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지팡이와 칼 (2)
썩둑!
횡으로 휘둘러진 검기를 가까스로 피했다. 용사의 잘린 금발머리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다행이었다.
갑작스런 검기 발출에 놀라긴 했지만 도마뱀 죄수의 동작 자체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아닛?”
내가 피해낼 거라 생각지 못했는지 녀석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도검을 소지한 자에게 거리를 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능이 알려오고 있었다.
검의 간격 바깥에 있거나 아예 달라붙어야 한다. 아직 난 저 검기의 운용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접근전으로 간다.
나는 도마뱀 죄수의 측면으로 파고들어 갈비뼈에 매서운 정권을 질렀다.
“커헉.”
분명 온힘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마뱀 죄수는 몇 걸음 물러섰을 뿐 다시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제법 잔재주를 익힌 모양이구나, 건방진 놈.”
“다짜고짜 눈앞에서 비키란 말을 꺼내는 네가 더 건방진 것 같은데. 그나저나 방금 천마신교 어쩌고 하지 않았어?”
그럼 확인할 것이 하나 있다.
“그럼 너희들 대빵이 혹시…… 천마(天魔)야?”
“네 녀석 따위가 감히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시발, 맞나보다.
저렇게 흥분해서 달려드는 걸 보니.
나는 도마뱀 죄수의 파상공세를 흘려보내며 상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흑색 도포에 검기를 뽑아 휘두를 만큼의 위용.
달리 오해할 여지가 없는 천마신교라는 네 글자.
‘아무래도 이 층은 무림(武林)의 세계관인가 본데.’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이 내게 준 권능.
그 권능으로 빌려 쓸 수 있게 된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
이것으로 인해 나는 전투에 돌입했을 때 참고서를 펼쳐 읽듯 손쉽게 상대의 동작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투로(套路).
한 인간이 오랜 수련과 깊은 고찰, 다량의 실전을 거쳐 종합적으로 완성되는 신체의 운용법.
나에게는 그것이 보인다.
“네 이놈! 계속 피하기만 할 것이냐!”
도마뱀 죄수가 검을 휘둘러 온다. 녀석이 내딛은 발의 위치와 어깨의 회전량, 시선이 향하는 곳을 읽어내면 공간을 장악할 수 있다.
검기가 베어내는 궤적이 환하게 그려진다.
“이 쥐새끼 같은 녀석!”
약이 바짝 오를 것이다. 표적이 아슬아슬한 만큼만 몸을 움직여 자신의 공격을 무위로 돌려내고 있으니까.
내 민첩 스탯은 고작 40.
이쪽도 사력을 다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위기가 거듭 휘몰아친다. 그렇기에 더더욱 돌발 퀘스트의 보상 ‘민첩 +30’을 포기할 수 없다.
“물론 계속 피할 생각은 없지.”
아무렴.
상대의 공격을 연거푸 피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된 긴장 상태는 심력을 고갈시키고 집중력을 갉아먹는다.
제르비어스가 귓속말을 걸어왔다.
- 용사야. 힘겨워 보이는데. 손을 빌려줄까.
- 아니야. 아직 할 만해.
- 하지만 전혀 반격을 못 하고 있잖아. 저 무사가 쓰는 검을 맞상대할 무기가 네게 있나.
- 후후후.
있어.
다름 아닌 폭렬마왕 네가 빌려줄 무기가.
나는 도마뱀 죄수에게서 훌쩍 거리를 벌린 후 양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리고 집중하자 보라색 마기가 내 손바닥에 모여 쌍수도(雙手刀)를 만들어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마왕군 폭렬마법]
[1급 오의 ‘업화의 쌍장’]
예상치 못한 기술을 꺼내자 도마뱀 죄수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지.
내찔러오는 검을 좌수도로 튕겨냈다. 훤히 드러난 상대의 가슴팍에 우수도를 찔러 넣었다.
꽈아앙!
‘업화의 쌍장’에 격중 당한 도마뱀 죄수는 멀찍이 날아가 동료들의 앞까지 굴러갔다. 그를 부축하는 두 죄수의 표정은 경악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 스킬에 경악해 버린 건 상대편만이 아니었다.
“봤냐, 제르비어스?”
“……어, 어떻게! 그건 마왕군 폭렬마법의 오의인데. 왜 용사 네놈이?”
“네가 몇 번 보여줬잖아. 그래서 따라해 본 거지.”
“말도 안 된다. 그건 마족에게만 허락된…….”
“마법이다!”
마지막 말은 비틀비틀 일어서는 도마뱀 죄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녀석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놈, 분명히 마법을 썼다!”
천마신교의 신도라 하는 세 죄수는 모두 나를 보고 살기 어린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식탁에 붙은 귀찮은 파리를 대하는 시선이었다면 이제는 식탁을 불태워버린 강도를 대하는 시선으로 바뀐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제르비어스는 내 멱살을 붙잡고 흔들 수 있는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쟤들 왜 저러는 거냐, 용사?”
“글쎄. 마법을 써서 그런 모양인데. 그게 그렇게나 화를 낼 일인가?”
어느새 내 양 손바닥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가 스킬을 해제한 게 아니었다.
[MP: 0/10]
내 MP 수치가 쥐톨만큼 있었다는 걸 깜박했다. 단 한 번의 시전으로 마력을 다 써버린 것이다. 이래서야 상대편의 화만 돋운 꼴이 되어버렸다.
“이게 아니지. 아무튼 마족의 자긍심 넘치는 기술을 훔친 거냐, 슈바인! 어서 설명해랏!”
우리 편의 화도 돋운 모양이고.
하지만 지금은 마왕과 실랑이를 할 때가 아니다. 지금껏 지켜보던 다른 두 죄수들도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중 올빼미의 머리를 달고 있는 죄수가 손에 든 막대기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이상한 복색을 하고 있기에 열외죄수인 줄 알았더니. 네놈들, 백묘탑의 척후병이었구나! 거짓부렁을 일삼는 버러지!”
“아니, 우린 화룡도에서 왔다니깐. 왜 했던 말을 자꾸 하게 만드니.”
“닥쳐라아!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리를 도발한 용기는 가상하나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올빼미 죄수가 막대기를 입에 가져가자 나는 그것의 용도가 피리나 나팔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삐이이이이익!
녀석이 만들어낸 소리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나와 제르비어스가 순간 귀를 부여잡고 웅크릴 만큼 대단한 출력이었다.
음파기공(音波氣功).
“긴장해, 제르비어스. 방금 저거 우릴 향한 공격은 아니었어.”
“그래. 아무래도 동료들을 이곳으로 불러오기 위한 신호라고 봐야겠지.”
마왕의 말이 옳았다.
내 허리춤까지 자라난 초원의 풀들이 넘실대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게 빨라졌다.
지축을 울리는 격한 진동.
“최소한 오백이다.”
검은 복색을 한 일단의 죄수들이 반월 형태를 그리며 주변을 둘러쌌다. 일사불란한 동작은 물론이거니와 내뿜고 있는 기세 또한 패도적이었다.
“천마신교의 교도들이겠군.”
나는 그들의 복식에서도 강렬한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는 끈. 흑색 도포와 장삼을 휘날리며 허공에 계단이 존재하는 듯 자유자재로 펼치는 도약술.
무협소설에서 방금 뛰쳐나온 것 같은 수백의 장정들이 목재 무기들을 손에 쥔 채 우릴 포위하고 있었다.
지금껏 여유를 잃지 않았던 제르비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용사야, 저 중의 절반은 너보다 강하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어. 나도 둔치는 아니거든.”
“그리고 흉흉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저 다섯 명의 선봉장들은…… 나만큼 강할지도 몰라.”
마왕이 주시하고 있는 다섯의 마교도.
아마도 그들이 도마뱀 죄수가 말했던 귀혼오마. 1층 화룡도의 방장과 비슷한 위치일 것 같다.
그중 한 죄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칠 조장, 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호출을 했지?”
[이름: 딜라스틴 쿠레미]
[별호: 귀검신녀]
[종족: 그레이엘프], [클래스: 절정고수]
[칭호: 천마신교 호법, 귀혼오마 중 일 인]
[HP: 4,100], [MP: 3,600], [근력: 291], [민첩: 210]
[형량: 339년]
[음의 기운이 강력할 때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가문의 무사들이 차고 있는 칼, 그 칼에 묻은 혼령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중원무림의 다양한 검법으로 목숨을 잃은 귀신들과 대화하며 다양한 스승을 얻게 되었답니다. 그들의 원혼을 풀어주느라 너무 많은 무인을 죽여야 했지만요.
귀검. 귀신처럼 검을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귀신이 알려주는 검이란 뜻이랍니다.]
무시무시하게 강한 건 그렇다 치자.
엘프가 무공을 쓴다고?
게다가 천마신교의 다섯 간부 중 하나라고?
물론 푸르가토리움은 온갖 차원에서 죄수들을 잡아온다고 하니까 우주 어딘가에선 엘프가 장풍을 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설정이 짬뽕된 캐릭터를 보듯 위화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귀검신녀는 ‘칠 조장’이라 불린 도마뱀 죄수에게 설명을 듣더니 날 노려보았다.
“그대, 마법사인가?”
대답을 잘해야 할 분위기인데?
상대의 클래스는 무려 ‘절정고수’다.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내 입은 항상 멋대로 움직인다.
“통성명을 하려면 먼저 당신 이름부터 밝혀야죠. 여긴 강호의 도리가 완전 땅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엘프 귀검신녀는 피식 웃더니 답했다.
“사과하지. 귀검신녀 딜라스틴이다. 이 층에 머물면서 본녀의 별호를 모르는 이가 있을 줄 몰랐느니.”
“슈바인 스트링거. 그냥 죄수입니다.”
“내 수하에게 마법을 썼다던데?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겠는가.”
“아니. 안 보여줄 건데요. 서커스하러 여기 온 거 아니거든요.”
실은 MP가 다 떨어져 못 보여주는 거지만.
그런데 문득 느껴지는 충만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MP: 10/10]
어? 그새 완전히 차올랐다고? 불과 몇 분 만에?
저절로 회복될 리 없는 마력 수치가 충전된 것에 놀라고 있는데 귀검신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목검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힘 낭비를 하긴 싫지만 숭고한 대전의 무대를 어지럽히는 것들은 치워야겠지.”
귀검신녀가 태평한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귀영풍참(鬼影風斬).”
신속의 참격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왔다. 하지만 그 공격은 내 코앞에서 장벽에 부딪힌 듯 폭발하며 무력화됐다.
꾸아아아앙!
망토를 펄럭이는 마왕이 내 옆에서 손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귀검신녀의 일격을 오의 ‘허공분쇄마탄’으로 받아친 것이다.
“그래, 분명히 마법처럼 보이는군. 그렇다면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겠지.”
시퍼런 안광을 발하는 귀검신녀가 검을 하늘로 쳐들며 호령했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쳐라!”
“존명!”
오백의 마교도들이 쾌속의 동작으로 포위진을 형성했다.
단순히 둘러싼 것이 아니다.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공기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짐승의 아가리에 들어와 있는 기분.
“젠장. 아무래도 우릴 말려죽일 모양인데?”
“일단 몸을 빼내자, 용사. 내가 길을 뚫겠다.”
제르비어스가 포탄처럼 마교도들의 진영에 뛰어들었다. 나는 현란하게 나부끼는 마왕의 망토를 눈에 담으며 따라붙었다.
녀석은 내게 말했다.
마그마 볼에서 나와 맞붙었을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분하긴 하지만 그건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마왕군 폭렬마법]
[2급 오의 ‘지옥파쇄포(地獄破碎砲)’]
날 상대할 땐 쓰지 않았던 강력한 마법들을 구사하며 마교도들을 날려 보내는 제르비어스였다. 육중한 볼링공이 볼링핀들을 날려 보내는 형국이었다.
“어어?”
그런데 그 볼링공들은 쉽사리 날려 보내지지 않았다. 마왕의 일격을 얻어맞았음에도 허공을 딛고 다시 돌아온다거나, 한 명이 나가떨어지면 지면에서 다른 교도가 솟구쳐 올라와 빈자리를 채워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천라지망이라는 것의 위력인가.’
쏟아 내리는 폭포를 손바닥으로 걷어낼 수 있을 리 없다. 천라지망이란 진법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우리를 천천히 옥죄어왔다.
결국 제르비어스의 전진은 암석질의 피부를 한 마교도의 철산고(鉄山靠)에 막히고 말았다.
나는 뒤로 밀려나는 녀석의 등을 받치며 말했다.
“무턱대고 전진은 위험해. 다른 수를 생각해 보자.”
“내 생각엔 멈춰서 있는 게 제일 위험할 것 같은걸.”
“나한텐 순간 이동의 권능이 있어. 하지만 친구의 옆으로만 전이할 수 있지.”
“그 말은…….”
“내가 놈들의 이목을 끌어볼 테니까 어떻게든 너 혼자 몸을 빼내 봐.”
마교도들의 포위망은 결코 내부에서 뚫어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내 쪽에서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목을 분산시킬 각오였다.
맷집 하나만큼은 내가 마왕보다 강하고 순간 이동이라는 권능도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지평선이 말 그대로 터져나갔다.
보이지 않는 거인이 발길질이라도 하듯 마교도들이 펼친 포위망의 후열이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뭐야. 누구지?
내가 멍하니 서 있자 마왕이 하늘을 가리켰다.
“탑 쪽에서 몰려오고 있다.”
마교도들의 숫자에 밀리지 않는 엄청난 숫자의 죄수들이 하늘 위를 날아오고 있었다.
나무막대기에 올라탄 회색 로브의 마법사들이.
지팡이와 칼.
이것은 내가 어떤 게임에서도 보지 못했던 ‘두 장르’의 폭력적인 결합이었다.
“한쪽은 마법? 한쪽은 무공?”
수백 개의 마법진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 마법진들은 제각기 엄청난 위력의 공격마법을 시전했으며 그 결과,
일순간 천지가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