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마교 서열전 (2)
나는 이를 악문 뒤 검에 몸을 맡겼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혈룡굉월참(血龍宏月斬)]
무엇이든 물어뜯으려는 기세의 붉은 용. 그 용의 이빨 형태를 한 검기가 십자로 융합한 참격과 허공에서 충돌했다.
꾸아아아아아앙!
나와 귀검신녀는 폭발의 여파를 정면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나는 다급히 천근추의 묘리를 써서 수직 낙하로 충격파를 피해냈다.
착지하자마자 위를 쳐다보니 귀검신녀는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은 채 천천히 내려서고 있었다.
충격파를 피하지 않고 일검에 잘라 내버린 것이다.
‘아직은 안 되겠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가 전력의 절반도 내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반면에 이쪽에선 몸에 과부하가 크게 걸리는 기술로도 타격을 주지 못했으니.
더욱 큰 기술을 써서 귀검신녀 딜라스틴을 몰아세울 순 있겠지만 제대로 된 데미지를 줄 자신이 없었다. 싸우기 전엔 몰랐으나 일합을 나눠보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근력: 189], [민첩: 157]
[MP: 3,205/7,510]
87명의 교도를 쓰러트려 근력과 민첩 수치를 2배 가까이 끌어올렸다. 만족할 만한 성과.
게다가 MP가 딱 절반 남았다.
참월의 마녀에게 수업을 받으려면 여기서 멈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쉽지만 여기서 파장을 해야겠군.
“신녀님, 제가 졌습니…….”
그렇게 패배를 선언하려 할 때, 딜라스틴이 손을 내밀어 나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검을 집어넣은 뒤 내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하지, 일공자.”
“네? 뭘 사과한다는 거죠?”
“원래 귀혼오마는 서열 10위 바깥의 교도와 비무가 금지돼 있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 크게 나서 자칫 사고가 일어나면 마교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 알고 있었네만 본녀가 인내심이 없어 끼어들고 말았군. 이 대결은 무승부로 해두지.”
무승부?
계속 싸웠어도 내 쪽이 이길 확률은 희박하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내 의문을 귀검신녀가 풀어주었다.
“방금 교주님께서 내게 전음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보름. 교주님께 보름만 드리면 공자를 우리 귀혼오마마저 위협할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으시겠다고.”
화들짝 놀라 천마가 앉은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류운학은 팔짱을 낀 채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 음흉한 양반.
보름 동안 날 얼마나 닦달하려고.
“본녀가 수탉이 되기도 전 병아리의 목을 칠 뻔했군. 기쁜 마음으로 후일 못 다한 승부를 맺도록 하지.”
“어, 어쨌든 목은 칠 거라는 거네요?”
귀검신녀는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그녀가 가는 길에 교도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다들 나에게 두들겨 맞아 부어터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천마가 귀검신녀 쪽은 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전음이 아니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신녀야, 너무 들떠있지는 마라. 네가 오늘 자르지 않은 병아리는 수탉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니라.”
천마가 내공을 실어 장내의 모든 교도들에게 선포했다.
“저놈은 봉황이 될 거야.”
*
마교의 서열전으로 나는 몇 단계나 높은 무력을 얻게 되었다. 공식 서열은 28위였지만 귀검신녀의 난입으로 중단된 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10위권의 강자와 맞붙어도 지진 않을 만큼의 자신감이 붙었다.
‘흐음, 이 정도면 난 무공에 더 맞는 체질인 거 아닐까.’
쌍마대전의 진영 선택.
천마신교의 선봉에 서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때쯤.
백묘탑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이템’을 줍게 되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곁으로 순간 이동.”
참월의 마녀와 약속한 수업 시간.
나는 평소처럼 백묘탑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마왕 곁으로 순간 이동했다.
“어? 어디야, 여긴?”
그런데 처음 보는 풍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까마득한 천장까지 높이 솟아 있는 수백 개의 책장. 그런 책장마다 꽂혀 있는 수천 개의 두툼한 서적.
색깔과 형태가 저마다 달라 형형색색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곳은…….
“백묘탑 66층의 마법 서고다, 용사.”
제르비어스는 여러 권의 책을 옆에 쌓아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은 빠르게 활자를 훑고 있어서 내 쪽엔 전혀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다.
난 녀석에게 걸어가며 설명을 요구했다.
“왜 약속 장소에 있지 않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인마.”
“네가 두 절대자에게 사사받는 동안 멍 때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백묘탑을 돌아다니다가 이런 흥미로운 곳을 발견했지.”
책장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은 마법 술식이 정리되어 있는 마법서적들이었다. 한 권을 빼서 먼지를 털어내니 난생 처음 보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하지만 교도관이 걸어준 통역 마법 덕분에 그 문자의 뜻을 해독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광자마법개론’
책에는 빛을 다루는 마법인 광자마법의 이론과 응용법, 각종 마법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용사가 만진 아이템의 주인은 현재 푸르가토리움의 죄수목록에 올라 있지 않습니다. 그는 형량을 마치고 출소한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아이템이므로 인벤토리에 수납이 가능합니다.]
다른 서적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암흑괴수대백과.’
‘하늘 섬의 약초보감.’
모두 내 인벤토리에 합법적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책을 집필한 죄수가 더 이상 감옥 안에 없어 소유권이 소멸된 것이다.
‘출소라니.’
보통 2층 죄수들의 형량은 삼사백 년을 훌쩍 웃도는데. 그런 죄수가 최소한 수천 명 지나간 것이라면…… 대체 이 서고는 몇 년 동안이나 여기에 있었던 거야?
거기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흐음, 그렇군. 좋은 통찰이 담겨 있도다.”
제르비어스는 여전히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흑색 마갑을 절그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고 있는 마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이 녀석을 너무 신경 안 쓴 건가.’
어쩌면 녀석은 녀석 나름대로 우리의 탈옥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강해질 방도를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마법서를 읽어도 마법을 익힐 수 없는 나와는 달리 마족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이곳까지 당도한 게 아니겠는가.
천마와 마녀의 스킬을 빌려올 수 있는 나와는 다른 것이다. 마왕의 말마따나 ‘기연’은 용사인 내게만 주어졌으니까.
‘괜스레 미안해지려고 하네.’
나는 기특한 마왕에게 다가가 녀석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살폈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제목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순간,
마왕의 뿔을 뽑아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대마도사의 부적절한 성인식 7권
부제: 절륜 골렘과 금단의 하룻밤>
이, 이 상또라이가…… 지금까지 뭘 읽고 있었던 거야?
내 시야는 자연스레 녀석이 한켠에 쌓아두고 있던 책들의 제목들로 향했다.
<마녀의 황금 침실 6권
부제: 흡혈 공작을 함락시키다>
<마왕님이 너무 잘함 3권
부제: 분신술과 하는 건 처음이라>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야 이, 망할 새끼야! 뭘 처보고 앉았나 했더니 야설을 수집하고 있었어어??”
“음? 방금 그 말은 옳지 않다, 용사.”
“뭐가! 누가 봐도 음란한 야설이잖아!”
“<마녀의 황금 침실>은 수려한 그림과 연출이 일품이야. 즉, 만화책이지. 야설이 아니라 색화첩이라 해야 옳다.”
“그래, 오늘 이 색화첩으로 좀 맞자.”
나는 <마녀의 황금 침실 6권>을 집어 들고 내공으로 그것을 감싸 마왕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뻐어억.
“끄아아악! 뭐냐! 왜 이렇게 아픈 거야?”
“네가 이 서고에서 야설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이 용사님은 깨달음을 얻고 더 강해졌거든. 이제 반성이 좀 되냐?”
제르비어스는 정수리에 혹이 솟아오르는 것도 아랑곳없이 항변했다.
“용사,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2층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는 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양 진영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그래서 내가 이 개고생을 하고 있잖아. 마공도 익히고 마법도 공부하면서!”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상대의 전략과 전술에만 통달하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진정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문화’를 알아야 해. 무엇에 즐거워하고 무엇에 화를 내는지. 인간의 오욕칠정과 희노애락의 정수는 마법이론서에 담겨 있지 않아. 칼과 지팡이가 서로 부대끼는 이런 가상의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는 법이지.”
“살과 살이 부대끼는 이야기겠지, 자식아.”
그러자 마왕은 억울한 듯 한 권의 책을 내게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 <흑기사 연대기>를 추천하마. 여인의 몸으로 흑기사가 되어 제국을 제패하는 남장여자물로서 드라마틱한 서스펜스와 액션의 카타르시스가…….”
“아, 됐어 인마. 평화로운 시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내 처지는 일 분 일 초가 아깝다고.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읽고 있을 때가 아냐.”
나는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흑기사 연대기>를 마왕의 가슴팍에 던져두고는 돌아섰다. 참월의 마녀와 약속한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너 어디론가 이동할 때 귓속말로 보고해라. 알았어?”
“아, 귀찮은데. 마왕군 수석비서관조차 내게 그런 걸 강요하진 못했단 말이다.”
“여기가 서고 깊숙한 곳이라서 망정이지, 다른 마법사한테 순간 이동하는 장면을 들키면 난감해진다고. 마법진도 없이 순간 이동을 쓴다? 너와 내 눈알부터 해부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지. 눈알을 해부당하면 <마왕님이 너무 잘함>의 다음 권을 볼 수 없으니까. 알았다.”
어쩐지 흐름이 이상한 쪽으로 기운 것 같지만 확답을 받아낸 나는 돌아섰다.
서고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모퉁이를 두 번 돌았을 때 기묘한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건 나도 모르는 사이 무극파천공의 심법이 몸에 돌고 있어 기감이 평소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장악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여기 뭔가가 숨어 있다?’
은둔하는 자객의 존재를 알아채는 무인의 육감. 나를 사로잡는 느낌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내가 멈춘 곳은 출구의 반대편, 마법서고의 가장 깊숙한 낡은 책장이었다.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요리조리 살폈지만 누군가 숨어 있는 기척은 없었다.
‘분명 여기인데. 어째서 이 책장에서만 유독 쌔한 느낌이 나지?’
내게는 용사의 심안이 있다. 감옥에서 처음 보는 죄수들을 포착하게 되면 상대의 이름과 종족, 레벨과 배경까지 요약된 설명문이 뜬다. 교도관장이 내게 주는 특혜 중 하나.
이건 그 설명문이 뜨려는 감각과 비슷했다.
“한 권씩 꺼내볼까.”
마녀 일레인 쿠디슈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겠지만 왠지 이 기묘한 감각의 정체를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난 낡은 책장의 좌측 상단에서부터 Z자 순서로 책자를 살펴나갔다.
그러던 와중.
세 번째 단에 놓인 검은 가죽 양장본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경고! 용사가 봉인당한 존재와 접촉하였습니다. 판독에 시간이 걸립니다.]
오호, 당첨인가.
내가 당장 검은 양장본을 내던져버리지 않았던 데엔 이유가 있다. 이 책에서 물리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고급 양피지를 쓴 것처럼 보이는 책에는 아무런 글귀도, 삽화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냥 텅 빈 백지였다.
“뭐야? 아무것도 안 적혀 있잖…… 응?”
분명 깨끗한 백지였는데 종이 속에서 검은 연기가 모여드는 것처럼 글자를 만들어냈다.
- 어떻게? 대체 어떻게 가능합니까.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어떻게 널 찾았냐고? 흐음, 그냥 직감이었는데.”
시험 삼아 대꾸해보자 원래 만들어진 글자가 재빠르게 휘발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글자가 모여들어 내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 직감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인식하자마자 절 찾을 수 있도록 유인한 거 모르시네요.
“아, 그런 거였구나?”
- 어쨌든 제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당신 필멸자 아닙니까?
필멸자라. 엄청 고풍스러운 단어네.
언젠가 죽게 되는 존재를 가리키는 거겠지?
“맞아. 그런데 왜?”
- 어째서…….
영문 모를 책이 만들어내는 글자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마치 사람이 다급하게 말하느라 말을 더듬는 것처럼.
- 필멸자인 당신에게서 아카식 레코드의 냄새가 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