전에서의 진영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천마에게서 목검을 하사받거나, 마녀로부터 지팡이를 선물 받는 순간 진영 선택이 완료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서둘러 한쪽 진영을 선택하길 권합니다.]

분명히 그런 재촉은 날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냐면 교도관장을 약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2주 동안이나 천마와 마녀를 가까이서 관찰하면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달리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두 스승의 사연은 잘 모르잖아.’

둘의 무위와 강력함의 수준을 따져보는 것 말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 진짜 내면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

인연이 시작이 내기여서일까.

천마 류운학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나와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했다.

“사부님. 불초 제자, 긴히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나는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며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은 아니었다. 천마의 내력이 실린 일격을 받아내다가 절벽을 뚫고 처박히느라 이리 되었다.

“오호. 네 녀석의 말투가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맨입으로 대답해주긴 아까운 질문을 던지려나 본데, 본좌가 ‘호심멸룡탄’을 10연격으로 던질 테니 5개 이상 받아쳐 보거라. 그러면 답해주지.”

“에이씨, 하겠습니다.”

호랑이의 마음으로 용의 목을 물어뜯는다.

그 설명대로 천마의 호심멸룡탄은 출수 이후 제멋대로 가속하며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술이었다. 그것 중 절반 이상을 쳐내느라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크으윽! 다, 다섯 개 받아쳤습니다.”

“마지막 건 좀 이상하지 않았는고? 이마로 들이받은 것도 쳐줘야 하는 게냐?”

“절대 피하려다 맞은 거 아닙니다. 박치기로 위력을 상쇄시킨 거지요. 철두공(鐵頭功) 모르십니까, 철두공?”

나는 시커멓게 탄 이마를 드러내며 그렇게 주장했고, 천마는 그 정도는 눈 감아 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렇게 생떼를 써가면서까지 본좌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천마는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 앞을 가리켰다. 나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부터 던질 질문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도 예상이 되질 않았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는 내내 든 생각입니다. 사부님의 별호 말입니다.”

“…….”

“무극 천마(武極 天魔). 무술의 정점을 추구하는 천마라는 뜻이지요. 분명 사부님이 성취하신 무공의 수준은 끝을 모르겠기에 앞의 두 글자는 천하의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겁니다. 문제는 뒤의 두 글자이지요.”

류운학은 계속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이.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사부님은, 천마신교의 정점이자 귀혼산의 당당한 일인자이신 무인 류운학은…… 사실 천마가 아닙니다.”

류운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검기를 날려도 흔들림이 없었던 평정심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린 것이다.

“……그것을 네가 어찌 알았느냐.”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지점은 천마의 스킬 목록.

나는 파천황이 준 권능으로 감옥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으며, 그렇게 친구를 맺은 상대의 스킬 목록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천마의 스킬 목록은 엄청나게 많았다. 과연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이룩했다고 보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거기엔 무극파천공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성질의 무공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공이 아니었다.

“불초 제자가 가진 미욱한 재주 중 하나입니다. 상대가 가진 무공을 어림짐작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자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천마의 성격도 힌트가 되어주었다.

그는 강자존의 율법을 숭상한다고는 했지만 결코 약자를 핍박하지 않았으며, 살육에 미친 광인도 아니었다. 마라혈귀가 내 마검 디아볼릭을 강탈하자고 했을 때도 이상할 정도로 화를 냈고.

‘천마라 하기엔 너무 무른 성격이지.’

무엇보다 백묘탑의 서고에서 찾아낸 마도서 단탈리온. 그 녀석이 확인해주었다.

천마는 무극파천공을 접하기 전에 본래 익히던 무공이 있었다.

“대답해주십시오, 사부님. 어째서 천마는커녕, 마인(魔人)조차 아니시면서 스스로 ‘천마’라는 이름을 달고 계신지요.”

“그래. 내기에서 졌으니 말해줘야 하겠군. 맞다. 나는 천마란 이름을 달고 있으나 마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무림맹 산하 청성파의 일대 제자였지.”

그가 자신의 흑색 도포를 한 번 쓸어 내렸다. 마치 이제는 그것을 벗어던질 수 없는 업보라도 되는 양.

“나는 천마를 사냥하기 위해서 천마가 되었다.”

*

설공.

중원무림을 공포에 떨게 만든 천마신교 7대 교주의 이름이었다.

십만대산.

천마 설공을 척살하기 위해 무림맹 정예 연합군이 모인 산악지대의 이름이었다.

류운학.

무림맹이 이번 천마 토벌을 강행하게 만든 불세출의 천재 검객, 정파제일인 청년의 이름이었다.

하늘엔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천하를 혈겁에 몰아넣은 한 사내를 사냥하기 위해 모인 연합군 무인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훗날 세인들은 이 순간을 정마대전이라 거창하게 부르겠지만, 실제 벌어진 일은 조금 달랐다.

전쟁이 아니라 사냥.

그것은 수백 마리의 늑대가 한 마리 호랑이를 물어 죽이려는 형국이었다.

천마 설공이 눈밭을 즈려밟았다.

“본좌 홀몸으로 그대들을 상대할 것이니 안심하라. 본좌가 이기면 무림맹은 절멸, 본좌가 지면 교도들은 향후 100년은 활동하지 않고 흩어질 것을 약속하지.”

호랑이의 오만한 선언.

자신 뒤에 도열한 마교도들은 절대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

늑대들은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이리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순서는 정했는가. 진법을 펼쳐 한꺼번에 덤벼도 상관없느니라. 오너라.

연합군의 무인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눈발을 허공에 흩날리며 각 문파의 장문인과 일대제자, 은거 중이던 장로가 살초를 뿌렸다.

오직 류운학만이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천마가 일권을 출수할 때마다 셋이 죽어나갔다.

일장을 쏘아낼 때마다 여섯이 피를 흘렸다.

일검을 휘두르면 열둘의 목이 날아갔다.

늑대는 이 극렬한 사냥의 시간에서 자신들이 사냥꾼이 아니라는 걸 시시각각 깨달아야만 했다. 그들은 호랑이의 앞발에 가죽이 찢겨나가는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류운학은 검을 뽑아들지 않았다.

다만 손잡이를 움켜잡은 손에서 피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하반신이 날아간 소림사의 주지 법홍대사가 류운학을 향해 신음했다.

“아, 아직 나서지 마시오, 류 대협. 우리에겐 확실한 승리가 필요하오. 저 마두가 지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 지금 그대가 나서선 안 되오.”

그것이 중원무림의 거두 소림을 이끄는 최강자가 남긴 유언이었다.

그렇게 세 시진이 흘렀고,

십만대산의 설원은 완전히 검붉게 물들었다.

“이제 그대 한 명만 남았군.”

천마가 팔을 휘둘러 검을 털어냈다. 마지막까지 버틴 화산파 장문인 현룡진인의 피가 거기에 묻어 있었다.

스르릉.

류운학이 마주 검을 뽑았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기다림이었고, 폐부를 잘라내는 잔인한 시간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들이, 서로의 호승심을 자극하며 성장해 온 무림의 동포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는 것을 두 눈에 담아둬야 했다.

“나는 청성파의 류운학이다.”

그가 천마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자 상대에게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탄식을 내뱉은 것이다.

“본좌는 슬프구려.”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간악한 마두여.”

“이곳에 모여든 무인들 중 그대의 성취가 가장 빛나고 있소. 그 손에 피가 나도록 끝까지 참아낸 그대의 인내심에도 경의를 표하오.”

천마가 진각을 내밟았다.

“하나 곧 본좌에게 목이 잘릴 것이니, 그대의 살신성인이 무의미한 인내로 돌아가게 됨이 슬프단 뜻이었소.”

“그 건방진 혀를 잘라주겠다.”

류운학은 가공할 내력을 일거에 터트렸다.

첫 수에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최강의 초식을 시전할 요량으로 오직 검로에만 집중한 것이다.

폭산하는 검강이 쏟아지려는 찰나,

“더할 나위 없는 공격이오.”

천마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지더니 순식간에 류운학의 검을 막아섰다. 상대의 공격이 형(形)을 완성시키기 직전에 상쇄시켜버린 것이다.

“이제 본좌의 반격을 받아보…….”

그런데 그 순간.

천마가 류운학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생사결의 순간을 치르는 무인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파슈우우우우우웅!

모여든 암운을 꿰뚫고 새하얀 빛의 기둥이 내려와 천마를 집어삼켰다.

“……뭣이?”

류운학은 천지를 하얗게 물들인 빛에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천마가 있던 자리엔 원형의 공터만이 눈을 증발시킨 채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사라져 버렸어?”

처음에 류운학은 자신이 설마 전설 속에 나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순간을 목격한 것인가 생각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집어던져 버렸다.

등선은 깊은 참선 끝에 한 도인이 육체를 벗어던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그러니 살육의 화신인 천마가 등선을 했을 리 없다.

그리고 육체를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등선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넋이 나가 있던 류운학에게 다가온 것은 덩치가 산만한 마교의 호법이었다.

“교주님의 기(氣)를 읽을 수가 없소. 우리는 회의 끝에 공식적으로 무림맹과 천마의 대결에서 패배를 인정하오.”

“……패배라고?”

“그대가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나 교주님께선 이런 상황에 엄격한 명령을 내려 주셨소. 천마신교는 모든 산하 지부의 활동을 해제하고 교도들은 일제히 야인이 될 것이오. 그리고 100년간 강호에 출두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드리겠소.”

“아니, 도대체가…… 나는…….”

류운학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마교도들은 설원에 자신들의 검과 창을 꽂아 넣고는 침울한 얼굴로 산을 내려갔다.

수백 개의 주검.

수천 개의 무기.

그리고 한 명의 사내만이 설원에 덩그러니 버려졌다.

“이럴 순 없다. 이래서는 안 돼.”

류운학이 이대로 십만대산을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숙명의 결투 끝에 천마를 무찌르고 마교를 해체시킨 불세출의 영웅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강호는 그를 떠받들고 100년 동안 천하제일인으로 치켜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없는 기만이다.

“죽었어야 했다.”

차라리 천마의 칼에 목이 날아갔더라면.

먼저 간 동료들에게 부끄럼 없는 일전을 벌이고 장렬하게 패배했더라면.

이토록 무력한 절망에 뒤덮이는 일은 없었으리라.

“천마아아아아아아!”

갈라지듯 터지는 비명이 십만대산의 허공에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