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무극과 참월 (1)
한 번 본 것은 잘 잊지 않았다.
한 번 들은 것도 좀처럼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검은 양장본이 하는 말의 일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
그건 분명 교도관장의 터무니없이 긴 자기소개에 포함된 항목이었다.
- 우주의 창생사멸에 관한 모든 기록이 아카식 레코드의 지킴이인 저에게 있으니…….
녀석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네가 말한 것과 같은 개념인지는 모르겠다만, 아카식 레코드의 지킴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은 만난 적 있어.”
- 우어어어억! 당신, 푸르가토리움의 통치자를 만나셨군요?! 천존이시여, 제 소원이 결국 기나긴 세월 끝에 당신에게 닿았나 봅니다.
“천존이고 뭐고…… 넌 뭐하는 녀석인데? 마물이냐? 아니면 괴수?”
- 아, 이런.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무례를 저질렀군요. 제 이름은 단탈리온이라고 합니다.
띠링!
뒤늦게 녀석에 대한 정보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판독에 시간이 걸린다더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름: 단탈리온]
[종족: 서적], [클래스: 마도서]
[칭호: 사방세계 최악의 금서]
[HP: 1], [MP: ???,???], [근력: 0], [민첩: 0]
[형량: 214,935년]
[단탈리온은 뛰어난 마법사들이 모인 세계에서 고금 제일의 대마법사 흉켈슈타인이 쓰던 일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마도학의 수준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이 책은 그만 지성을 갖게 되었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대화도 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한 거지요. 흉켈슈타인 사망 후에도 마법사들의 지식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있던 세계에서 마법사들은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기 위해 공기 속에 존재하는 에테르 속에 평생에 걸친 자신의 지식을 코드로 압축시켜 놓았는데요. 단탈리온은 그 에테르를 흡입하기 위해 마법사들에게 지식을 나눠주고 그들의 생기를 빼앗아먹는 탐욕광이 되었답니다.
결국 그 행성에 있던 에테르를 모두 독식해버린 이 책은 그 세계에 멸망을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에테르로 전수되던 비전(祕傳)이 실종되어버려 마법사들이 세계수를 지켜낼 수 없게 된 거죠. 별이 수명을 잃고 파괴되는 순간 푸르가토리움은 이 무생물에게 죄를 묻기로 했습니다.]
나는 거기서 읽기를 잠깐 멈추고 단탈리온을 노려보았다.
“너…… 진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일기장이구나?”
- 하하하하. 초면에 그렇게까지 칭찬해주실 필욘 없는데요.
이 녀석, 눈이 없어서 사람이 비꼬는 표정을 못 읽는 건가. 반어법이 안 통하는 대화상대로군.
[단탈리온은 그야말로 현존하는 우주 제일의 검색 엔진. 무한에 가까운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나 통찰은 개구리 수준입니다. 선악에 대한 개념이 없어 사용자의 성향에 따라 가공할 전술무기도, 화장실에 비치된 휴지조각도 될 수 있어요.
다만 그는 한 가지 숙원을 갖고 있으니, 우주의 창생사멸이 모두 기록돼 있는 궁극의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아카식 레코드’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조심하세요. 단탈리온을 이용하려드는 순간 당신도 에테르를 몽땅 빨린 세계수의 꼴이 날 수 있으니까요.]
왠지 정보창의 말투가 평소랑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이 단탈리온을 뭔가…… 징그러워하는 느낌?
뭐, 내 기분 탓이겠지.
“대충 알았다. 너에 대해서.”
- 그러시군요! 역시 그 만나기 어렵다는 교도관장과 독대하신 분답습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정확히 뭔진 모르겠다만 그게 도서관과 비슷하다고 하면…… 넌 거기 한 켠에 꽂히고 싶다는 거잖아?”
- 맞습니다. 혹자는 저를 두고 ‘전지무능(全知無能)’의 마도서라고 하던데요. 한 글자도 맞는 게 없는 오해입니다!
단탈리온은 전지무능이란 평가가 왜 틀렸는지 내게 구구절절 설명해주었다.
100만년의 역사를 저장용량의 한계 없이 품을 수 있는 뛰어난 검색엔진.
하지만 단탈리온은 에테르에 코드로 압축돼 있는 정보 중 ‘과거에 일어났던 일’만 알고 있을 뿐 단 1초 뒤의 미래도 알지 못했다.
만약 녀석이 미래마저 알 수 있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아카식 레코드의 복사본이라 불리고 있었을 것.
즉, 반쪽짜리 전지.
그래서 단탈리온은 알고 싶어 했다.
‘과거가 이토록이나 고정되어 있다면, 미래도 고정되어 있지 않을까?’
그것은 각기 다른 세계의 마법사, 혹은 현자들이 밝혀내고 싶어 하는 궁극의 질문 중 하나였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존재에게 있어 자유의지란 실존하는가.
혹은 허상에 불과할 뿐인가.
- 우리는 운명이란 블록을 쌓아나가는 위대한 개척자인가. 아니면 그저 그 블록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인가.
그 열망은 푸르가토리움에 잡혀 들어오고 나서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감옥의 총책임자인 교도관장이 아카식 레코드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더 희열에 차게 됐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또 깨닫게 된다.
이 감옥을 나가선 안 된다.
형량이 하루하루 줄어들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녀석은 스스로를 백묘탑의 마법서고에 봉인시켰다. 세계와의 교류를 스스로 끊어서 형량을 ‘정지’시킨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 아카식 레코드로 절 인도해줄 안내자를 만나기 위해서.
“내가 그 안내자가 돼달라는 거야? 흐음. 하지만 난 교도관장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놈을 쳐죽이고 싶은 게 내 소원인데.”
- 괜찮습니다. 필멸자가 교도관장에게 해를 끼칠 수야 없으니 당신과 붙어 다니기만 하면 저는 언젠가 숙원을 이루게 될 겁니다.
“이 자식, 말 얄밉게 하네. 너 체력이 1이던데. 내가 부욱 하고 찢어버리면 죽는 거 아니야?”
- 그렇습니다. 당신 같은 뛰어난 수준의 전사가 아니라 평범한 어린아이도 절 소멸시킬 수 있지요.
새겨지는 글자에서 뭔가 당당함이 느껴졌다.
- 그러나 제겐 쓸모가 있습니다. 전지무능이 틀렸다 했지요? 네. 저는 전지적 존재가 아닙니다만 결코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시험해 보십시오, 박상식.
“그래. 시험이라…… 방금 뭐라고?”
-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물론 육체는 슈바인 스트링거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나 저는 에테르의 코드를 읽는 자. 영혼과 육체가 불일치하고 있는 존재라면 응당 영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까지 이 감옥에서 내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내 본명을 입에 담은 녀석은 교도관장과 단탈리온, 둘뿐이었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이런 수준의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교도관장에게 빅 엿을 한 방 먹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단탈리온의 말대로 몇 가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좋아. 묻겠어. 이 마법서고에 있는 책의 개수는?”
- 이곳엔 저를 포함해 총 12,026.5권의 서적이 있습니다.
“왜 소수점이 나와?”
- <마녀의 황금 침실 3권>의 페이지 중 절반이 뜯겨 나갔거든요. 노골적인 묘사가 담긴 페이지들만 골라서. 꼬타루수라는 남성 마법사의 소행입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50만큼 가져갑니다.]
으흠. 지식을 알려주는 대신 마력을 대가로 가져가시겠다?
다행히 난 마력통의 사이즈라면 백묘탑 전체에서 손에 꼽힌단 말이지.
“그럼 다른 질문. 백묘탑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어?”
- 8서클 대마법사 로리앙이 설계한 영구마법진 때문입니다. 본래대로라면 3서클 마법사 32명이 하루 종일 마력을 불어넣어야 유지 가능한 마법진이지만 삼월초원의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께서 권능을 빌려주고 계십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300만큼 가져갑니다.]
교도관이란 항목이 들어가서일까. 답변의 단가가 좀 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센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나는 탈옥할 수 있어?”
- 그것은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 저는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하니까요.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1만큼 가져갑니다.]
“모른다는 대답도 MP를 가져가? 수전노 책 같으니.”
- 죄송합니다. 제 의지라기보단 계약 같은 거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러면 푸르가토리움의 역사상 가장 탈옥에 근접했던 죄수는 누구야?”
- 르팔타커스 시온이라는 전사입니다. 0층 대기실에서 당신이 만난 위대한 영령이지요. 그는 9층까지 올랐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10만큼 가져갑니다.]
“제법 중요한 정보 같은데 이번엔 또 10만큼만 가져가네?”
- 당신이 알고 계신 정보를 재확인하는 거니까요.
“흐음, 그렇군. 천마 류운학과 마녀 일레인 쿠디슈 중 누가 더 강하지?”
그건 이번 층 공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으며, 현재의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 알려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만큼의 대가를 갖고 있지 않거든요.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12,000만큼 가져가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갑니다.]
젠장. 뭔 질문 하나가 이렇게 비싸.
아마 교도관장이나 다른 교도관이 정보 열람을 막고 있는 모양이군.
그러면 내가 알고 싶은 것 중에서 그렇게 비싸지 않은 질문엔 뭐가 있을까.
“……내 여동생 상희는 지금 뭘 하고 있어?”
- 지구라 불리는 행성의 대한민국은 현재 저녁 8시 45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인간 박상희는 485번 버스에서 졸고 있습니다.
“존다고? 틀렸어! 상희는 ‘그 사고’ 이후로 차 안에서 절대 잠들지 않아!”
- 아르바이트에 대한 피로 때문입니다. 현재 그녀는 등록금 대출을 메우기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와 닭갈비 매장의 주방 보조를 겸하고 있거든요.
“……제기랄. 알았어. 충분해. 그만하면 됐어.”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280만큼 가져갑니다.]
상희야.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
앞치마를 입은 채 커피머신의 노즐을 붙잡고 있는 상희의 모습, 그리고 닭갈비를 굽는 불판을 철 수세미로 긁어내고 있는 상희의 모습이 내 뇌리를 지배했다.
상희의 모습을 한 심마가 칼로 내 목을 찔렀을 때보다 더한 아픔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 아앗, 조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하마터면 단탈리온의 펼쳐진 종잇장을 구겨버릴 뻔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평정을 되찾자 녀석은 다시 글씨를 보여주었다.
- 자,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절 품고 다니시는 것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되지 않으셨나요?
뭐, 괜찮지 않을까?
사용하기에 따라서 앞으로의 탈옥에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수틀리면 버리면 되지, 뭐. 살아 있는 놈도 아니니 죄책감도 없을 거다.
나는 그렇게 단탈리온을 갖기로 결심했다.
- 감사합니다, 주인님!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방금 주인님께서 저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는 걸 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17초 전까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었지요.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미래는 제 지식 밖의 영역이거든요. 하하핫.
“널 어떻게 갖고 다니면 되지?”
- 주인님의 인벤토리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언제든 저를 꺼내실 수 있지요.
“좋아. 네가 숙원을 달성할 때까지 마음껏 이용해 주마. 아이템 수납.”
내가 명령어를 읊자 검은 가죽으로 된 양장본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손바닥 위에서 사라졌다.
단탈리온.
무려 21만년의 형량을 가진 일기장.
사방세계 최악의 금서.
그렇게 나는 어마무시하게 무서운 책을 득템하게 됐으며, 수업시간에 늦은 죄로 무지막지하게 무서운 마녀에게 혼구녕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