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지팡이와 칼 (3)
낭중지추.
군계일학.
아무리 무리의 숫자가 많다 하여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의 죄수들이 있었다. 용사의 심안이 가장 먼저 포착한 자는 세 개의 마법진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기인이었다.
[이름: 드라이푸스 카인]
[별호: 성운의 마도사]
[종족: 인간], [클래스: 7서클 마법사]
[칭호: 백묘탑의 현자, 육망성 중 일 인]
[HP: 250], [MP: 5,100], [근력: 20], [민첩: 15]
[형량: 415년]
[그는 별의 의지를 읽을 줄 아는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그 별의 생명력을 뽑아 먹고 문명을 세우는 것에만 탐닉할 때, 그는 동족을 심판할 힘과 지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별의 잔해’가 떨어지곤 했답니다. 그리고 성운의 마도사는 그 힘에 지나치게 매몰됐어요. 그 역시 인간이었던 거죠.]
백발의 수염을 휘날리는 성운의 마도사. 그가 손을 휘젓자 그의 정면에 3미터 직경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메테오 스트라이크(Meteor Strike)]
그러자 놀랍게도 불타오르는 운석이 무더기로 지면을 강타했다.
쾅쾅쾅쾅쾅!
“백묘탑의 자녀들이 삿된 존재를 친히 벌하노라!”
마교도의 천라지망을 강제로 썰어버리는 자들은 우주의 법칙을 희롱하는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포크레인이 하는 업적을 수백 배 확대한 스케일로 벌이려 하고 있었다.
즉, 지형을 바꾸려 든 것이다.
“숙여라, 용사!”
엄청난 숫자의 화염구들이 초원을 폭격하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마법사들의 소행이었다.
정면으로 날아온 불덩이 하나를 제르비어스가 온몸으로 막아 세웠다.
화르르르륵!
그러나 불길은 마왕의 털끝 하나 태우지 못했다. 화룡도의 마그마에 발을 담궈도 소멸되지 않을 만큼의 ‘화염 내성’.
하지만 마법사들이 내쏘는 마법은 화염뿐만이 아니었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here)]
이번에는 전격의 창이 마교도들을 휩쓸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교도들 중 누군가가 솟구쳐 오르더니 일검을 휘둘러 번개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귀검신녀였다.
“백묘탑의 찌꺼기들, 천마지교 앞에 무릎을 꿇으라!”
천라지망은 이제 완전히 해제됐다.
마교도들이 나와 제르비어스를 안중에도 두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삼월초원의 두 세력이 서로의 목을 따기 위해 격돌했다.
“이게…… 뭐야.”
나는 그을림에 따끔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파이어 월(Fire Wall)!”
한 마법사가 마법진에서 불의 폭포를 만들어냈다.
“빙백신권(氷白神拳)!”
반대편의 마교도가 내공을 발출하는 장풍으로 응수했다.
화염과 빙결이 서로 충돌하며 수증기의 군무가 피어올랐지만 그 안에서도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사기야. 뭐 이런 층이…….”
한 마교도가 초상비를 펼쳐 날아올라 마법사의 허리를 베어냈다. 그러나 블링크 마법으로 전이한 마법사는 그 마교도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팡이가 휘둘러지자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거목의 줄기가 마교도를 휘감아 떨어트렸다.
“뭐 이딴 세계가 다 있냐!”
내 절규는 마법과 장풍이 서로 폭발하는 충격파와 폭발음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4. ‘쌍마대전’]
[등반죄수인 당신은 삼월초원에 내려섰습니다. 이곳은 하늘을 농락하는 천마신공의 마교도들과 땅을 가르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쌍마대전(雙魔大戰)’이란 이름으로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두 집단 중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한 후 전쟁에 나서야 합니다. 오직 승리자만이 층장의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한쪽 진영을 선택하게 되면 그 결정은 영구적인 효과를 발휘해 못 박히게 됩니다. 선택 즉시 당연히 반대쪽 진영의 집중 포화와 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무운을 빕니다, 수감자여.]
[기한: 없음]
[보상: 근력 +50, 민첩 +50]
[실패 시: 등반 불가]
초마인들이 벌이는 쟁패.
쌍마대전.
이것이 삼월초원이 내게 내리는 시련이었다.
*
나와 제르비어스가 얼리다가 감전된 통구이 신세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마교도와 마법사들의 파상공세가 정확히 우리 둘을 표적으로 삼고 있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쪽으로 날아와 피해야만 했던 마공과 마법은 궤적에서 벗어난 ‘여파’에 불과했다.
“더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야 한다, 용사!”
“안 돼!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려면 이 이상 기둥과 멀어질 수 없어.”
그렇게 되면 퀘스트 보상도 날아가 버리니까.
내 고집에 제르비어스는 짜증을 냈지만 그 이상 반대의견을 내세우진 않았다.
순간 코끼리만한 돌덩어리가 눈앞으로 날아왔다.
“아랏차!”
나는 훌쩍 뛰어올라 ‘업화의 쌍장’으로 그것을 베어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내 MP 수치는 바닥나버리지만 금세 다시 차올랐기 때문에 가능한 대처법이었다.
세 개의 보름달이 천공의 한가운데에서 회합했다.
그러자,
[2층의 열쇠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끝을 모르고 자라나던 나선기둥의 성장이 멈췄다. 두 개의 빛이 꼭대기에서 뱀의 꼬리처럼 얽혀들었다.
그 위에서 영롱하게 주변을 밝히는 붉은빛.
내 오른손 손등에 있는 불빛과 정확히 같은 색이다.
“층장의 열쇠, 저런 식으로 출몰한다는 거네.”
“이제부터 싸움이 한층 치열해질 것 같군.”
제르비어스의 말이었다.
확실히 전장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싸움터에 부어진 것은 뜨거운 기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물.
반딧불처럼 초원 위를 떠돌던 마법진들이 명멸한다.
피를 흘리던 마교도들이 목검을 다시 허리춤으로, 목창을 다시 등 뒤로 돌려놓는다.
일정 거리를 둔 채 물러서는 양 진영.
나는 마왕을 향해 혼란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왜지?”
“글쎄. 느닷없이 휴전인가.”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결코 싸움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렬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어라. 나는 저 비슷한 풍경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삼국지를 베이스로 한 게임들 속에서 저런 장면이 나오곤 했었지 않나.
“대장전(隊長戰)이다.”
무리 중 최강자끼리의 일 대 일 승부. 저것은 대장군 둘의 맞대결이 벌어질 때만 가능한 풍경이다.
마교도들이 일정한 박자로 땅을 구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엄중한 표정의 무사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다른 교도들과 다를 바 없는 흑색 장포. 허리춤에는 살상력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목검 한 자루. 나이를 엿보기 힘든 무심한 얼굴.
하지만 그의 눈빛에 담긴 건 극상으로 압축된 제왕의 패기(覇氣)였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천마군림, 만마앙복!”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
무림을 일통할 수 있는, 혹은 그런 적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칭호가 불리고 있었다.
대호(大虎).
포효 한 번으로 숲 전체를 떨게 만들 수 있는 호랑이.
[이름: 류운학]
[별호: 무극 천마(武極 天魔)]
[종족: 인간], [클래스: 극마지경]
[칭호: 천마신교 교주, 서열 1위]
[HP: 7,200], [MP: 9,999], [근력: 781], [민첩: 367]
[형량: 421년]
[십만대산에 적을 두고 있는 마교의 8대 교주입니다. 무림을 공포에 떨게 만든 혈겁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죠. 하지만 죄수로서 그의 독보적인 면모는 무에 대한 깨달음뿐만이 아니랍니다. 류운학은 7대 천마 설공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을 품고 이 푸르가토리움에 ‘자발적으로 잡혀 온’ 유일무이한 죄수.
7대 천마 설공은 그와 맞대결하기 직전에 소환빔을 맞아 죄수가 되었고, 류운학은 이후 복수를 이루기 위해 선대 천마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좇아 걸었습니다. 그가 죽인 숫자만큼 손에 피를 묻혔으며, 그가 다다른 경지까지 따라 붙기 위해 모든 걸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삼월초원의 쌍마대전에 선봉장으로 서 있습니다.]
뒷짐을 진 채 기둥을 노려보고 있는 천마 류운학.
그의 등장만으로 마교도들의 기세는 몇 배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천하제일인. 그는 격이 맞는 상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라비타스 도미누스(Gravitās Dominus)! 마도의 별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참월의 마녀시여! 무뢰하고 어리석은 적들에게 영면의 축복을!”
마법사들의 간절한 부름에 누군가 응답했다.
대체 그녀는 언제부터 여길 내려다보고 있던 걸까.
회색 로브를 펄럭이며 초원에 내려앉는 여인. 발목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는 이의 영혼을 희롱하고 있었다.
잠룡(潛龍).
그녀는 호수 밑바닥에서 언제든 똬리를 풀어내 세상을 함락시킬 수 있는 용이었다.
[이름: 일레인 쿠디슈]
[별호: 참월(斬月)의 마녀]
[종족: 인간], [클래스: 9서클 대마도사]
[칭호: 백묘탑의 어머니, 그라비타스 도미누스]
[HP: 3,090], [MP: 9,999], [근력: 70], [민첩: 20]
[형량: 608년]
[마도제국 사상 최악의 살상병기. 자신의 학파를 세워 마법의 이치를 탐구하는 보통의 마법사들과 그녀는 태생부터 다릅니다. 일레인 쿠디슈는 제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 키워진 전술무기였지요.
그녀가 다루는 마법은 중력의 마법.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를 이룩한 자에게만 붙여지는 ‘그라비타스 도미누스(중력의 지배자)’가 바로 이 마녀입니다.
자신들이 키워낸 마녀로 대륙을 휩쓸어버린 제국의 수뇌부들은 언젠가 쓰임새가 없어지면 그녀를 제거할 생각이었지요. 어쩌면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녀의 힘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마녀의 지성이 조금만 아둔했더라면. 중력을 비트는 마녀의 성취가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하지만 제국은 감당 못할 괴물을 키워낸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수도는 지도에서 깔끔히 지워졌습니다. 다만 업보는 마녀 본인에게도 등가교환처럼 돌아와 마도제국도 채우지 못했던 족쇄를 푸르가토리움이 채우게 만들었습니다.]
천마와 마녀.
마녀와 천마.
나는 기둥을 두고 대치한 두 절대강자의 면면에서 조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메인 퀘스트의 내용에 나온 ‘쌍마대전’에서 승리하려면 둘 중 한 명을 내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제르비어스.”
“뭘 물으려는지 알겠다. 둘 중 누가 더 강해 보이냐는 거지?”
“그래. 넌 그래도 마족이잖아. 어때 보여?”
마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다 천년거목이다. 너는 구름 위로 솟아오른 가지와 심해까지 뻗어 내린 뿌리 중 어느 쪽이 더 긴지 알 수 있겠냐? 가늠이 되지 않아.”
침묵이 초원을 가득 메웠다.
그렇기에 천마와 마녀의 대화는 멀리 있는 우리에게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999번째 쌍마대전이다, 천마.”
“여전히 숫자에 얽매이나보군, 마녀. 그러니 10서클을 달성 못하는 게다.”
“천 번을 채우기 전에 네놈의 면상을 소멸시켜버리기로 자녀들에게 약조했거든. 어울려주는 것도 오늘밤이 끝이야.”
“본좌가 할 말이로다. 그대의 지팡이를 일도양단해 교도들이 벌일 축제의 모닥불에 던져주도록 하마.”
“선공은?”
“저번엔 내가 출수했으니 그대 차례다.”
“그럼 사양 않고 가지.”
참월의 마녀가 로브에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기나긴 주문 읊기도, 정신을 집중시키는 영창도 없었다.
다만 마녀의 눈빛이 한 차례 거룩하게 번뜩였을 뿐.
그 순간,
나는 빅뱅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