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마교 서열전 (1)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4. ‘마교 서열전’]
[용사는 천마의 제자가 되었으나 아직 천마신교 전체의 인정을 받진 못했습니다. 그들이 거하는 귀혼산에선 일 대 일로 붙어 서열을 확정하는 율법으로 돌아가지요. 이제 용사의 서열이 어느 정도인지 당당히 증명할 차례랍니다.]
[기한: 3시간]
[보상: 교도 한 명을 꺾을 때마다 근력 +1, 민첩 +1]
[서열 30위 안에 못 들 경우: 돌발 퀘스트 #5.과의 연계 불가.]
호오. 분명 짭짤한 퀘스트다.
실전을 거치면서 무극파천공에 대한 숙련도 또한 오를 테니 절대 거부할 수 없는 퀘스트였다. 게다가 처음으로 연계 퀘스트에 대한 힌트도 나왔다.
아마 마교에서 힘깨나 쓴다는 공인을 받아야 다음 퀘스트에 투입될 자격이 생긴다는 거겠지.
좋아.
역시, 엘릭서를 아낄 때가 아니다.
나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물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HP와 MP가 최대치까지 차오릅니다.]
[HP: 9,999], [MP: 7,510/7,510]
엘릭서는 향수병 같은 플라스크에 담겨 있었다. 빨간 물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달콤한 맛이었다.
각화도객과 풍뢰군은 걸어 다니는 송장 같던 내 혈색이 순식간에 회복되자 움찔한 듯했다. 저들끼리 뭔가를 수군거리기까지 한다.
반면 천마 류운학은 호기심에 눈을 빛낼 뿐이었다.
“제자야, 방금 삼킨 것이 무엇인고? 네가 있던 세계의 영약이냐?”
“뭐, 비슷한 겁니다. 그렇게 탐내셔도 못 드립니다. 절 죽여서 품을 뒤지신다 한들 안 나올 테니 미련을 버리십시오.”
“쯧. 본좌를 뭘로 보고 망발이냐. 싸움터에서 내력이 바닥나면 이 몸에겐 천마흡성대법(天魔吸星大法)으로 진기를 회복하는 방법도 있느니라.”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깨버린 병조각은 이제 그만 쳐다보십시오. 사부님의 체통도 깨지고 있잖습니까.”
천마는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류운학 정도의 절대자가 내 약물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이 있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처음으로 실전에 나서는 제자의 긴장을 풀어주려 말을 붙인 것일 거다.
난 사내들의 이런 은근한 배려가 싫지 않다.
‘그러니 승리로 보답하겠습니다, 사부님.’
내 손엔 아직 천마가 빌려준 목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땅바닥에 푸욱 꽂아 넣고는 손을 까닥거렸다.
“자, 그럼 덤비십시오. 기간한정 선배님들.”
아무래도 나, 도발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보통 그런 녀석들이 귀혼산 대나무 숲의 거름이 돼왔거늘.”
일백의 마교도들이 내뿜는 투기가 순식간에 나를 옥죄어 왔다. 아마 삼월초원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나였다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내 중단전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내공을 믿는다.
각화도객의 뒤에 있던 한 교도가 걸어 나왔다.
“내가 먼저 나서지. 본인은 나찰대 소속…….”
“그만. 자기소개는 생략하지요.”
“뭐?”
“뒤를 보세요. 선배님들 숫자가 거의 일백입니다. 한 명당 10초씩 별호와 이름을 읊는다고 치면 제가 받아주는 것까지 20초. 백번 싸웠을 때 30분이 넘게 걸린단 말입니다. 저, 선약 있어요. 그냥 싸웁시다.”
물론 나는 용사의 심안을 통해 눈앞의 교도가 나찰대 소속 매화쾌협 천동룡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쾌검식을 주로 사용하며, 내공 수준은 내 5분의 1도 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절 쓰러트리시는 선배님의 별호만 듣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건방지다 느끼시면 이기시든가요.”
아예 나무 위에 걸터앉아 관전하던 천마가 호탕하게 웃었다.
“발칙한 막내가 저리 지껄이는구나. 하지만 일리가 있다, 아우들아. 싸우기 전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그건 정파 놈들이나 하는 가식에 불과할 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들으셨지요? 덤비십시오.”
“이 자식이!”
천동룡이 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그걸 싸움을 시작하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빛살처럼 찔러오는 그의 검로에 집중했다. 천마의 위협적인 맹공을 계속 받아오던 내겐 쾌검은커녕 둔검으로만 느껴졌다.
휘익!
난 여유롭게 그의 일격을 흘려낸 다음 텅 빈 복부에 ‘화화적양장(化華赤陽掌)’을 적중시켰다.
빠아아아악!
천동룡이 검을 놓치고 날아갔다. 나는 일격에 기절해버린 그의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바닥을 털었다.
[용사는 이제 천마신교 서열 389위가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근력과 민첩이 1씩 오릅니다.]
좋아.
저 메시지를 상대의 전투불능 표식으로 삼으면 편리하겠군.
“자, 다음 상대 나오십시오. 분위기 살피지 마시고 나다 싶으면 튀어나오세요.”
그렇게 나는 천마신교의 교도들을 후두려까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싸울 것인가 결정하는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모여 있는 자들 중에 다음 서열이 누구인지 교인들은 서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용사는 이제 천마신교 서열 251위가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근력과 민첩이 1씩 오릅니다.]
일류 고수 정도가 펼치는 공격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물론 상대가 나를 웃도는 근력 수치와 민첩 수치를 갖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무극파천공의 심법을 터득했기에 일시적으로 각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순간적으로 주먹의 용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으며, 그 와중에 두 눈은 상대의 호흡을 읽어 공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용사는 이제 천마신교 서열 189위가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근력과 민첩이 1씩 오릅니다.]
서열이 높아지면서 일격에 제압할 수 있는 상대는 드물어졌다. 용사의 심안이 알려주는 정보로도 뚜렷한 약점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그런 자들과는 검격을 나누면서 상대의 버릇과 허점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용사는 이제 천마신교 서열 64위가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근력과 민첩이 1씩 오릅니다.]
두 자릿수 서열의 죄수들은 절정의 문턱에 올라 있는 고수들이 많았다. 허초를 즐겨 쓰는 데다 관전하는 동안 내 버릇을 관찰했는지 최초의 출수부터 급소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다.
[용사가 일격을 허용했습니다.]
[HP: 6,472/9,999]
늑대의 습격처럼 패도적인 백랑도법에 어깨를 뜯어 먹힐 뻔했다.
유운검법은 부드러움 속에 벼락같은 살초를 숨겨두고 있었고,
태극금나수에 붙잡혔을 땐 혈맥째로 팔이 날아갈 뻔했다.
‘힘들어 죽겠는데…… 너무 재밌잖아?’
꼭 한 명, 한 명 꺾을 때마다 스탯이 증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
나를 흥겹게 만드는 것은 마치 체스나 장기를 두는 것처럼 상대의 패를 분석하고 내가 수립한 전략이 먹혀들었을 때 느끼는 원초적인 승부의 쾌감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웃고 있었나 보다.
다시 천마가 전음을 보내왔다.
- 안목이 높아진 것이다, 제자야.
- 네, 사부님?
- 녀석들은 지금 필사적으로 널 꺾어버리기 위해, 자기의 서열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생의 무학을 다 꺼내들고 있노라. 절기를 펼치는 것도 아끼지 않고 있지.
- 맞아요. 그래서 죽겠다고요.
- 그런 놈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고? 본좌의 눈엔 산해진미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눈이 높아졌으니 새로운 초식을 볼 때마다 개안하게 되는 법. 너 역시 지지 않기 위해, 본좌가 알려준 묘리들을 실전에 응용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지 않느냐.
- 맞아요. 칼날 위를 달리는 느낌입니다.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바로 발목이 잘려나갈 것 같다고요.
- 그 느낌을 잊지 말거라, 제자야.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나 수라장 한가운데 있느니. 본좌가 네 스승이다만 칼을 맞부딪치는 모든 상대가 네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천마의 말이 맞았다. 온갖 고수들의 맹격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내 몸에 잠들어 있던 본능이 계속 껍질을 깨려 용트림을 하는 게 느껴졌다.
“마교 서열 28위 각화도객이다.”
“아 거참. 별호는 생략하자니깐, 말 안 들으시네.”
투덜대곤 있었지만 나는 그의 서열을 입 속에서 굴려보고 있었다. 28위라. 그렇다면 이놈을 꺾으면 30위 안으로 서열을 올리라는 퀘스트 조건은 달성하게 된다.
잡념이 들어서일까.
스파앗!
그의 일검이 내 왼쪽 팔을 스쳐지나갔다. 깊이 베이진 않은데다 통증도 옅어 곧장 반격에 들어가려는데,
각화도객의 웃음소리와 함께 왼쪽 팔의 상처가 달아올랐다. 국화 모양의 종양이 상처에서 피어나 움직임을 제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사가 적의 스킬에 당했습니다. 내공 운용의 흐름이 뒤틀립니다.]
검이 닿은 곳에 꽃을 새긴다.
그래서 각화(刻化)도객이군.
마치 한쪽 팔을 묶고 권투를 해야 하는 기분이었다.
“어떠냐. 여기서 네놈을 멈춰 세우겠다. 천마신교의 체면을 위해서 말이지.”
“체면 꺼내드는 놈한테는 절대 질 수 없습니다.”
“방금 놈이라 하였느냐?”
“거 봐요. 체면 차리느라 제가 던진 덫에 걸린 줄도 모르시잖습니까.”
내가 진기를 끌어내 구사한 ‘천마회선장’, 휘어져 돌아가는 장풍이 그의 뒤통수에 적중했다.
“끄어어억.”
각화도객의 스킬은 시야에 들어온 부위에 피격되는 마공이었던지 그가 의식을 잃자 왼팔에 핀 국화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짜식. 검상으로 종양을 피워내는 척 이중교란을 했던 거군. 하긴 기술의 발동원리까지 적수에게 알려줄 필욘 없다.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그렇게 혈전 끝에 각화도객마저 쓰러트렸을 때 새로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무(武)에 대한 당신의 깨달음이 깊어집니다.]
[파천황의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이 Lv. 3으로 오릅니다.]
무극파천공의 레벨이 아니다. 만전불패의 체술, 내가 감옥에서 빌린 첫 번째 스킬의 레벨이 덩달아 올랐다.
확실히 이전보다 반사신경, 호흡법, 사고의 속도가 한 단계 뛰어오른 게 느껴졌다.
쾌속 성장이 주는 충만함.
마교의 서열전에서 나는 계속 허물을 벗고 있었다.
“그만. 계속 보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려서 큰일인 걸.”
회색 피부에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귀검신녀 딜라스틴이 목검을 뽑아든 채 장내에 난입한 것이다.
귀혼오마 중 일 인. 마교 서열 3위의 강자가 나서자 다른 교도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본녀가 공자의 일검을 받아보고 싶다. 괜찮겠지?”
“후욱후욱. 며칠 전에 교주님께 도전했다가 호된 꼴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달빛 한 번 받으면 어지간한 상처는 회복된다. 즉 막내가 걱정해줄 정돈 아니야. 하긴, 이젠 막내가 아니라 서열 28위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천천히 내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아직 체력은 절반 정도 남아 있고, 집중력 또한 쌩쌩하다. 문제는 상대가 지금껏 검을 나눠본 상대와는 차원이 다른 ‘절정 고수’라는 점.
연계 퀘스트를 받아낼 자격 또한 달성했으니 사실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무리를 해보고 싶군.’
쌍마대전의 선봉장에 서서 마법사들을 쓰러트리고 다녔던 귀검신녀. 그녀의 수준이 어떠한지 손수 체험해보고 싶었다.
“좋습니다. 한 수 부탁드리지요.”
나는 서열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검을 잡은 채 포권했다. 초장부터 전력을 다하겠다는 나름의 다짐이었다.
그레이엘프가 기수식을 취했다.
“그럼, 간다.”
우아한 조각상처럼 보이지만 나는 저 검 끝이 휘둘러졌을 때 지형이 바뀌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칼에 담긴 혼령들에게 무공을 배운 검객.
딜라스틴이 날아올랐다.
거리를 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직감이 들자마자, 나 역시 땅을 박찼다.
[천마어기행공(天魔御氣行功)]
내가 천마의 경공법을 그대로 따라 쓰자 딜라스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마도 내가 교주의 제자가 될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고 생각할 터다.
그리고 그 자격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확인하려 들겠지.
쐐액! 쐐애액!
귀검신녀가 내쏜 두 방의 ‘귀영풍참’이 십자 형태를 그리며 내 몸을 덮쳤다.
시야가 느려진다.
반대로 생각의 속도는 높아진다.
뒤늦게 따라붙은 귀영풍참의 속도가 조금 더 빠르다. 내 몸에 닿는 순간 두 개의 참격이 융합해 곱절의 파괴력을 터트릴 것이라는 게,
확장된 감각 속에 포착되었다.
‘전력으로 되받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