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한 명의 제자, 두 명의 스승 (3)
마녀의 초록색 눈이 나를 꿰뚫고 있었다. 경험상 이럴 때엔 내 쪽도 각 잡고 대답해야 한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서 답을 내놓았다.
“무척 희박하겠죠?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
“좋은 대답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렴? 갑자기 내가 있는 이 지점에 국소적인 벼락이 스무 번 때려 날 죽일 수도 있다. 우주를 떠돌던 질병이 운석에 묻어와서 이 순간 내 앞에 떨어져 내 호흡기를 정지시킬 수도 있지. 어떠니. 그렇게 된다면 내가 마법을 펼치기 전에 너는 산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너무 터무니없이…….”
“터무니없이 낮은 확률. 하지만 결코 그 확률이 제로는 아니야. 제로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단다, 형제여. 우주에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따윈 없어. 0.000001퍼센트의 확률이라도 존재하긴 한다는 거지.”
어? 뭔가 알 것 같은데.
“그 희박한 확률이 현실화되는 걸 목도할 때 범인(凡人)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단다. 하지만 극소수의 천재들은 마나의 흐름과 우주의 법칙을 자신 쪽으로 끌어와 그 확률을 99.99%까지 높일 수 있어. 우리 마법사들이 ‘술식’이라 부르는 것이지.”
“기적처럼 일어나는 마법의 이면엔 술사의 완벽한 계산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거군요.”
“후후후. 그래서 마법사는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인간은 파악해낼 수 없는 영역까지 들여다볼 줄 아는 통찰력과 순간순간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량을 개별적으로 다루면서 수치를 암산해내는 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천재들의 분야라 하는 것이지.”
말만 들어도 어지러워진다.
수능 이후 수학과 담을 쌓아버린, 내면은 평범한 지구인에 불과한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수학과 통계를 다시 파?
그것은 조금도 영리한 전략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감각에 맡겨보면 어떨까.’
나는 지금껏 무수히 많은 게임들에서 다양한 컨트롤러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 시스템에 본능적으로 잘 적응하는 일종의 ‘육감’이 있다.
좌표 지정을 수학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빅 데이터를 갖고 있는 내 경험과 뇌를 믿고 휘둘러본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스승님.”
나는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마나의 흐름을 온몸에 맡기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좌표를 계산하려 하지 않았다. 아예 ‘좌표’란 개념을 뇌에서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느껴보자. 정보를 일순간에 받아들여 최적의 경로를 짚어내는 거야.
[그래비티 봄!]
꽈아아아아앙!
50미터 전방의 허공에 떠 있던 더미 인형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중력의 방향을 한 점의 외부로 방출시키는 마법 술식을 제대로 성공시킨 것이다!
[친구의 스킬에 대한 숙련도가 오릅니다.]
[중력 마법이 Lv. 2로 오릅니다.]
“해냈습니다! 스승님!”
내가 활짝 웃으며 돌아보자 마녀는 입을 쩍 벌린 채 더미와 날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건 그냥 스킬을 따라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는 방금 진짜로 마법이 일어나는 과정 전체를 습득했고, 올바른 과정을 밟아 그것을 마무리 지은 거니까.
“……수식을 계산한 것이냐?”
“아닙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정확하다고?”
“정확히는 계산하지 않고 느껴보려 했습니다. 좌표가 생성되어 마땅한 지점이 어디일지.”
잠시의 침묵 후.
마녀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천재를 뛰어넘는 귀재로구나, 귀재야.”
*
마녀와의 수업 시간은 학구적이었다. 술식을 시전하는 시간보다 그 원리를 설명하고 내 잠재력에 대해 같이 탐구해보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하지만 천마 류운학과의 수련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직접 몸을 쓰는 걸 즐겼다.
“제자야, 원하는 만큼 검기를 뽑아보거라.”
복마전의 최상층은 마음껏 연공 수련을 하기엔 좁았기 때문에 우리는 널찍한 공터에 나와 있었다. 몇몇 마교도들이 흥미를 가진 채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하아아아압.”
나는 그의 요구대로 천마에게 빌린 목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50센티미터에 불과한 목재 검신에서 그 세 배에 달하는 푸른 검기가 뽑아져 나왔다. 이렇게 적당한 크기를 유지하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
“좋군. 이제 본좌가 널 공격하마.”
“네에? 선공을 하신다고요? 으아악!”
섬전같이 내달려오는 천마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영격했다. 그의 왼쪽 어깨를 거침없이 베어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공격 궤적을 완벽히 파훼해서 거침없이 내 간격 안으로 들어왔다.
“물러서느라 중심이 흐트러졌다.”
뒷짐을 지고 있던 천마가 오른손 검지로 내 옆구리를 쿡하고 찔렀다.
“꾸에에에엑!”
나는 콘크리트 드릴에 갈비뼈가 우그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뒹굴었다. 어떻게든 목검만은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다잡고 바닥을 짚고 섰는데,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천마가 눈에 들어왔다.
“본좌 앞에서 나려타곤을 하면 어찌 된다 하였지?”
나는 황급히 진기를 뽑아내 기막을 만들어냈다.
[천마군림보]
천마가 땅을 찍어내리자 그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압력이 뿜어져 나왔다. 구경하던 교도들 중 내력이 약한 자들이 종잇장처럼 튕겨나갈 정도였다.
‘저게 어떻게 보법이냐, 핵폭탄 사기 공격법이지.’
가까스로 버틴 채 헐떡이는 내게 천마가 혀를 찼다.
“자아, 이제 네가 만들어낸 검기를 보거라.”
“허엇?”
그새 내 검기는 1미터 이하로 줄어 있었다. 불과 몇 초식 그와 어울리면서 집중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상대의 투로를 예측하고 짚어내는 너의 감각은 나무랄 데 없다.”
그것은 르팔타커스의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 Lv. 2’ 덕분이다.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천마의 투로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의 궤적에 내공 운용이 더해지는 순간 보고도 못 막는 공격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허나 검기를 뽑아낼 줄 안다고 해서 대단한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니라. 일단 지금의 네 방식은 공력의 낭비가 너무 크다. 커다란 기름통을 믿고 이리저리 불을 지르고 다니는 형국. 허나 더 높은 단계로 가려면 상대에게 공격을 적중시킬 때에만 발화점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태산만한 연료통도 언젠가는 바닥난다. 뛰어난 고수가 장기전으로 몰고 가면? 너는 필패하느니라.”
“그럼 어찌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차근차근 기초부터 수련하기엔 본좌의 성미가 급하구나. 본좌의 경우엔 숨 쉬듯이 그냥 이뤄진 부분이라 쉽게 설명해주기도 곤란하고.”
그가 이번엔 양손의 검지를 세워들었다. 탱크의 박격포 두 개가 날 겨누고 있어도 지금보단 덜 무섭겠다, 젠장.
“그러니 맞으면서 배우거라, 제자야.”
순식간에 사라진 천마.
마치 그림자를 떼어놓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신속(神速).
타격을 인식하기도 전에 내 턱이 돌아간다.
“무릎에 힘을 빼거라.”
천마는 손가락만으로 내 검격을 튕겨냈고,
“아니, 그건 그저 허벅지를 낮춘 것이잖느냐. 완전히, 생의 기운을 무릎에서 빼버리는 것이다. 극히 짧은 찰나라도.”
눈을 현혹시키는 허초에도 살기를 실었다.
“그러면 인체는 균형을 지키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 바로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지. 자연히 내력이 그 빈자리를 향해 움직이려 할 것이다.”
나는 검기의 형태를 유지하려 애쓰며 발악했다.
“마치 물이 빠지면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까?”
“그래, 그러하다. 그렇게 내공의 빈자리, ‘탈(脫)’을 자유자재로 배치하면서 공방의 흐름을 네 것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크윽. 아직 모르겠습니다!”
천마가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탄지공. 만약 내 점혈을 짚어서 제압하려 했다면 벌써 골백번은 죽었을 거다.
“보통의 내가기공법은 단전의 기운을 순환시켜서 일점에 집중시킨다. 물론 그 일점을 제외하고서도 전신에 육체를 가동시키는 최소한의 내공을 남겨놓고는 하지. 본좌의 무극파천공은 그 틀을 완전히 파괴한다. ‘최소한도의 공력도 남겨놓지 않는 것’. 그것에 통달하면 일갑자의 공력을 가진 자도 이갑자의 고수와 대등하게 맞붙을 수 있는 것이니라.”
“우엑. 하, 하지만 무공이란 게 그렇게 편리할 수만은 없지 않나요?”
“맞다. 반칙을 쓰는 자, 곧 벌칙을 받는 법. 육체가 그 주인에게 주는 벌칙은 무엇인고.”
“고통 아닙니까?”
“그러하다, 제자야. 이렇게 얻어맞는 아픔, 그리고 탈공을 시전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작용의 통증. 넌 이 둘에 익숙해져야 하느니라.”
아팠다.
몹시 아팠다.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이 무극파천공에 공명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해지고 싶었으며, 일주일 동안 마왕의 저주에 온몸을 적시는 과정에서 고통 속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데엔 제법 이골이 나 있었다.
[친구의 스킬에 대한 숙련도가 오릅니다.]
수련을 거듭할수록 땅바닥에 나뒹구는 횟수가 줄었다.
천마가 찔러오는 공격을 전부 흘려낼 순 없었으나 피격 부위에 내공을 모아 상쇄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그건 학습이라기보단 생존을 위한 발버둥에 가까웠다. 천마는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날 물 속에 넣고 내가 고개를 내밀 때마다 물 바깥에서 총을 쏴대는 방법을 썼다.
엄청 잔혹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무극파천공이 Lv. 2로 오릅니다.]
콰아아아앙!
천마와 난 목검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주변의 땅은 천마군림보와 마룡굉월참이 충돌한 여파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천마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늘어난 선의 움직임만 뒤쫓다가 두들겨 맞곤 했었으니까. 이렇게 그를 멈춰 세웠다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천마 류운학의 공세를 정확한 공력으로 받아쳤다는 뜻이었다.
“제법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구나, 제자야. 일취월장이란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성장 속도로다.”
“헉헉. 후, 훌륭한 사부님을 두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공방 속에서도 검기가 흐트러지지 않는 궤도에 올랐으니 내일부턴 더 박차를 가하겠노라.”
“바라는 바입니다!”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천마에게 포권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어디에든 드러눕고 싶었으나 참았다. 스승이 손수 제자의 경지를 끌어올려준 아름다운 상황에 널브러질 순 없었으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여유롭게 제자의 인사를 받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
“천마군림, 만마앙복!”
“미천한 교도들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어느덧 구름떼처럼 몰려든 교도들이 우렁차게 합창했다. 흘깃 보아도 백 명이 넘는 숫자였다.
음.
평소보다 구경꾼이 지나치게 많은데?
언제 저렇게 잔뜩 모여든 걸까.
“나찰대 각화도객(刻化刀客)에 뇌신대 풍뢰군(風雷君)까지? 무슨 일이냐. 너희들 잘 안 몰려다니는 녀석들이잖아.”
천마가 이렇게 묻자 이마에 붉은 띠를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나찰대의 삼조장 각화도객이었다.
“교주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협들이 이리 찾아온 것은 교주님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일공자 님께 청할 것이 있어서이옵니다.”
일공자.
마교의 적전제자이나 아직 후계자는 아닌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각화도객은 분명 공손한 말투를 하고 있지만 풍겨내는 기세는 흉흉했다. 힐끗 나를 노려보는 눈빛 또한 날카로웠다.
어? 이거 뭐지.
천마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허허, 이놈들. 귀여운 짓거리들을 하고 있구나.”
동시에 내 귓가에만 들려오는 목소리.
파천황의 권능인 ‘귓속말’이 아니었다. 이건 천마가 자신의 내공으로 펼치는 전음(傳音)이었다.
- 제자야, 이놈들은 너에게 시비를 걸러 온 것이다.
- 저요? 어째서죠?
- 왜긴 왜겠느냐. 녀석들 입장에서 넌 굴러들어온 돌인데 대뜸 천마의 옥좌 옆에 콱 하고 박혔으니 뿔이 난 거겠지. 잊었는고. 마교는 강자존의 세계인데 넌 아직 서열이 없잖느냐?
그사이 목재 망치를 어깨에 들쳐 둔 풍뢰군이 끼어들었다. 그는 점잖은 각화도객과 달리 무척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아, 형님. 요새 형님이 늘그막에 제자를 하나 두셨다고 시끌시끌하더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면상이 보고 싶어서 왔수다. 일단 입교를 한 이상 서열전을 치러 위아래를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수?”
흐음. 정말 속내가 그것뿐일까.
천마와 내가 야외 수련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야 나를 찾아왔다? 천마의 공격을 계속 버텨내느라 하필 내 체력과 마력이 바닥났을 때에서야?
- 옳다. 네놈이 약해져 있을 때 두들겨 패려는 거지. 어떻게 할 테냐.
- 저는 아직 사부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 그렇겠지. 그럼 오늘은 일단…….
- 그래서 빨리 해치워버리렵니다. 그 서열전이라는 거.
내가 앞으로 나서 일백의 수를 자랑하는 마교인들을 향해 선포했다.
“미욱한 막내로서 인사가 늦은 것에 사죄드립니다, 선배님들.”
“크하하. 제법 사내답구나.”
“단계를 건너뛰어 천마님께 무공을 사사받으니 선배님들께서 곤혹스러우셨겠지요.”
“어?”
쪼잔한 자식들. 무와 협을 숭상한다는 것들이 수련이 끝난 직후를 노려선 떼로 몰려 와?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HP: 285/9,999], [MP: 62/7,510]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이 광경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화룡도에서 올쿠레 어르신이 다른 방 죄수들에게 두들겨 맞았던 날이 떠올랐다. 녀석들도 7번 방의 모두가 자리를 비웠을 때 다리도 없는 노인을 습격했지.
그때의 나는 무력했지만,
이젠 아니다.
“그러니 선배님들께서 곤혹스럽지 않으시도록…….”
인벤토리에서 내가 꺼낸 것은 HP와 MP를 단번에 가득 채워주는 엘릭서(Elixir)였다. 용사의 창고에 단 5개뿐인 레어템. 하지만 아끼지 않으련다.
“오늘 여러분 모두를 제 후배로 만들어 드리죠.”
각오해라. 약빨이 뭔지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