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지팡이와 칼 (1)
지이이이잉.
포탈에서 나오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상쾌하고도 서늘한 공기였다. 여지껏 1층 화룡도의 후텁지근한 열기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던 건지 실감났다.
“이야, 장관이네.”
나와 제르비어스를 맞이한 건 밤 하늘 아래 풀들이 나부끼는 초원의 평화로움이었다.
휘영청 떠올라 있는 보름달이 두 개.
지구에선 있을 수 없는 천공(天空)의 풍경이 소름을 돋게 만든다. 완연한 이세계에 끌려 왔다는 경이로움.
“제르비어스. 삼월초원이면 달이 세 개란 뜻인데, 왜 두 개뿐이지?”
“각 층의 자연현상은 모두 교도관 마음일 거다.”
마왕의 대꾸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최대한 멀리 둔 채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거대한 기암산이 보였다. 산허리에 인공물이 틀림없는 산채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기 건물이 있어. 거리는 꽤 멀지만. 죄수들은 저 곳에 있지 않을까?”
“용사야, 반대쪽도 봐라.”
제르비어스가 가리킨 방향엔 하늘 끄트머리까지 높게 솟아있는 탑이 보였다.
아니, 저걸 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일직선으로 서 있지 않고 구불구불한데도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니 분명 인위적인 힘으로 지탱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층에도 당연히 죄수들이 모여 있을 터.
그 후보군은 아무래도 저 기암산과 괴이한 탑 두 곳으로 좁혀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디부터 가봐야 하나. 이런 게 정말 감옥 맞아?”
내 질문에 마왕이 대꾸한다.
“감옥의 모양에도 제한 따윈 없다. 1층도 원래는 죄수들이 아무 곳에나 땅굴을 파고 사는 섬이었다. 구역을 나누고 독방을 설치한 건 내가 층장으로 올라선 이후에 벌어진 일이지.”
“우리가 온 이 층에도 층장이 있겠지? 당연히 죄수들끼리의 질서도 있을 거고.”
“푸르가토리움에 멀쩡한 녀석은 거의 없다. 하여간 이 감옥에 끌려온 놈들은 왜 그리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1층에 있기엔 지나치게 강했던 마왕. 원래의 세계에서도 수천 명의 용사가 덤벼들었지만 죽이지 못했던 마왕. 그러나 사실은 단 한 명의 용사와도 싸우고 싶지 않았던 마왕.
안쓰러운 녀석.
“응? 너 왜 똥마려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냐. 푸르가토리움의 죄수가 변을 눌리는 없고. 방귀냐? 급하면 냄새 안 나게 저리로 가라. 훠이훠이!”
취소다.
이딴 자식이 안쓰럽다니. 나는 이를 북북 갈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음성이 들려왔다.
[2층의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이 두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교도관 납시셨네. 이봐, 여긴 왜 안내해주는 녀석이 없는 거야?”
0층에선 나태에 짓눌린 쥐가, 1층에선 방장 다이몬 키리스가 나를 인도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2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는 정식으로 입소한 죄수와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등반죄수의 행보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나 보호 역시 하지 않을 것이라 덧붙입니다.]
아, 등반죄수는 이 세계에 난입한 불청객 취급을 받는 것 같다. 교도관 녀석, 일단은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거군.
그런 고로 어딜 가든 자유란 소리겠지?
계속 붙박이처럼 서 있는 건 곤란하다. 우리는 일단 어느 쪽을 먼저 방문할지 정해야 했다.
“어디로 먼저 가 볼까, 마왕. 나는 저기 산.”
“나는 탑이 더 동하는군.”
“좋아.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용사는 바위를 냈고 마왕은 가위를 냈다.
나는 헤벌쭉 웃었다.
“아자뵤!”
“응? 너 왜 좋아하냐? 져 놓구선.”
“뭔 개소리야! 넌 가위고 내가 바윈데!”
마왕은 귀를 후비적대면서 대꾸했다.
“응? 그러니까 당연히 가위가 바위를 구멍 뚫어서 죽이지. 바위는 보를 짓이겨서 이기고.”
“그러면 보는! 보는 어떻게 가위를 이기는데?”
“어떻게긴. 줄기처럼 자신의 몸을 나누고 가위의 손잡이에 넝쿨처럼 얽혀서 이기지. 내가 자라난 세계에선 그래.”
“뭐? 어디서 그런 억지를…….”
표정을 살펴보니 녀석의 코가 씰룩인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다.
“사기 치지 마, 음흉한 자식아.”
하마터면 완전히 속아 넘어갈 뻔했어.
그때, 갑자기 귀를 파던 동작을 멈추곤 진지해지는 마왕이었다.
“잠깐만. 느낌이 이상하다.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나다니. 심상치 않다, 용사야.”
“느닷없이 엄숙한 얼굴로 회피하지 마, 이 자식아. 가위바위보는 무효로 하고 주먹으로 대결하자. 가드 올려, 2차전이닷!”
“아니야. 정말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단순히 능청을 떠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제르비어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자 나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왜. 뭐길래 그래.”
“자, 나의 손을 보아라.”
녀석이 내민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귓밥이 마왕의 손톱 위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으억, 깜짝이야!”
나는 참지 못하고 녀석의 아구창을 날려버렸다.
콰드드드득!
“에이, 더러운 새끼.”
2층으로 올라오면서 내 근력 스탯은 100을 넘어선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르비어스는 별다른 충격을 입지 않았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이상해. 나는 매일 귀를 판다. 이 시각에 이 정도의 귓밥이 나올 리가 없어. 마족의 신체리듬은 고양이처럼 정확하니까 말야.”
“아, 뭐라는 거야. 더럽게!”
“결론은 하나. 이 땅은 비정상적으로 마력의 힘이 고여 있는 곳이라는 것이지.”
마왕 녀석은 주변을 살피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또 뭘 하려고 이러는 거지.
“내 뿔은 마력을 탐지할 수 있어. 이 세계는 심상치 않아. 마력이, 대자연 위에 약동하고 있는 혼돈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다. 여기에도.”
놈은 먼 산을 가리킨다.
“저기에도.”
자세히 보니 수직으로 꺾여 있던 마왕 녀석의 뿔이 눈 앞쪽으로 모여 주변을 탐지하는 것 같았다.
저 녀석 뿔에 그런 기능이 있었나. 그냥 데코레이션인 줄 알았는데.
저러니 마치…… 수맥을 찾는 풍수사처럼 보인다. 저 뿔이 다우징 로드인 셈이려나.
“분명하다. 이건 내가 있던 세계보다 세 배는 강력한 마력이 태동해 있는 땅이다. 그 말인즉슨 이 층에 머무르고 있는 녀석들은…….”
“대단한 녀석들이겠지. 알아.”
“마력의 흐름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물속에 들어와 있다고 하면 유속이 빨라지고 있다는 거지. 절대로, 평범한 현상은 아니다.”
나 역시 어느새 진지해졌다.
“그 흐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데?”
*
우리는 기암산으로도, 괴이한 탑으로도 가지 않았다.
다만 마왕의 뿔이 이끄는 대로 걸었을 뿐이다.
마력의 흐름이 한 곳으로 유수처럼 흐르고 있다면 그 지점이 어디인지 알아둬야 할 것 같다는 게 내 의견이었고 제르비어스도 동의한 것이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초원의 한가운데.
“빛의 넝쿨?”
두 줄기의 광선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로를 건드리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기둥을 감싸고 오르는 넝쿨처럼.
제르비어스가 중얼거렸다.
“두 개의 나선(螺旋)이군. 이 일대의 마력이 모두 저 지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어.”
“뭔가 찌릿찌릿한 기분은 확실히 드네. 이 층의 교도관 이름이 나선기둥 어쩌고 하지 않았냐?”
“맞아. 그리고 저 기둥……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
처음 빛의 나선기둥을 봤을 때 그 크기는 3층 건물 정도의 높이였다. 하지만 코앞까지 다다라서 마주하니 어느덧 5층 정도 높이까지 뻗어 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자라나는 이유를 알겠어.”
“이유?”
“우리가 걸어온 길의 지평선을 봐.”
세 번째 보름달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고로 보름달(Full Moon)이라는 것은 온갖 전설과 민담에서 신비의 장막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동서양의 구분도 없다.
구미호가 산맥 위에서 포효하는 것도, 늑대인간이 털을 곤두세우는 것도 모두 보름달 아래서 이뤄지는 일.
그런 보름달이 세 개나 한 곳에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계속 자라나는 빛의 나선기둥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 게 좋아 보이는데.”
“아니. 위험하지 않아. 내 몸은 어느 정도 사이(邪異)한 것을 판별할 수 있거든? 이 기둥에서 그런 건 느껴지지 않는 걸.”
나는 용기를 내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2층의 열쇠’에 접촉했습니다.]
[열쇠는 현재 달의 힘을 흡수하며 스스로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5시간 45분 뒤에 열쇠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뭐라고오?!
이 기둥이 다음 층으로 가는 열쇠를 뱉어낼 거라고? 그것도 여섯 시간만 기다리면?
내가 메시지를 전해주자 제르비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일이군. 한 층의 열쇠가 여기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 이 세계에 층장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 그렇네. 층장이 없다는 건 어쩌면 이 층은 무주공산이란 거 아닐까. 설마 여기서 기다렸다가 열쇠를 낼름하면 3층으로 튈 수 있는 거야?”
초원의 바람이 내 금발머리를 휘잉 날려 보냈다.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그렇게 간단히는 안 될 거다, 용사.”
“쳇. 나도 알아. 빌어먹을 교도관 놈들이 그렇게 ‘쉬운 길’을 깔아놓았을 리 없지.”
분명히 6시간 안에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예상했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고작 10분도 되지 않아 등 뒤에서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물럿거라! 쟁패의 기둥에 접근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라 일렀거늘!”
세 명의 죄수가 나와 제르비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슬 없이 손목에 채워진 수갑들. 그들은 푸르가토리움으로 끌려온 죄수임에 틀림없었다.
흑색 도포를 똑같이 차려 입은 것에 반해 그들의 외양은 제각각이었다. 가장 앞에 나선 죄수는 붉은 비늘의 도마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마뱀 죄수의 황금색 눈동자가 꿈뻑였다.
“한 녀석은 색목인(色目人). 한 녀석은 머리에 뿔을 달고 있군. 희한한 복색들이로고. 뭣 하는 놈들이냐.”
파충류의 머리를 하고 있으면서 내 눈동자 색깔에 놀라는 거냐? 게다가 의상에 관해서라면 이쪽이 더 황당해하고 있는 걸. 흑색 자락을 휘날리는 도포라니. 운치는 있지만 도저히 죄수복이라 봐주긴 힘들잖아.
“어, 그러니까 우린…… 화룡도에서 왔다.”
“화룡도? 그건 또 어느 문파의 설립지냐.”
세 명의 죄수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도 화룡도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화룡도는 이 감옥의 1층을 말하는 거야. 우린 등반죄수다. 방금 막 이 초원에 떨어졌지.”
“아래층에서 올라왔단 말이냐? 금시초문이로군.”
그러자 도마뱀 죄수의 오른쪽에 서 있던 인간 죄수가 입을 열었다.
“조장, 나는 들은 적이 있소. 가장 약해빠진 죄수들이 배정받는 곳의 이름이 화룡도라지. 그냥 치워버립시다.”
“그런가. 하지만 귀혼오마(歸魂五魔)께서 열외죄수들은 되도록 해치지 말라셨다. 거사를 앞두고 괜한 피를 묻혀서 좋을 것 없다.”
그러자 도마뱀 죄수가 허리춤에 있는 무기를 꺼내서 우리를 가리켰다.
잠깐. 무기라고?
“거기 두 녀석. 살려줄 테니 어서 달아나라. 남쪽으로 가면 열외죄수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 있으니. 여기서 얼쩡댔다간 뼈도 못 추리게 될 거다.”
나는 도마뱀 죄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녀석이 손에 쥔 한 자루의 목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길이는 고작 50센치 정도. 나무를 깎아내 가까스로 무기의 형태만 갖춘 셈이었다. 실전성은 형편없어 보였다.
‘어떻게 할까.’
마그마 볼의 시련을 통과한 죄수는 100년만이라고 했다. 내 직전 통과자인 제르비어스는 층장이 되어 화룡도에 머물렀으니 2층의 죄수들이 화룡도를 잘 모르는 것도 타당하다.
하지만 이 나선기둥이 열쇠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건 아까웠다.
그때.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3. ‘관객석 사수’]
[용사는 삼월초원의 열쇠를 발생시키는 쟁패의 나선기둥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죄수들이 용사를 적대하고 있군요. 그들의 감시를 피해 기둥의 근방 3킬로미터 안에 머무르십시오. 하지만 도망쳐도 리스크는 없답니다.]
[기한: 6시간]
[보상: 민첩 +30]
실패의 페널티가 표시되지 않는다.
즉, 이 퀘스트를 무시해도 내가 손해 보는 일은 없다는 뜻. 하지만 보상으로 약속된 민첩 30의 스탯은 무척 군침이 돌았다.
층이 달라지니 수상쩍은 교도관장의 배포도 제법 커졌잖아?
고민을 끝낸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안됐지만 그 말은 들어줄 수 없겠는걸. 이쪽도 나름대로의 사정이란 게 있어서.”
“뭐라? 말을 듣지 않겠다면 무력행사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뼈를 못 추린다고 했지?”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 Lv. 2’를 발동합니다.]
나는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파천황의 투기를 온몸으로 내뿜었다.
퀘스트의 보상도 보상이지만 새로운 층에 오르자마자 이리저리 휘둘릴 순 없잖아?
“신경 꺼라. 내 뼈는 내가 알아서 추릴게.”
그러자 흑도포를 입은 세 죄수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녀석들에게 붙은 칭호는 ‘일급무사’. 한 번 손을 섞어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 체력수치는 정점인 9,999를 찍었다. 당당히 나설 만했다. 어지간한 죄수들의 공격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도마뱀 죄수가 목검으로 중단세를 취하며 일갈했다.
“화를 자초하는구나. 좋다. 내 친히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지엄함을 이 일검으로 새겨주도록 하마.”
“응? 천마…… 뭐?”
지이이잉.
녀석이 든 목검이 푸른색 광택을 내뿜더니 1미터를 넘어서는 ‘무형의 검신’을 만들어냈다.
생각지 못한 사태에 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잠깐만. 검기(劍氣)를 쓸 수 있다곤 안 했잖아!’
쉬이익!
마교의 일급무사가 휘두른 검기가 용사의 동공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