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내기, 하시렵니까 (1)
알현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기분 탓이 아니다. 파워냉방 에어컨을 튼 것처럼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간 것이다.
“감히…….”
바로 빙결 마법사 록시탄이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의 숨결에서 얼음 결정이 스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록시탄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대모이자 탑의 주인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녀 일레인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꼬마야, 그것은 불가능하단다. 무릇 인체라는 것은 대자연의 요소를 복사하듯 담아내는 그릇. 하룻밤 새 늪지대가 사막이 될 수 없듯이 너의 마력 회로가 그 짧은 새에 넓어질 순 없다. 문외한이 뱉은 실언이니 한 번은 용서해 주마. 네가 방금 한 말은 마법학이란 유서 깊은 영역을 모독한 셈이란다.”
“아,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런 말씀이시죠?”
“그래. 이 푸르가토리움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있던 바깥세상의 법칙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비로소 웃었다.
“위대하신 마녀님께서 법칙을 운운하신다니 기묘하군요. 제가 있던 세계에서 마법의 정의는 ‘법칙을 속이는 일’입니다. 마녀님 쪽 세계에선 우주의 법칙에 대해서 그렇게 정직하게만 접근했나 보죠?”
“네 이노옴! 탑의 어머니께 불경하기 짝이 없구나!”
성운의 마도사,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마치 눈빛으로도 운석을 뱉어낼 수 있다는 듯 화를 낸 것이다.
‘그래, 흥분해줘라.’
내 목적은 명백한 도발.
마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천년 묵은 코브라 앞에서 파리가 재롱을 부리는 셈이다. 화가 난 코브라가 한 입에 파리를 씹어 먹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
“일주일이라 하였느냐?”
하지만 다행히 눈앞의 코브라는 내기를 싫어하지 않는 코브라였다.
마녀 일레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좋다. 내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어떤 방법을 쓴다한들 정당하게 마력 회로의 크기를 키워서 돌아온다면 네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 아니,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면 더욱 좋다. 사술이든, 마술이든, 눈속임이든. 결국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마법일진대.”
통했다.
“네 소원은 아마도 중력 마법을 가르쳐달라는 것이겠지, 슈바인 스트링거? 그래, 재밌어. 수백 년 동안 깨지는 것을 보지 못한 대법칙을 네가 부서트린다면 흑마법 중의 흑마법을 네 뼛속에 친히 새겨주마.”
꿀꺽 침이 삼켜진다.
“아아아. 상상했더니 흥분이 되는군. 사내의 몸으로 나의 중력 마법을 펼친다? 마음이 뜨거워져. 몹시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 같아.”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믿음직해 보이도록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그러자 마녀가 고풍스러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걸음을 뗄 떼마다 회색 로브가 융단 위를 날카롭게 핥았다.
“꼬마야. 헌데 내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것 같구나. 만약 네가 재미 삼아 허풍만 쳐놓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그래비티 프레셔(Gravity Pressure)]
콰아앙!
갑자기 유조트럭을 등에 진 것 같은 무게감에 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단순히 육체에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온몸의 장기가 억지로 당겨지는 것처럼 극렬한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다.
잠깐, 내 무릎 지금 대리석을 깨고 한 움큼 처박힌 거 실화냐? 진짜야?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냥 손가락만 한 번 튕겼을 뿐인데.
지팡이를 쓰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진짜 마녀가 보여주는 9서클 중력마법.
“끄으윽. 저, 저는…….”
마녀가 다가와서 내 턱을 쓰다듬는다. 맹독을 지닌 코브라가 턱을 스치고 지나가도 이만큼 무섭진 않으리라.
“그때는 이 푸르가토리움 2층 어느 곳에 네가 숨어 있든지 반드시 너를 찾아낼 것이다. 너를 찾아내서 벼락으로 지지고, 불로 태우고, 얼음으로 만든 뒤 네가 토해낸 아스라한 단말마를 이 탑의 종에 마법으로 새겨 매일 저녁 울리게 할 것이다. 마탑의 형제 자매들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도(魔道)엔 지름길이 없음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 있도록.”
의자 뒤에서 드라이푸스와 록시탄이 싱긋 웃었다. 방금 마녀가 말한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경우 본인들이 기꺼이 손을 보태겠다는 의지를 담은 채.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마녀의 경고엔 조금의 허풍도 없었다. 마치 평범한 인간들이 ‘날 서운하게 하면 네 오른쪽 팔뚝을 꼬집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충분히 실행 가능한 행위를 담담하게 열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무서웠다.
*
“마교의 적전제자가 되고 싶다?”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2층에서 무공으로 정점에 오른 사내,
무극 천마 류운학도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곳은 귀혼산장의 복마전 최상층.
난 화룡도의 줄무늬 죄수복을 여전히 입고 있었다. 쌍마대전의 관객 자리를 사수하느라 군데군데 구멍이 뻥 뚫려 있고 그을린 자국이 초라함을 드러냈다.
‘웬 거렁뱅이가 갑자기 대면을 요청했냐 싶겠지.’
하나 천마의 시선은 내 의복 따윈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흑발을 자유분방하게 흘러내리게 둔 젊은 무사. 하지만 그를 청년이라 믿기에는 눈동자에 담긴 진중함이 웅숭깊었다.
보이는 나이를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푸르가토리움의 법칙. 하물며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온 마교의 수장일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리.
“등반죄수라. 기억이 나는구나. 이 층에 들어와 마교를 창시한 지 20년 정도가 흐른 뒤 한 사내가 홀로 삼월초원에 떨어진 적이 있지. 제법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진 자였어.”
나는 귀가 번쩍 뜨이는 듯했다.
지금 천마가 말하고 있는 사내는 나 이전에 마그마 볼의 시련을 통과한 죄수. 제르비어스가 입옥하기 이전에 화룡도의 열쇠를 사용한 장본인이란 소리였다.
“그 사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은 천마에게서 들려오지 않았다.
교주 접견실의 벽면에 팔짱을 낀 채 기대고 있는 한 죄수. 왼쪽 눈에 긴 흉터가 아로새겨진 양서류가 대신 입을 열었다.
“십 초(招). 그 녀석은 나 ‘마라혈귀(魔羅血鬼)’와 맞붙어 십 초를 버텼지. 어느 미궁의 지배자라며 자신은 남의 밑에 들어갈 수 없다 하길래…….”
마라혈귀는 손등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끽. 죽여 버렸다.”
“아니, 그래도 되는 겁니까? 죄수살해죄로 형량이 늘어났을 텐데요.”
그러자 교도관이 설명했다.
[2층의 교도관이 다시 한 번 등반죄수에게 고합니다.]
[자신은 1층의 교도관과 다르다고, 삼월초원에선 죄수가 다른 죄수를 살해해도 아무런 귀책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그렇군.
2층의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은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강자존의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천마가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만난 등반죄수는 본교에 정면으로 도전 했었지. 너는 다르구나. 본좌의 적전제자가 되고 싶다? 보통 마교의 적통을 뽑는 후보들은 6세에서 9세의 아해들 중에 고르지만 감옥에서 그런 걸 따질 수야 없으니…….”
류운학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좋다. 너의 자격을 힘으로 증명해 보거라.”
그의 테스트는 마녀와 달리 화끈했다.
싸워서 개겨 보라는 것.
그런데 그의 옆에 선 부교주 마라혈귀가 발끈했다.
“아니, 형님! 직접 피 맛을 보시려는 겁니까? 체면을 생각하십쇼.”
손을 들어 막는 천마.
“혈귀야, 너도 처음엔 강호인이 아니었느니라. 본좌를 처음 만나고 초주검이 된 다음에 거둬 달라 애걸복걸하지 않았느냐.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두꺼비 같은 놈.”
“개구리라니까요. 엄밀히 다릅니다.”
“어쩌란 말이냐. 너 두꺼비 닮았어. 호박두꺼비.”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호박두꺼비가 뭔진 몰라도 천마의 세계에 사는 양서류의 이름인가 보지.
천마는 내려오는 장포를 한 번 추스르더니 뒷짐을 지었다.
뒷짐?
“본교는 원래 실력지상주의. 출신도, 나이도, 심지어 종족도 따지지 않는다. 그저 강하면 그만. 어디, 네 녀석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보라. 본좌의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제자로 받아주는 걸 넘어서서 알몸으로 너를 업고 이 귀혼산을 아홉 번 오르내리겠다. 적어 놓아라, 혈귀야.”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마라혈귀는 정말로 품에서 지필묵을 꺼내었다.
이제 시작인가.
내가 긴장하고 있는데. 천마는 느닷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아니지. 아홉 번은 찜찜해. 재수 없게 그 은발 할망구의 마법 등급 숫자 구(九)가 생각나. 혈귀야, 고친다. 열 번, 열 번으로 하자.”
천마가 두루마기에 뭔가를 적는 혈귀에게 양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자연히 내게는 등을 보이게 되었다.
양손이 나의 반대쪽을 향하고 있으며 등까지 보여준다?
‘빈틈이다!’
용사로서 해선 안 되는 비겁한 행위지만 나는 전날 천마의 가공할 무위를 보았다. 허를 찌르지 않고서야 그의 털 끝 하나 건드린다는 건 어불성설.
정면으로 붙으면 백전백패.
파아아아앗.
만전불패의 체술이 실린 도움닫기. 나는 전력을 다해 그의 안면에 주먹을 꽂았다.
그때까지도 천마는 내 쪽은 쳐다보기는커녕 마라혈귀를 바라보며 시시덕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얼굴에 맞아야 할 내 주먹은 그냥 허공을 통과했다.
이게 뭐야? 설마 만화에서만 보던 잔상?
“이형환위(移形換位)라는 거다. 이 귀혼산장에선 마당 청소부도 구사할 수 있는 축지법의 묘리지.”
목소리는 내 오른쪽 2미터 거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전불패의 체술이 내게 적의 투로를 다 알려주고 있음에도. 스킬의 인식범위를 가볍게 웃돌고 있는 경신법.
“계속 해볼 테냐.”
“물론입니다!”
그 뒤로 십 분간 나는 전력을 다해 천마에게 공격을 휘둘렀다. 펀치, 킥, 심지어 박치기까지 시도했으나 그는 호흡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나를 농락했다.
심지어 마왕의 스킬 ‘업화의 쌍장’을 꺼내들었을 때도 눈썹 한 번 치켜세웠을 뿐, 내 어깨를 밟고 도약하며 피해낼 정도였다.
타악.
땅에 내려서는 천마 류운학.
땀범벅이 된 나와 달리 그는 여전히 뒷짐을 풀지 않고 있었다.
“더 해볼 필욘 없겠구나, 안 그러냐.”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는 그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며 졌다.
정말이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나는 기운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쯧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라. 대단한 골격과 신체 능력을 가진 건 분명해. 아마 본좌의 수하들 중에서도 너만큼 균형 잡힌 체질은 드물 것이다. 내공을 쓰지 않은 팔씨름으로 맞붙는다 쳤을 때, 네 녀석이 어지간하면 다 이길 걸?”
혀를 차던 천마는 내 아랫배를 가리켰다.
“중단전과 상단전은커녕 하단전조차 맥통하지 못했어. 무의 길에 들어선 자 치고 편식을 너무 심하게 하였구나. 내공을 완전히 등한시하고 외공의 길만 걸어온 모양인데, 그래서는 장풍 한 방에 날아가지. 네 단전(丹田)은 빈 폐허나 다름이 없다. 아해야, 운기조식이 뭔지는 아는고?”
운기조식(運氣調息).
안다. 무협소설에서 몇 번 읽었고 무협 게임을 테스트할 때 숱하게 대리체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주워들은 것, 게임 컨트롤러에 손가락을 몇 번 눌러 일궈낸 것. ‘진짜’ 운기조식을 알고 있느냐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금의 내가 운기조식을, 주화입마를 안다고 떠든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모릅니다.”
나는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놈은 본좌의 호기심을 조금도 이끌어내지 못하였구나. 타고난 신체가 절정의 무골(武骨)이거늘 안타깝도다. 이 감옥 바깥이었다면 본좌가 가진 환약 중 마령단이나 사환단을 네게 먹여 단전을 강제로라도 늘려줄 텐데. 이 갑자 공력은 우스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통을 못 이겨 혀를 깨물고 죽을 공산이 농후하겠다만.”
천마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어찌되었든 이곳은 감옥. 그딴 농담 같은 기연 따위 만들어낼 수 없지. 원래부터 센 놈이 들어와서 서로를 잡아먹으며 이 마교를 다져왔느니.”
그의 말에 마라혈귀가 껄껄 웃었다.
“아이고, 형님. 진짜로 그런 단약이 있는데 꽁쳐두신 줄 알고 섭섭할 뻔했습니다요. 저도 몇 백 년간 암반백사의 맹독 한 잔 못해봐서 지금 금단 현상 일어나는데.”
“껄껄껄. 독을 술처럼 밝히는 거냐. 하여간 독 두꺼비 같은 놈.”
자존심이 상한다.
지금도 내 얼굴은 보지 않고 마라혈귀와 떠들고 있는 저 사내의 얼굴에 놀라움을 만들어주고 싶다.
‘나를 보게 하고 싶다.’
뒷짐을 진 방만한 자세가 아닌, 진심으로 내 공격을 받아주는 천마를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도발이 술술 흘러나온다.
“천마시여, 저 혈귀의 단전은 어느 수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