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날개와 물갈퀴 (2)
여기 두 개의 마도(魔道)가 있다.
한쪽은 숨결만으로 천하를 경천동지시키는 천마와 그의 교인들이 펼치는 마공(魔功)의 길.
다른 한쪽은 손짓만으로 중력을 역전시키는 마녀와 그의 신도들이 펼치는 마법(魔法)의 길.
승부가 날 때까지 누천년 동안 계속될 싸움.
일평생 닦아온 투쟁의 방식 중 누가 더 강한가를 가리는 자존심 대결.
그것이 쌍마대전(雙魔大戰)이었다.
“그들은 999번이나 싸웠다고 했어.”
제르비어스와 나는 삼월초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평원을 걷고 있었다. 군데군데 자라난 초목들이 여기는 오랜 전쟁과 연이 닿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면 자그만치 123년 동안이나 계속 싸워온 거야. 단 한 차례도 힘의 추가 기울지 않고.”
가장 강력한 층장 후보가 둘.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어느 쪽으로도 승부가 나지 않는 세계.
“그런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마왕?”
“화룡도에서는 늘어나는 형량과 노역이 죄수들에게 걸린 주박(呪縛)이었지. 여기서는 전혀 다른 형태로 그것이 이뤄지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난 말야, 감옥이라는 것에 대해서 평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어. 그런데 보통 감옥은 죄수들에게서…… 자유를 제한하잖아?”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왕성 지하에는 온갖 고문기구와 구속구들이 가득했지. 물론 내가 출전하면 포로가 남지 않아 자주 쓸 일은 없었지만.”
“그, 그래. 어쨌든 감옥이란 건 그런 데잖아. 화룡도에서처럼 말야. 그런데 이 층은 어떻게 된 게 죄수들로 하여금 폭동이나 다름없는 패싸움을 100년 넘게 하도록 부추기냐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감옥의 개념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황이야.”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유. 과연 천마와 마녀는 자유로울까?”
“그 싸움 나만 본 거냐. 아수라가 은하수를 베어내는 현장에 너도 있었잖아. 그 둘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출력으로 맞붙었어. 우리 세계로 치면 교도관이 죄수들에게 샷건과 기관총을 쥐어주고 서로 마음껏 전쟁을 펼치라 한 셈인데.”
“샷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의 목적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야. 승리지.”
나는 그제야 마왕이 하려는 말을 얼추 이해했다.
“그들은 100년 넘게 어느 쪽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용사. 나는 그게 이 층의 교도관이 죄수들에게 주는 ‘고통’이 아닐까 추리한다.”
마왕의 읊조림이 내 귓가를 파고 들었다.
일리가 있어.
어쩔 땐 맹해 보일 때가 있지만 저럴 땐 제법 마왕군의 수장답게 날카롭단 말이지.
“탑이 가까워졌다. 마교도들의 말에 따르면 저곳이 바로 마법사들의 거처이겠지.”
백묘탑.
청아한 호수가 자리한 외곽지대. 탑은 그 호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다.
어린 꼬마가 무중력 우주선 안에서 블럭을 쌓으면 저런 모습이 만들어질까?
탑은 기기괴괴한 각도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으면서도 용케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그 자체로 ‘신비’의 현존을 증거하는 듯.
우리는 그곳을 첫 번째 방문지로 잡았다.
절대로 저 녀석이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
“외부자가 탑에 들어오려면 소속을 밝혀야 합니다. 마법사에게 클래스가 없을 수 없는 것처럼 죄수에겐 클랜(Clan)이 있어야 하죠. 소속 클랜을 밝히세요.”
회색 로브를 입은 너구리 소녀가 탑의 입구에서 우리를 막아서곤 이렇게 말했다.
나와 제르비어스는 그 소녀의 앙증맞은 수염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클랜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만드세요. 그래야 결계 안으로 들어섰을 때 육망성 분들이 추적할 수 있거든요. 열외죄수는 입탑불가랍니다.”
여기에도 열외죄수란 개념을 쓰는군.
이름 모를 나부랭이는 안 받아들여주는 모양이다.
별 수 있나. 뭐라도 지어내야지.
“용마 클랜이다.”
그때, 한 걸음 뒤에 있던 제르비어스가 후다닥 달려와 으르렁댔다.
“용마? 어디서 떼와 가지고 줄여먹은 이름이냐, 너?”
“어디서 줄여 먹긴 ‘용사를 모시는 마왕’의 줄임말이지.”
“절대 불허한다! 마용! 마용 클랜으로 해! 억울하면 보바위가위로 승부하고!”
너구리 소녀가 지팡이로 자신의 콧잔등을 긁적이고 있다. 지루해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이놈과 또 한 판 붙어서 진심승부를 가리는 거야 문제가 아니다만,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신흥 클랜 하나 창립하면서 우당탕탕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모두가 우리 둘을 수상하게 여길 거라고.
“알았다. 마용으로 하지.”
“드디어 용사 네놈이 말귀를 알아 처먹기 시작하는구나. 후헤헤헤.”
제르비어스는 만족한 듯 망토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단순한 자식.
나는 너구리 소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왕을 거느린 용사’ 클랜이야. 줄여서 마용 클랜. 오키?”
“알겠습니다. 두 분은 이제 마용 클랜 소속으로서 탑을 드나드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주의사항은 학파를 이끄시는 선생님들께서 해주실 거여요.”
너구리 소녀의 지팡이가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무지개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오선지 위를 노니는 음표들처럼 우리 주변을 둥둥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마법 결계의 출입권이 생기면서 결계에 튕겨져 나가던 소리가 흘러들어온 것이다.
당연하게도 백묘탑은 보통의 건축물이 아니었다.
멀리서는 탑처럼 보였으나 수천 개의 마법진들이 직육면체의 건물들을 띄워 올리고 있는 형태였다. 그 사이를 수많은 마법사들이 비행으로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오기 엄청 쉽네?”
그렇게 우린 백묘탑의 출입심사를 통과했다.
거기서 만난 마법사들과의 대화가 어땠는지 설명하는 건 잠깐만 미루자.
*
왜냐하면 비슷한 일이 천마신교의 본거지인 ‘귀혼산장’에서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귀하는 어느 문파 소속이오? 방문객의 장부에 적어두려 하오.”
흑색 장포를 입은 오크가 붓을 들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말투가 정말 무협소설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내가 대꾸하려는데 마왕 녀석이 뛰쳐나가선,
“마용파! 우리는 마용파다.”
그런 거 뿌듯하다는 듯 말하지 마.
“그렇게 적어 두겠소. 따로 주의사항 같은 건 없다만…… 귀검신녀와 마라혈귀 같은 고수들 옆엔 가지 않는 걸 권하오. 괜히 그들의 연공수련을 견식하려다 휘말려서 비명횡사하는 죄수들이 몇 있었거든.”
살벌하네.
나는 혼잣말로 ‘외칠수록 마음에 드는군. 우리는 마용파. 용마파로 헷갈리지 마용’하며 중얼대는 마왕을 끌고 귀혼산장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러면서 난 생각했다.
‘백묘탑도, 귀혼산장도 어이없을 만큼 출입이 간단하다.’
클랜과 문파의 이름도 대충 지어냈을 뿐인데 아무도 우릴 경계하지 않았다.
본거지와 바로 통해있는 입구에서도 별다른 막아섬이 없다. 두 진영 모두 암살자의 존재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것일까.
“너는 그때의 열외죄수!”
귀혼산장의 경내에서 한 마교도가 우릴 알아보았다. 바로 쟁패의 기둥 앞에서 내가 쓰러트렸던 도마뱀 죄수였다.
젠장.
교도가 수백 명이나 되는데 하필 저 녀석 눈에 바로 띄다니. 여기서도 시비를 걸어오면 탐색에 차질이 생기는데.
그런데 녀석은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내 등을 팡팡 쳐댔다.
“이야아. 자네들 살아있었구만? 일전엔 마법사로 오해해서 미안했다고. 경솔하게 호출령을 내렸다고 귀혼오마 분들께 실컷 꾸지람 들었다.”
“어? 어어. 그래. 괜찮아. 오해가 있을 수도 있지.”
“사과를 받아주는 겐가? 대장부답군. 나는 마교 나찰대 칠 조장 염사군(炎死君)일세.”
갑자기 살갑게 구네, 이 녀석.
그런데 왜 이제 마법사가 아닐 거라 판단한 거지?
“그날 보니까 자네들 확실히 마법사가 아니더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꼬리에 불붙은 원숭이처럼 뛰어다니기만 했을 리 없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자네 기술은 마법진도 없었고.”
나는 제르비어스에게 눈짓을 했다.
- 그러네? 왜 네 폭렬마법은 마법진 없이 시전되는 거야?
- 마족의 고급 권능이지. 우린 자연 속의 마나와 대화할 때 번역이 필요 없다. 숨 쉬듯이 쓸 수 있는 거야. 뭐, 용족의 마법체계보다 우수하다 할 순 없지만.
- 어쨌든 덕분에 이 녀석의 오해가 풀린 것 같아.
마왕과 내가 귓속말을 나누고 있을 때, 염사군은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엇보다 1단계라도 마법 서클을 심장에 새긴 녀석이면 너희들이 방금 지나온 귀혼산장의 출입문을 넘을 수 없어.”
“어? 그건 또 어째서?”
“교주께서 손수 만든 광멸복마진(光滅伏魔陣)이란 진법이 펼쳐져 있거든. 마법 서클에 반응하는 초고급 함정이야.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네들은 마법사가 아니란 걸 증명한 걸세.”
백묘탑에 결계가 있던 것처럼 여긴 진법이 있다는 건가.
“그러게 왜 기술명에 ‘마법’을 붙이고 그랬나, 쯧쯔. 여기선 예민한 문제니까 다른 걸로 바꾸는 걸 추천해. 요술이나 뭐 그런 걸로.”
놔두면 계속 떠들 것 같았기에 나는 녀석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그래. 폭렬요술을 만들든 말든 할 테니까, 뭐 하나만 묻자.”
“뭐가 궁금하지?”
“교주……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저 뒤에 건물이 복마전(伏魔殿)이야. 내부의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돼. 헷갈릴 일도 없어.”
“경비도 없는 것 같은데? 암살자가 무섭지 않은 건가.”
그걸 물어보니 염사군의 표정이 괴이해졌다.
뭐 그딴 걸 물어보냐는 듯한 얼굴. 녀석의 눈빛에 담긴 무시가 너무 투명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물개사냥을 나서는 에스키모에게 ‘춥지 않아요?’ 하는 질문을 던진 관광객인 양.
염사군은 귀혼산장의 꼭대기를 가리키며,
“우리 교주님이 어째서 최고층에 거하시겠나. 암살이나 습격을 두려워 하셨다면 지하에 땅굴을 파두고 칩거하셨겠지.”
녀석이 해준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천마지교의 교주 무극 천마는 쌍마대전 사이의 평화가 너무 지겨운 나머지, 오히려 암살 시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한 놈이 오든, 두 놈이 오든 상관없다고.
“그러다 암살자한테 죽으면?”
“교주님이? 그럴 리 없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죽인 놈이 교주가 되지.”
“암살자가 여럿이면?”
“교주님의 시체 위에서 또 한 판 칼춤을 추는 거지. 한 놈이 남을 때까지.”
뭐, 이런 집단이 다 있어?
일단 천마를 비롯한 마교도 전체의 자부심은 잘 알겠다.
염사군의 말대로 이 감옥 안의 마교는 종교집단의 색채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마피아나 야쿠자에 더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다.
콰아아아아아앙!
갑자기 대나무숲 한가운데서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풍겨 나왔다.
그런데 염사군은 태평한 모습이었다.
“아 저거? 늘상 있는 대련이야. 연기의 색깔을 보니 염화도객과 독무황 두 분이 손을 섞고 계신 것 같구만. 두 분의 대결은 놓치면 아까운 볼거리. 그럼 다음에 또 보세!”
도마뱀 죄수 염사군과 작별한 우리는 가장 으리으리한 기와를 자랑하는 복마전 앞에 섰다.
어젯밤 굉장한 무위를 보여주었던 무극 천마 류운학이 저 위에 있을 것이다.
“어쩔래, 용사? 만나볼 테냐.”
“아직은 아니야. 생각해둔 순서가 따로 있어.”
“흠. 뭘 생각하고 있지?”
“일단 마교든 마탑이든 미칠 정도로 강한 자들만 있다는 건 확인했다.”
“그래. 마왕인 이 몸조차도 승부를 확신할 수 없는 녀석들이 떼로 모여 있지.”
나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마왕에게 질문했다.
“제르비어스. 이 층의 열쇠를 얻기 위해선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일단 쌍마대전의 팽팽한 균형을 깬다. 결국 천마와 마녀, 둘 중 한 명을 승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겠지.”
“맞아. 네가 그랬었지? 구름 위로 솟아오른 가지와 심해까지 뻗어 내린 뿌리 중 어느 쪽이 더 긴지 알 수 없다고.”
“그렇다. 높은 경지에 오른 강자의 성취를 엿보려면 최소한 그 근처에는 다다라야 하니까.”
“아직 나는 그렇지 못해. 그러니 구름 위로 오를 수 있는 날개를 달아야 하며, 심해 밑바닥의 압력을 버틸 수 있는 물갈퀴를 얻어야만 해.”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왕에게 나는 각오를 밝혔다.
“쉽게 말해서 나도 미친 듯이 강해져야겠다고.”
“어떻게?”
1층 화룡도에서 내가 사귄 ‘친구’들은 나와 같은 인간형 종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두더지 토인, 잭 프로스트, 켄타우로스 등. 그래서 내게 적합한 전투스킬을 가진 죄수들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스켈레톤인 비르카의 관절 접합 스킬을 볼까.
‘아니. 작살난 뼈가 100미터 안에 있으면 자동으로 모여서 붙는다니. 그딴 스킬 있어봤자 어따 써먹겠냐고’
하지만 이 삼월초원의 초마인들은 달랐다. 절대다수가 인간형 종족. 게다가 그 숫자는 자그마치 천 명에 육박한다.
“강해지는 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
천 명의 마인.
수 백 개의 마공.
수 백 개의 마법.
그것 모두가 나에겐 ‘스킬’이다.
2층 삼월초원. 여기는 내게 까마득한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식탁이나 다름없다.
나는 용사의 하얀 섬섬옥수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들과 악수하며 ‘친구’가 되기만 하면 돼.”
흙을 퍼먹은 용사가 뭘 못 먹겠나.
만찬을 잡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