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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41화 (41/300)

#041. 한 명의 제자, 두 명의 스승 (1)

“정녕 네가 일주일 전의 그 꼬마라고?”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내 주변을 돌면서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는 짙푸른 원시림을 닮아 있었고, 그 가운데의 검은 동공은 그 숲 속의 검은 호수와도 같았다.

그 호수에 지금 격랑의 파도가 일고 있다.

“분명히 작디작은 밀알에 불과했던 마력 회로가 지금은 전신에 퍼져서 맥동하고 있구나. 이적(異蹟)이다.”

세계 최고의 회화 감정사가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고흐의 숨겨진 그림을 발견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금 마녀의 심정과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은 내 몸으로부터 5센티미터의 간격만을 둔 채 그 윤곽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 섬세한 탐색은 코끝에서 시작해 목선, 그리고 배꼽으로 내려갔다가 내 손가락 마디 끝에서 멈추었다.

“록시탄, 드라이푸스. 너희들이 보기엔 어떠니?”

마녀의 두 심복은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차마 자신들의 탑주에게 거짓을 고하지는 못했다.

“마력 회로의 수준만큼은 저희 육망성의 형제자매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부엌 서랍에서 찻잔을 꺼내듯 마법진에서 운석을 꺼내드는 성운의 마도사는 이렇게 말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니. 인정하긴 싫지만요. 지난 번 방문 때는 분명 어떠한 마법적 속임수를 사용해 마력 회로의 크기를 숨겼던 것이 아닐까요?”

절대영도의 심처에서도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빙결의 마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녀는 요정 록시탄의 마지막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내저었다.

“멀쩡히 존재하는 마력 회로를 완전히 숨긴다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주 미미하게 느껴질 만큼 마력 회로의 존재감을 낮춘다는 건 마나와 술식에 대한 이해가 궁극에 닿아야 한단다. 그런 경지는 백묘탑의 그 누가 와도 불가능한 이야기. 심지어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들의 호들갑을 잠자코 들어주던 나는 당당히 입을 열었다.

“자잘한 눈속임 같은 꼼수는 쓰지 않았습니다. 세 분은 이곳 백묘탑을 지탱하는 거성들이신데 그런 분들의 눈을 현혹시키려는 시도는 어리석지요. 저는 분명한 ‘대가’를 치르고 마력 회로를 지금의 수준까지 올려놓은 겁니다.”

그것을 위해 나는 한 인간이 평생토록 겪을 수 있는 한계치보다 수십 배는 강렬한 저주 속에서 뒹굴었다.

허상 속에서 수천 번 다쳤고,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수만 번 죽었으며, 심마가 보여주는 트라우마가 숱하게 나를 꿰뚫도록 놔두었다.

“꼬마야, 쓸 수 있는 마법이 있느냐?”

“아니오. 없습니다. 그러니 마녀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내 당돌한 대답에 마녀는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유연했다. 한 번 상식을 깨트린 장본인 앞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은 ‘기대감’이었다.

“좋아. 너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노라. 그러면 이번엔 이쪽에서 내기의 패자답게 승복을 해야겠지. 꼬마야, 소원을 말하거라.”

“제 소원은 간단합니다.”

난 심호흡을 한 뒤 마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의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오호라. 그건 또 내 예상을 벗어나는 요구로구나. 제자로 받아달라는 말을 할 줄 알았더니?”

“물론 저는 마법에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마녀님의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하지요. 하지만 평범한 사제관계를 넘어선 우정을 바랍니다. 친우에게 마음을 쓰듯 제게 가르침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 친구란 단어, 허울이야 좋지. 그렇다면 너도 내게 무언가를 주어야 할 텐데? 마법을 모르는 네가 어떤 즐거움을 내게 줄 수 있겠니?”

비난이나 지탄이 아니다. 참월의 마녀는 잘 싸여진 선물상자의 포장 끈을 붙잡은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물론 내가 가리키는 것은 앤띠크 풍으로 장식된 벽지가 아니라 그 너머 어떤 ‘방향’에 자리 잡은 무력집단의 존재였다.

“쌍마대전에서의 승리. 그것을 마녀님께 드리도록 하지요.”

지켜보고 있던 록시탄이 성을 냈다.

“어머님, 말려들지 마십시오. 어떤 사악한 술수나 함정이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맙구나, 록시탄. 하지만 걱정 말거라. 설사 눈앞의 이 꼬마가 교도관의 화신체라 하더라도 날 함정에 빠트릴 순 없을 것이야.”

그것이야말로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오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일전에 말했듯이 이 여인은 잠룡. 언제든 똬리를 풀어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절대자다.

“좋아, 너의 친구가 되도록 하겠다, 슈바인 스트링거.”

띠링!

기분 좋은 효과음과 함께 내게만 보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죄수 일레인 쿠디슈가 새로운 친구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스킬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스킬의 위력은 시전자의 숙련도에 정비례합니다.]

나는 방방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제법 연기력이 필요한 대목이 시작될 테니까.

“스승님, 그럼 제자로서 첫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게 간단한 중력 마법 하나만 보여주십시오.”

“그거야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지.”

지팡이도 필요 없다는 듯 마녀는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작은 원을 그렸다. 그러자 앙증맞은 마법진에서 공기를 압축해 만들어진 기탄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나와 마녀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래비티 잽이란 것이란다. 중력 마법의 기본 술식 중 하나이지만 그 원리만큼은 심오한 이치가 담겨 있지. 앞으로 내가 원리부터 차근차근 너에게…….”

“아니오.”

나는 건방지게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어떻게 하는 지 알 것 같습니다, 스승님.”

“뭐라고?”

나는 그녀와 똑같은 동작으로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방금 무언가를 막 깨달은 신동의 눈빛을 간절히 연기하면서.

[친구 일레인 쿠디슈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그래비티 잽 Lv. 1]

슈우욱.

내 마법진에서 마녀의 것과 정확히 똑같은 크기의 기탄이 빠져나왔다.

이 스킬은 분명 상대를 원거리에서 견제하는 기술.

적중률을 높이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기탄을 눈앞에 띄워놓기만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굉장했다.

떨그렁.

성운의 마도사 드라이푸스가 자신의 지팡이를 땅바닥에 떨구는 소리였다. 그 행동을 나무라야 할 록시탄도 자신의 경악을 수습하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엘프가 화들짝 놀라면 귀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구나.

흐음, 짜릿해.

누군가를 기겁하게 만드는 건 왜 질리지가 않는 걸까.

“이, 이럴 수가.”

마녀, 방금 나의 스승님이 된 일레인 쿠디슈의 입 꼬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진정 사내가…… 중력 마법을 쓸 수 있었단 말이냐? 오늘 나의 세계관이 여러 번 찌그러지고 끝내 박살나는구나.”

“스승님.”

나는 내 어깨에 올려진 마녀의 손등을 살포시 손바닥으로 감쌌다.

“이제부터 박살날 것은 스승님의 세계관이 아닙니다. 바로 천마신교라는 한 종교집단의 명운이겠지요.”

마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공중으로 떠올랐다. 격앙된 9서클 대마법사가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발출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여, 자매들이여. 이제 길고 길었던 쌍마대전의 끝이 보이는구나. 나는 오늘 보물을 주웠다. 그리고 이 보물을 잘 키워내 반드시 다음 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

그렇게 나는 백묘탑의 대모인 일레인 쿠디슈의 제자가 되었다.

내일부터 하루 여섯 시간씩 그녀에게 마법 과외를 받기로 했다. 이로써 목표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이제는 나머지 절반의 목표를 ‘주우러 갈’ 시간이었다.

천마신교의 근거지인 귀혼산장으로.

‘하지만 예전처럼 걸어갈 수는 없을 거야.’

귀혼산의 초입엔 천마 류운학이 직접 만든 ‘광멸복마진’이란 것이 있다. 몸 안에 마법 서클을 새긴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방어진.

마녀의 중력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내게도 분명 그 서클이란 것이 생겼을 거다. 아직 스킬의 수준이 Lv. 1에 불과하니 1서클 정도겠지?

하지만 내겐 그 광멸복마진을 건드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곁으로 순간 이동.”

마왕은 귀혼산장 근처의 대나무 숲에 홀로 서 있었다.

녀석은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도 놀라지 않았다. 작전이 성공했느냐며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내가 무사히 녀석 옆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성공을 암시하는 거니까.

“해냈군, 용사.”

“응. 스승님이 어린애처럼 기뻐하시는 모습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아마 스승님께 꼬리가 있으셨다면 뱅글뱅글 돌았을 거다.”

“벌써 스승님이 된 거냐?”

“어. 그러니 다음은 사부님이 되실 분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우리 둘은 천마 류운학이 있는 복마전을 향해 걸었다. 대나무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었다.

복마전 최상층의 기와가 박살난 데다 그 틈으로 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저건? 누가 폭탄이라도 집어던졌어?”

“아니. 잠깐 기다려봐라. 그럼 어떤 상황인지 알게 될 테니까.”

제르비어스는 여러 번 본 풍경이라 전혀 감흥이 없다는 듯 심드렁했다.

잠시 후.

“꺄아아아아악!”

강렬한 폭음과 함께 복마전 최상층의 벽면을 뚫고 한 엘프 여인이 뛰어내렸…… 아니, 추락했다.

꾸우우웅.

우리가 서 있던 곳으로부터 5미터 지점에 추락한 그녀는 귀혼오마 중 일 인, 귀검신녀 딜라스틴이었다. 아리따운 엘프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코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천 년은 멀었느니라, 귀검신녀야. 그렇게 큰 공격을 휘두르면 허리가 빈다고 본좌가 늘 말하지 않았는고. 껄껄껄.”

천마의 목소리였다.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할 때는 다짜고짜 큰 초식을 휘둘러선 아니 되느니라. 자아! 다음은 누구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무척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은 음성에 섞인 웃음기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용사 네가 천마에게 맡긴 마검을 노리고 교도들이 계속 도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그래?”

“그래도 저 그레이엘프는 제법 오래 버텼군. 보통은 일격에 실신해버리던데 말이지.”

마왕이 설명하는 와중에도 나는 귀검신녀의 뒤집어진 흰자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거 죽은 거 아니야?

“아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교도들을 패고 있다. 다음 도전자가 또 냉큼 올라갈 수 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알았다. 제르비어스, 넌 여기에서 기다려.”

마왕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린 뒤 나는 귀검신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내가 일을 크게 만들었군요. 미안합니다, 귀검신녀. 하지만 오늘 이후로 이제 천마님께 두들겨 맞을 필욘 없을 거예요.”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복마전의 계단을 올랐다.

“마검은 내가 다시 찾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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