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꼬리를 드러낸 삵 (2)
나는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기억을 방금 엿보고 왔다.
그 시점에서 녀석의 내부에서 뭔가가 툭 끊어져 버렸다.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용사의 도전이, 인간들의 침공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희망’ 때문이라고 생각한 마왕은 어긋난 생각에 사로잡혔다.
“희망이 없으면 절망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뭐?”
내가 녀석의 기억을 엿본 것을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
나는 그래서 조금 말을 돌리기로 했다.
“등반죄수가 되겠다고 한 나를 비웃었잖아. 그리고 노역량을 채우지 못하면 계속 형량이 늘어나는 형벌을 이용하기로 한 거다. 교도관을 도와 층장으로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언제나 각인시켜 죄수들의 폭동 가능성을 차단했지.”
그것이 제르비어스가 1층장으로서 한 것의 전부다.
희망을 거세하는 것.
더 나은 내일을 품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로써 죄수들을 살육의 고통에서 지켜내는 것.
녀석은 화룡도의 강맹한 지배자임과 동시에 엄격한 보호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우리 7번 방 녀석들이 생겨났어.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결격 사유가 있어서 노역량을 채울 능력이 안 돼. 네가 만든 화룡도 안에서 녀석들은 영원히 갇혀 있을 판국이라고.”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냐.”
“이곳에서 벗어날 꿈을 꾸는 죄수들을 너는 폭력으로 묶어두었어. 네 울타리는 모든 죄수들의 안녕을 담보했겠지.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길도 막아버린 거다.”
이쯤에서 다이몬의 표현을 한 번 빌려보도록 할까.
“고여버린 용암이 된 거야. 네가 만든 울타리는 뒤틀려 있어.”
“뒤틀려 있어도 상관없다. 그게 최선이라면. 용사, 너는 모른다. 온 세계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덤벼드는 것의 신물남을.”
아니.
방금 전에 엿보고 왔어.
그래서 나도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제르비어스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등반죄수가 되면 고통의 무게가 늘어날 뿐이야.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헛된 꿈에 죽어간 인간들처럼, 층을 올라가 탈옥할 수 있길 바라는 죄수들을 내가 지켜낸 거지.”
“하지만 처음으로 예외가 생겼지. 나는 지켜내지 못했잖아?”
“부인할 수 없군.”
“승자에게 생살여탈권을 주는 것이 네 방식이라고 했지. 좋아. 네 목숨줄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잠자코 나를 따라와라. 그리고 옆에서 지켜 봐. 내가 어떻게 이 감옥 속에서 천공돌파를 해내는지.”
내 일장연설에 마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사슴이 보고 싶었다.”
전혀 엉뚱한 단어를 꺼냈다.
“뭐?”
“언제였던가. 마왕성이 답답해진 나는 인간세계로 내려가 평화로운 초원에 발을 디딘 적이 있다. 어린 산양들이 마시는 강물에 발을 넣었더니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 모든 초원의 짐승들이 죽어나가더군.”
마왕의 타고난 신체.
오래 접촉하는 것에 강력한 저주를 심는 능력.
“내가 바라던 것은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그 아기 산양들이 배부르게 풀을 뜯다가 어미를 찾아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던 것일진대.”
녀석은 우주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세계를 떠올렸는지 잠깐 회한에 잠긴 눈빛으로 말이 없었다.
“용사 간판을 잠깐 내렸다고?”
“그래, 너도 마왕 간판을 내릴 수 있는 세계가 어딘가 있을 거야. 약속하지. 그런 곳이 없다면 내가 있는 지구도 제법 괜찮거든?”
“나는 늘 너희 용사놈들이 부러웠다. 주어진 사명에 아무런 의심도, 번민도 없이 내게 칼을 들이대는 용사라는 부류들. 그 단순함이 경멸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질투가 나서 뿔이 파르르 떨렸지.
나도 용사로 태어났더라면.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태산을 조각내지 않고,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제르비어스는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내게 붉은 눈동자를 보여줬을 때는 결심을 내린 얼굴이었다.
“좋다. 마왕 간판 잠깐 내리고, 층장의 완장도 찢어버리지. 다시 죄수로 돌아가는 거야.”
나 역시 언제나 혼자였다.
당연하다. 동료와 함께 하는 게임이어도 알파 테스터는 언제나 솔로플레잉을 해야만 했다. 현실 세계에서도 나는 친구가 없었다.
화룡도에서 7번 방의 녀석들을 친구로 삼게 되었지만 녀석들에게 함께 가자 할 수는 없었다. 레벨업도 할 수 없는 녀석들에게 나처럼 위험한 모험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제르비어스, 이 녀석은 다르다. 진작에 다음 층으로 올라가 경쟁해도 될 만큼 강력한 녀석이었으니까.
“내게 왜 용사들을 죽였느냐고 물었지. 이번엔 내가 묻겠다. 너는 왜 마왕들을 학살했지?”
내가 마왕들을 죽인 것이 0과 1로 이뤄진 가짜 데이터들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걸 이 녀석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가상현실 게임에서 한 일이란 걸 말하면 오히려 날 광인으로 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최대한 진솔한 대답을 선택했다.
“그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뭐?”
“신의 부름을 받았다거나, 세계를 지키겠다거나, 하다못해 공주를 구하겠다고 나선 게 아니라고.”
나는 밥벌이를 위해 게임 속에서 용사 짓을 했다.
내가 먹을 하루 세 끼를 위해서. 여동생이 등굣길에 신고 다닐 신발을 사기 위해서.
한 마디로 생계형 용사였단 뜻이다.
고장 난 두 다리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게임 속에서 보수를 받고 알파 테스터로 누볐다.
“너나 나나 먹고살자고 한 짓이었단 얘기야.”
마왕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한 이야기에 일말의 거짓이라도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기색을 찾지 못했는지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용사. 너의 친구가 되겠다.”
그렇게 마왕이 내 손을 잡았다.
[죄수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새로운 친구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스킬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탈옥의 첫 단계가 스푼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두 번째는 동료 모으기지.
*
그 직후 제르비어스는 충격적인 이야길 했다.
“뭐? 다시 말해봐.”
“등반죄수는 그 층의 시련을 통과했을 때 선택지를 받는다. 이 층을 지배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형량이 두 배로 곱해지면서까지 위로 올라갈 것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형량이…… 두 배로 뛴다고?”
엿듣고 있었는지 때마침 교도관이 음성이 울려 퍼졌다.
[1층의 교도관이 죄수 제르비어스의 말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줍니다. 등반죄수는 층을 오를 때마다 형량이 두 배로 증가됩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뚠 아티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뚠. 어째서 여기엔 간수가 없지? 왜 같은 죄수가 죄수를 관리하는 거야?’
‘음. 네가 말하는 간수의 역할은 뭔데? 간수가 왜 있어야 하는 건데?’
‘왜냐니. 당연히 죄수를 통제하고…….’
‘그러니까 왜 통제해야 하는데?’
‘통제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나잖아. 폭동이 일어나면 그 틈을 타서 탈옥을 할 거고.’
‘탈옥? 그걸 왜 하는데?’
‘으아아아아아악!’
그때는 그냥 뚠이 겁이 많아서 그런 대화가 이어진 줄 알았다. 이제야 나는 그 우스꽝스런 말꼬리 잡기의 본질적인 문제를 알았다.
이곳의 죄수들은 탈옥을 꿈꾸지 않는다.
왜냐면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형량이 두 배씩 곱절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주의 흉악한 죄수들. 형량을 마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있기만 하는 녀석들.
재빠르게 계산기를 돌려본다.
지금 내 형량은 100년.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200년.
“3층에선 400년.
4층에선 800년.
5층에선 1,600년.”
마왕이 내 말을 받는다.
“그리고 6층에선 3,200년.
7층에선 6,400년.
대망의 8층에선 12,800년까지 올라가겠지.”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보통의 죄수들과 달리 그의 형량에는 ‘??,???’ 표시가 띄워져 있었지. 형량이 네 자릿수를 넘어서서 그렇게 표현된 거라면 말이 된다. 층을 오를 때마다 르팔타커스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형량을 감당하기로 했을 것이다.
매번 층을 오를 때마다 의지는 깎였겠지.
거꾸로 두려움은 더해졌을 거고.
그렇게 몇 만 년의 형량을 어깨에 짊어졌을 꼭대기 층에서 마지막 관문을 이겨내지 못해 무너져버린 그의 좌절감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진다.
*
아니. 그건 그렇고.
두더지의 몸에 수분이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거냐.
“이렇게 바로 올라가는 거야, 슈바인?”
뚠 아티르가 내 눈앞에서 울먹이고 있다.
제르비어스는 다음 층으로 올라가면 다시는 7번 방의 동료들을 못 볼지 모르니 작별인사 할 시간을 줬다.
“켈켈켈! 사나이끼리의 이별에 눈물은 치우도록 해라.”
비르카는 여전히 짐짓 호탕한 척을 하고,
“시끄러워, 해골바가지. 너 여자인 거 밝혀졌으니 이제 사나이 타령 그만 해라.”
디멜은 고드름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냉소한다.
“자네가 우리 방에 해 준 것들을 잊지 못할 걸세. 우리는 아주 소중한 승리의 경험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올쿠레의 저 인자한 웃음.
그래.
여기가 내가 있었던 7번 방.
약하고 엉뚱한 죄수들밖에 없지만 그래서 모두가 똘똘 뭉쳐 내게 힘이 되어준 소중한 녀석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저 혼자 등반 죄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충격발언을 한다.
“1층장 제르비어스 폰타인과 함께 올라갈 겁니다.”
뚠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지독한 협박을 했던 대상과 내가 함께 한다니 당연히 기겁했겠지.
다만 올쿠레는 놀라지 않았다.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모양이군.”
“네. 일단은 그래요.”
“알겠네. 그토록 막강한 자와 함께라면 걱정을 조금 덜 수 있겠어.”
방장과 1층장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리면 화룡도에는 다시 혼란이 올 것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고.
나 없이 이 친구들이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딴 걱정일랑 집어치워. 우리 방은 마그마 볼의 우승자다. 시비 거는 녀석들이 있다면 이제부터 완전히 달라진 저항을 맛보게 될 거야.”
디멜이 여전한 얼음냉소로 나를 다독였다.
아마 분명히 걱정이 되면서도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 꺼내는 말이겠지.
하여간 겉과 속이 다른 놈 같으니.
괜스레 아랫배가 뜨거워져 나는 서둘러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영원한 이별은 아닙니다.”
반드시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그렇게 7번 방을 나와서 나는 화룡도의 꼭대기에 위치한 화산으로 다시 올라갔다.
마그마 볼을 다시 집어삼킨 화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용암을 내뿜고 있었다.
제르비어스가 그 앞에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헬 판테라 ‘밍밍이’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주인의 떠나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모양이다.
내가 물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뭐지?”
“열쇠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불러내라.”
제르비어스의 말대로 행하자 내 손등 위에 있던 9개의 칸 중 좌상단의 유일한 불빛이 화아악 밝아졌다.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화신체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구나.
죄수를 다음 층으로 올려 보내려면 그 층의 교도관이 친히 행차하신다는 건가.
나와 제르비어스는 현신할 1층 교도관의 화신체를 기다렸다.
제르비어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디 짱박혀 있는지 화룡도 전체를 뒤져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교도관인데. 드디어 얼굴을 볼 수 있겠군.”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는 없었다. 화룡도의 용암이 내뿜는 기포소리만이 귓가를 간지럽힐 뿐.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그리고 죄수 제르비어스 폰타인. 다음 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와 제르비어스는 동시에 펄쩍 뛰어올랐다.
낭랑한 목소리의 진원지는 놀랍게도……
헬 판테라의 입이었다.
마왕의 턱은 거의 빠질 지경이었다.
“미, 밍밍아? 네가 어떻게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