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30화 (30/300)

#030. 우주 최악의 죄수

“죽어! 죽어, 이 새끼야!”

나는 곰인형의 목을 왼손으로 조르고 있는 상태에서 무자비하게 녀석을 두드려 팼다. 털가죽이 찢어지고 그 안에 뭉쳐 있던 솜이 거실 이곳저곳에 비산했다.

워낙 격분에 차서 매질을 해서인지, 곰인형 근처의 소파에도 스크래치가 날 정도였다.

“어이어이. 용사, 너 괜찮은 거냐?”

등 뒤에서 제르비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녀석에게 대꾸해줄 여유는 없었다.

“가만히 잘 살고 있던 나를! 잘도 이딴 감옥에 처박았어?! 뒈져, 뒈지라고오!”

곰인형의 목에 달라붙어 있던 붉은색 리본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러자 녀석의 눈동자인 갈색 플라스틱이 툭하고 끊어져 나와 카페트 위에 나동그라졌다.

오체분시된 곰인형의 처참한 잔해를 내려다보며 나는 한참을 씩씩댔다.

잠시 후 소파 왼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화가 풀리셨나요? 수감자여.”

“이이이익!”

순식간에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곰인형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의 귀를 덥썩 붙잡아 내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아니. 하나도 안 풀렸어.”

“원하신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저를 망가트리실 수 있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공격은 제 존재의 본질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해요. 저야 지겨움을 느끼지 못하므로 이곳에서 천 년 동안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지만 당신과 친구 분은 그렇지 않을 텐데요. 아닌가요?”

곰인형, 교도관장의 말이 맞았다.

초월적인 존재가 만들어낸 환상 속 공간에서 아무리 분풀이를 한다 한들 의미가 없다. 그저 열 받는 상대를 꿈속에서 한 번 쥐어박는 것만큼의 통쾌함도 주지 못할 것이다.

“어쩐지 타격감이 없더라니.”

나는 소파에 프라이팬을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카페트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비로소 곰인형 녀석과 눈높이가 맞았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지 않나요?”

“있지. 너무 많아서 미리 목록을 준비해 놓지 않은 게 한이 될 정도야.”

교도관장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 자식, 웃고 있는 건가?

“물어보세요. 제가 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릴게요.”

“먼저, 우리 집을 흉내 내고 있는 여긴 정확히 어떤 곳이지?”

“푸르가토리움의 아홉 층을 서로 연결하는 징검다리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거예요. 1층인 화룡도와 2층인 삼월초원(三月草原)의 중간 지대인 셈이죠.”

삼월초원…… 그게 우리의 다음 스테이지인 모양이다.

“등반죄수들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건가?”

“아니요. 그렇지 않답니다. 당신의 경우가 워낙 특별해서 정보를 처리할 여유가 필요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원래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열쇠는 단 한 명의 죄수에게만 허락되는 물건. 그런데 여러분은 둘이서 그 혜택을 누리고 있지요. 그건 엄연히 감옥의 규칙을 어기는 행위예요. 그 처분을 어떻게 할지 판단하기 위해 제가 온 것이지요.”

“처분?”

“슈바인 스트링거. 묻겠습니다. 당신은 죄수 제르비어스 폰타인에게 ‘함께’ 층을 오르자고 했지요. 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죠? 감옥이 그런 편법을 허락할 거라 믿은 이유가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등반죄수의 자격은 내가 얻은 것이다. 제르비어스에게까지 그것이 적용될 거라는 생각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런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는 그게 가능할 거라 믿었다.

어째서?

“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오른손이 해줄 겁니다. 거기 새겨져 있는 문신이 벌이는 앙큼한 장난이지요.”

“이 문신이?”

나는 오른쪽 손등에 새겨진 사자의 문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0층의 대기실에서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와 마주쳤을 때 그의 의지를 받아들이면서 생긴 것이었다.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힘 때문이란 거야?”

“그래요. 푸르가토리움의 역사를 통틀어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던 그 전사가, 죽은 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과의 계약을 통해 편법을 가능하게 만든 거예요. 등반죄수와 그의 친구 목록에 올라 있는 죄수를 인과율의 끈으로 묶어 놓는 방식이죠. 파천황다운 투박한 방법이지만 효과적이었단 건 인정할게요.”

“편법이든 뭐든, 난 전부 이용할 거다. 이 망할 놈의 감옥을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만약 제가 당신의 ‘편법’을 빌미로 삼아 여기서 두 분의 존재를 지워 버린다면요?”

교도관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농밀해졌다. 방금 내뱉은 자신의 말에 허언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등 뒤에 서 있는 제르비어스가 마기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도 느껴진다. 마왕 또한 곰인형의 협박에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나는 태연했다.

“블러핑하지 마. 넌 우릴 못 건드려. 아니, 정확히는 안 건드리는 거겠지만.”

“호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이 감옥에 들어온 이래 내 눈에만 보이는 어떤 ‘창’이 있거든? 퀘스트란 명목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기도 하고, 다른 죄수들에 대한 정보를 요약해서 전달해주기도 해.”

“그런데요?”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는 네놈의 말투. 그게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난 네놈을 만나서 대화한 게 처음이니, 그런 기시감이 든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나는 손가락을 들어 곰인형의 배를 콕 찔렀다.

“너지? 내 눈에 보이는 정보창을 만들어내는 녀석.”

“……직감만으로 찍은 건가요?”

이것이 게임이었다면 플레이어에게 전달되는 퀘스트의 내용, 몬스터에 대한 설명 뒤엔 시나리오 작가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전문 스크립터라든지.

그러니 이 감옥 어딘가에도 내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작성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절반은 찍었어. 하지만 네가 작성자가 아니라 해도 이 감옥을 꾸려나가는 녀석이라면 최소한 작성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인하지 않겠어요. 맞답니다. 그건 제가 한 일이에요.”

“그랬군. 어쨌든 내가 화룡도에서 하루만에 뒈지지 않도록 성장 시스템을 붙여준 녀석이라면 굳이 여기서 날 지워버릴 이유가 없지. 다른 흉계가 있을 테니까.”

“흉계란 말은 너무하네요. 하지만 용사를 키우는 것에 은근히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점도 고백해야겠군요. 처음엔 당신에게 ‘익숙한 방식’이기에 선택했을 뿐이지만.”

“왜지? 화룡도의 다른 죄수들이 나처럼 퀘스트나 인벤토리를 다루는 건 보지 못했어. 어째서 나만 특별취급하는 거야?”

“그건 말씀 드릴 수가 없군요. 당신이 아직 답을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계속 감옥을 오른다면 알게 될 겁니다.”

내 짐작이 맞았다.

교도관장.

이 녀석은 분명 내가 계속 감옥을 오르길 바라고 있다. 첫 번째 메인퀘스트의 내용이 무려 ‘탈옥’이었다.

하지만 그림이 이상하잖아. 교도관장이 죄수의 ‘탈옥 시도’를 조장한다는 건 말야.

“아무래도 넌 내가 푸르가토리움을 ‘탈옥’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대체 왜 날 잡아온 거지? 마인학살죄니 뭐니 하는 얘길 꺼내면 다시 프라이팬을 들어줄 테다.”

“마인학살죄는 저의 억지가 맞아요.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죠. 그런 억지를 부려서 가상현실 속 캐릭터의 육신을 당신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화룡도조차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그냥 안 데려오면 되잖아!”

“그럴 순 없었어요. 왜냐하면,”

곰인형의 눈동자가 번쩍하고 빛났다.

“당신은 우주 최악의 죄를 지은 죄인이니까.”

나는 예상치 못한 녀석의 대답에 기도가 턱 막혀오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 녀석이 하는 말에 조금도 거짓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휠체어에 앉아 게임만 파고 있던 인간 박상식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냐고!

“그, 운명의 여신을 모욕한 죄라는 걸 말하는 거야? 도대체 그게 무슨 죄인데! 설마 네가 운명의 여신이냐?”

“하하. 아니요. 그분과 저의 영역은 엄격히 구분돼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운명의 여신을 모욕한 것은 분명히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도 내가 감옥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될 일이고?”

“글쎄요. 그것은 당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변수이며 여러 번의 행운도 중첩돼야 가능할 걸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 당신이 스스로의 죄를 기억해내지 못하면…… 당신의 영혼은 절대로 푸르가토리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뿐.”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빌어처먹을 놈이.

그러자 곰인형이 팔 한쪽을 들어 주방의 냉장고를 가리켰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군요. 아무튼 저는 당신의 ‘편법’이 정당한지 판정해야 합니다. 그걸 위해서 저 냉장고 윗칸을 열어보기를 권해요.”

나는 녀석을 한참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냉장고의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는데.

“잠깐만, 용사. 그 물건 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망설이는 내 귓가에 교도관장의 일침이 파고든다.

“그걸 열어보기 전엔 두 분은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이 우주가 사멸할 때까지 여기 갇혀 계셔야 할 걸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지겨움을 모르고요.”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

나는 보란 듯이 냉장고의 문짝을 열었다.

그리고 텅 빈 냉동고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것’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야만 했다.

“사람의…… 손가락?”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손가락이었다. 내 것과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이 굵은 손가락이었지만 분명 인간의 그것이었다.

그러자,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을 가호하고 있는 파천황의 권능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권능 ‘반갑다, 친구야’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당신이 하루 동안 친구의 곁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횟수가 1회에서 3회로 늘어납니다.]

르팔타커스의 손가락이었나.

그것이 밝은 빛을 내뿜더니 내 오른손의 문신으로 스르륵 흡수되었다.

뭔가 레벨업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좋아해야 되는 건가?

“그렇게 된 것이군요. 알겠어요. 슈바인 스트링거, 그대가 파천황의 적법한 계약자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권능으로 ‘친구들’과 함께 감옥을 등반하는 것을 교도관장의 권한으로 허용하겠어요.”

갑자기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존재의 격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대신에 제약을 걸도록 하지요.”

“제약?”

“당신이 한 층에서 다음 층으로 데려갈 수 있는 친구는 단 한 명. 오직 한 명의 죄수만 데리고 올라갈 수 있는 걸로 하겠습니다.”

“뭐야, 그 따위 룰은?”

“숫자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당신은 수천, 수만 명의 죄수를 친구 목록에 넣어 인과율의 끈으로 묶은 후 등반을 하겠지요. 그것은 폭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사태. 교도관장으로서 절대 용납치 못하는 일입니다.”

“한 층당 한 명씩이라는 거지.”

“네. 즉, 당신이 최종층인 9층까지 오른다고 하더라도 최대의 죄수 동료는…… 8명이 되겠군요.”

곰인형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녀석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잠깐만! 아직 난 할 말이 남았…….”

“걱정 마세요, 수감자여. 당신이 계속 열쇠를 쟁취해 감옥을 오르면 또 저를 만날 일이 있을 테니까요. 나가는 문은 당신의 방문입니다. 어딘지 알려줄 필욘 없겠죠? 그럼 행운을 빕니다.”

“야잇!”

허공에 떠오른 곰인형을 잡아채 보려 했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녀석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

“조심하세요, 용사여. 당신의 언어를 빌리자면 1층 화룡도는 그저…… 튜토리얼에 불과하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주변을 살피던 제르비어스가 말했다.

“확실히 아무런 기감도 느껴지지 않아. 교도관장은 이제 여기에 없다, 용사.”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열 번 정도 해체해 주는 건데.”

“그나저나 너 르팔타커스 시온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거냐? 나 역시 파천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은 게 있다만.”

나는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진지하게 듣고 있던 마왕은 느닷없이 벌컥 화를 내었다.

“빌어먹을. 그거 완전 초특급 기연(奇緣) 아니냐? 하여간 용사라는 족속들, 재수 없다. 그렇게 위대한 전사의 영령과 계약을 맺는 행운을 누리다니.”

“어, 화를 내는 게 그 부분이냐?”

“열 받잖아! 마왕이 그런 기연을 주웠다는 얘긴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 허구한 날 용사들한테만 몰빵 되지!”

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괜찮아. 날 만난 게 너의 기연이다.”

“악연 아니고?”

그렇게 몇 번 투닥거린 다음.

용사와 마왕은 좁은 계단 앞에 섰다.

삐걱대는 계단을 오르자 익숙한 복도가 나를 맞이했다. 왼쪽에는 화장실, 오른쪽에는 여동생 상희의 방.

빌어먹을 교도관장 녀석. 정말 완벽하게 재현해 놨네.

“한 번 열어보지 그러냐?”

상희의 방문 앞에서 멈춰선 내게 제르비어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해져선 안 돼. 아직은 아니야.

“이 공간은 어차피 가짜야. 내가 돌아가서 만나야 할 여동생은 이 문 뒤에 없어.”

어릴 적 내가 사용했던 낡은 방. 그 문틈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포탈이 우릴 맞이했다.

“그럼 갈까, 용사.”

“그래, 그놈이 바라는 대로 계속 감옥을 올라주지.”

그렇게 포탈을 넘고 나와 제르비어스가 도착한 곳은,

삼월초원.

세 개의 달이 뜨는 초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