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내기, 하시렵니까 (2)
“뭬이야? 혈귀이이? 이 새끼가 혈귀 님이라고 해야지!”
마라혈귀가 분기탱천하는 것과 달리 천마는 여유로웠다.
“그건 이 아해가 우리 마교에 입교해서 선후배가 됐을 때 이야기다, 혈귀야. 그러기 전엔 다 아저씨지. 보고도 모르겠느냐?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아해야, 이 마라혈귀란 놈은 바깥세상에서 마수들의 피를 빨고 살아온 변태놈이야. 정석은 아니지만 이놈의 단전에 있는 내공의 크기는 원래부터 컸지. 그래서 귀혼오마의 자리를 꿰찼고. 무엇보다 마교의 서열 2위. 실력지상주의라 하지 않았는고.”
나는 이미 혈귀의 상태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MP: 7,501.]
록시탄이라는 요정과 비슷한 수준이라서 다행이다. 똑같은 내기를 할 수 있어서.
“칠 주야만 주십시오. 저 혈귀라는 자와 대등한 수준의 단전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실런지요.”
천마의 고개가 천천히 회전했다. 그가 비로소 나를 본다. 그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만이 없어졌을 뿐.
“아해야, 본좌가 이곳에 떨어진 지 어언 두 갑자(甲子)가 돌았다. 이 드넓은 땅덩이를 하루이틀 뒤졌겠느냐. 이곳에는 내공을 증진시켜 줄 영약의 재료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불모지다. 본좌가 네놈의 몸을 두고 폐허라 하였지. 그것도 말뚝 하나 박을 수 없는 황량한 모래로만 이뤄진 페허. 네놈이 말한 것은 지금 그 폐허를 한순간에 금강 반석으로 다듬겠다는 뜻이다. 그걸 칠 주야 만에 하겠다는 말이냐. 일평생을 바쳐도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이란 건 알고서 하는 말이냐.”
“방법은 제가 알아서 하고요. 내기,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천마가 껄껄 웃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앞에 큼지막한 얼굴이 자리한다.
계속 보고도 적응이 안 된다.
아무런 사전 동작이 없는 축지법.
“내기라는 것은 말이다, 네놈 쪽에서도 거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못 해낸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네놈이 본좌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지 않느냐.”
“모, 목숨을…….”
“건방지다. 네놈의 목숨 따위 본좌에겐 한 식경의 오락거리도 못 됨을 스스로 증명해 놓고 무슨 소릴 하는 게냐.”
그렇구나. 참월의 마녀와는 다르다. 무극 천마는 사리분별에 있어 훨씬 더 냉혹한 자다.
내 어설픈 블러핑이나 도발이 통할 상대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그를 현혹시키려면 ‘내기’에 걸 물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있습니다. 천마님께서 절대 심심치 않게 생각하실 상품이.”
내가 며칠 전에 본 쌍마대전에서 마교들은 나무로 만든 막대기와 지팡이를 든 채 서로 싸웠다. 지금 저 천마의 허리춤에도 목검뿐이다.
그 이유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푸르가토리움의 교도관이 뺏어갔으니까.
‘하지만 내 보물창고는 그대로다.’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나는 용사가 가진 무기들 중 아론다이트를 제외하고 두 번째로 좋은 검을 떨어트렸다.
떨그렁!
SSS급 성검 아론다이트가 아닌 S급 마검 디아볼릭(Diabolique).
이들은 마교. 당연히 성검보다 마검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을 거란 판단이었고,
그 효과는 굉장했다.
“이, 이 검은 무엇이냐. 본좌가 감옥에 빼앗긴 폭류천마검(天魔暴流劍)에 비견되는…… 아니 어쩌면 그를 능가하는 무기로다.”
천마의 동공이 진자추처럼 흔들렸다. 심지어 그의 어깨너머를 기웃거리는 마라혈귀는 침을 줄줄 흘리고 있을 정도.
‘당연하겠지. 이것은 <블러디 크라운>의 최종보스를 처치했을 때 녀석이 떨군 보너스 아이템. 악마왕 디아보로스의 뼈로 만든 마검.’
마인이라면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물론 나는 꺼내고 넣을 수만 있을 뿐, 휘두를 수는 없다. 요구 근력수치가 자그마치 700.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만질 수 없는 개살구가 아니라 삼킬 수 있는 천도복숭아인 셈이다.
천마는 내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검을 성큼 집어 들었다. 아주 사뿐하게.
‘진짜 들었어? 그것도 가볍게?’
대충 짐작은 했지만 놀라지 않기가 어려웠다.
내가 마지막으로 테스트했던 게임 <블러디 크라운> 안에서도 엄청난 고렙이 아니고서야 휘두를 수 없는 마검이다.
그것을 이 천마는 마치 잘 드는 회칼을 집어든 일식 주방장처럼 성큼성큼 휘둘러보고 있다.
“실로 명검이다. 허울 좋은 가짜가 아니로군. 좋아. 그 내기 재미있겠어.”
창문에 비치는 햇빛을 검신에 비춰보던 천마가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이건 돌려주지.”
고개를 끄덕이고 손잡이를 내게 내민 그 순간.
“안 돼!”
마라혈귀가 발악했다.
그가 물갈퀴 달린 맨발로 진각을 내디뎠다.
꿍.
“아, 형님. 뭘 또 고분고분 돌려주십니까. 그 자식 죽여 버리고 검을 가집시다.”
어?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마라혈귀가 돌아버린 눈으로 나, 정확히는 마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아뿔싸. 비상사태다.’
고풍스러운 말투에 헷갈렸을 뿐, 이놈들은 내가 읽은 구파일방 같은 강호의 의협객들이 아니다.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올 정도의 ‘죄’를 짓고 ‘형량’을 받은 죄수들.
약자가 레어템을 갖고 있다면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 그 사고방식이 당연한 자들인 것이다.
“크하하하! 아시죠, 형님. 제가 주종목이 도끼지만 사실 검도 꽤나 다룬단 말입니다.”
야야. 혈귀 멈춰. 치사한 놈아.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
‘큰일이다.’
괄약근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직 마검 디아볼릭이 천마의 손아귀에 들려 있다. 천마의 마음이 변해 내 목을 베기로 한다면 나는 그 일격에서 살아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마검을 여기 둔 채 순간 이동으로 달아난다는 것도 너무 아까웠다.
‘최대한 마검에 빨리 손을 뻗어 접촉하면?’
그럼 인벤토리에 다시 수납할 수 있을까.
그런 다음에 날 죽이면 못 꺼낸다고 말할까.
고문해서라도 뱉어내게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아씨. 마검이 열 개 정도 더 있다고 뻥 칠까.
그냥 마왕 새끼라도 옆에 끼고 올 걸. 괜히 고집 부렸나.
온갖 잡생각으로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을 때.
순간 천마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꾸우우우웅!
내가 다시 그를 포착한 곳은 벽면에 처박혀 있는 혈귀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천마였다.
“마라혈귀야. 친애하는 나의 아우야.”
“크륵…… 혀, 형님……”
“그래. 싸워서 이긴다면 승자가 패자의 것을 취하는 것 또한 마도에서는 순리 중의 순리.”
“그, 그런데 왜…….”
“승부란 자고로 내공을 쓸 수 있는 마인들끼리 해야 하는 것이다. 허공섭물과 이기어검의 목전에 도달해 놓고, 기껏 초상비도 익히지 못한 어린 아해의 목을 따 빼앗는 건 버러지나 하는 짓.”
끄드드드득.
마라혈귀를 중심으로 벽에 거미줄이 생겨나고 있었다. 압력을 못 이기고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벽을 파고드는 마라혈귀의 뒤통수.
실로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뇨. 무정한 놈도, 잔악한 놈도 다 받아들이지만 이 산장에 버러지가 있을 곳은 없도다.”
“사, 살려 주십시오, 교주님.”
형님이 아니다. 교주님이었다. 마라혈귀는 지금 진실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푸른 안광이 천마의 눈에서 발출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잔인함이 깃들어졌다.
“왜? 이 칼 하나만 차면 네놈이 본좌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이 복마전 최상층이 네 것이 될 것 같았느냐.”
스르륵.
천마는 아무렇지 않게 마라혈귀의 목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혈귀의 손에 디아볼릭을 쥐어준 것이다.
“좋다. 이걸로 본좌를 베어보거라.”
혈귀의 기침이 멈췄다. 세로로 찢어진 그의 동공이 살심을 품은 채 천마를 노려본 것이다.
하지만 마검을 건네받은 그의 팔은 눈에 띄게 부들거린다.
“이, 이이익?”
마라혈귀가 이게 무슨 조화냐는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최대한 얄미워 보이도록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마검 디아볼릭은 소지자의 기량에 반응합니다. 천마님이야 워낙 강고하시니 무리 없이 휘두를 수 있으시겠지만, 마라혈귀 님의 수준으론 무리인가 봅니다.”
“크윽…….”
맞다. 나처럼 아예 미동도 못할 수준은 아니지만 꽤나 무겁게 느껴지나 보다.
결국 혈귀의 손에서 검을 빼앗은 천마가 혀를 찼다.
“쯧쯔. 두꺼비 놈아. 벼락행운을 바라지 말고 독 주머니나 더 키우고 도전하도록 하거라.”
“……네, 형님.”
다시 내게 돌아온 천마의 눈에 살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희미한 흥분마저 느껴졌다.
“다시 말하노라. 내기를 받아주지. 하지만 부탁이니 이길 자신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만은 말아주길 부탁하마. 그럴 땐 그냥 본좌를 능멸했다 시인하고 나를 찾아와.”
“그, 그러면…….”
설마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살려주는 건가.
“그땐 고통 없이 죽여주마. 나의 자비로.”
뭘 기대한 거냐. 이 푸르가토리움에 제 정신인 죄수가 있을 리 없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칠 주야 뒤에 뵙죠.”
나는 튕기듯 일어나 복마전 최상층에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천마가 나를 붙잡았다.
“아해야, 너의 무기를 깜빡하였구나.”
“……그건 천마님께서 좀 맡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라? 아직 내기 판의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거늘 상대편의 수중에 상품을 넘겨주겠다고? 이는 또 무슨 해괴한 농담인고.”
무섭다.
저 마검을 내가 갖고 있으면 마라혈귀뿐 아니라 미쳐 돌은 마교 놈들이 밤중에 습격을 해올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사양하고 싶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나는 어설프게나마 천마를 향해 포권했다.
“천마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강제로 빼앗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셨잖아요? 그것은 버러지나 하는 짓이라며. 그러니 제가 내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올 때까지 간직하셨다가 제가 이기면 돌려주십시오.”
“크하하하하. 혈귀, 이놈아. 이 아해에게 좀 배우도록 해라. 단전은 텅 비었음에도 뱃심 하난 가득하지 않느냐. 이런 신물을 선뜻 담보로 거는 건 어지간한 녀석은 꿈도 못 꿀 일이지.”
당신의 무인(武人)으로서 자존심을 믿겠다.
약자에겐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그 오만함에 걸겠어.
“흐음. 그 또한 나쁘지 않겠군. 본좌가 이 검을 갖고 있으면 한동안 없었던 아우들의 도전이 빗발칠 터이니. 네놈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의 여흥은 되어줄 수 있으렸다.”
천마가 디아볼릭의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지켜보는 가운데,
이미 발검은 끝나 있었다.
[천마회풍일섬(天魔會風一閃)]
천마가 허공을 향해 디아볼릭을 한 번 찔렀다.
퍼어어어어어엉!
그러자 반대쪽 면이 통째로 터져나가며 격한 바람이 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그 후폭풍에 내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천마의 도포자락이 사신의 깃발처럼 펄럭였다.
“다 버렸다고 생각했거늘.”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고?
어떤 자식이 그딴 망발을 한 거야.
“다 버렸다고 생각한 물욕이 여전히 심처에 남아 있었는고. 위험하구나, 위험해. 아해야. 본좌는 부질없는 번뇌에 시달리고 싶지 않노니. 너를 죽여 이걸 빼앗고 싶은 마음이 들기 전에…….”
이를 드러내며 천마가 웃었다.
“부디 꼭 돌아와서 검을 되찾아 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