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6화 (26/300)

#026. 마인학살자 vs. 용사학살자 (3)

폭발하는 화산을 향해 걸어가는 뚠의 뒷모습은 진정 웅장하였다. 그것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게임 속 주인공보다도 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네가 잘못 봤어, 제르비어스. 저 녀석은 툭하면 벌벌 떨지만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진 놈이야.”

뚠 아티르.

레이스 오르콰이움의 윽박에 모든 죄수들이 질겁해 있을 때 오직 저 녀석만이 굳어 있지 않았다. 자칫하면 오르콰이움에게 지독한 꼴을 당할 위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성검 아론다이트를 땅속에 숨겨주었지.

공포를 품에 안은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뚠은 쫄보처럼 보이지만 쫄보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최후의 대미를 양보할 수 있었던 거라고.”

천천히.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으로,

뚠 아티르가 결국 마그마 볼을 분화구 아래로 집어 던졌다.

풍더엉!

“슈바인! 내가 해냈어어.”

기쁨에 방방 뛰지만 점프의 높이가 1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녀석은 우주에서 가장 섹시한 두더지였다.

“그래! 장하다, 7번 방의 에이스!”

“에, 에이스는 이만 무서우니까 퇴장할게!”

겁이 좀 많은 게 흠이지만.

[마그마 볼의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7번 방장 슈바인 스트링거 외 4인의 도전은 성공하였습니다.]

화룡도 전체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를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층장 제르비어스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얼굴로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을 뺐다.

우리를 둘러싸던 보라색 마기는 희미하게 흩어져 버렸다.

“그런가. 내가 졌군. 살면서 처음으로 용사에게…… 패배한 것인가.”

띠링!

[메인 퀘스트 #3 ‘마그마 볼’을 완료하였습니다.]

[새로운 칭호 ‘마그마 볼의 우승자’가 추가됩니다.]

[보상으로 근력 스탯 30, 민첩 스탯 30이 오릅니다.]

크하.

플레이어였을 땐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였던 레벨업이 이렇게나 달콤할 줄이야.

층장 제르비어스의 오른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응? 이게 뭐야.”

녀석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100년 만이군. 이 빛을 보는 것이.”

그 빛은 가루처럼 허공을 떠다니다가 내 오른손 손등으로 모여들었다.

가로 3개, 세로 3개.

내 손등에 총 9개의 동그라미가 생겼고 그중 하나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또 연이어 울리는 종소리.

띠링!

[메인퀘스트 #2. ‘열쇠 수집’을 1/9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은 1층 화룡도의 열쇠를 얻었습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보상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스탯 하나의 x2 효과, 혹은 스탯 하나의 한계돌파]

고민의 여지가 없다.

지금 불균형의 용사라 할 수 있는 내게는 파괴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만전불패의 체술과 검술을 갖고서도 상대에게 ‘딜’을 넣지 못해 얼마나 고생했느냐 말이야. 그걸 대체해 줄 폭탄도 화룡도에서 버티느라 다 소모했고.

내가 근력 스탯을 마음속으로 선택하자 힘이 용솟음쳤다.

제르비어스에게 덤볐을 때의 근력 스탯은 21. 거기에 마그마 볼의 우승 보상으로 30이 더해져 51. 그게 2배로 곱해지자 만족할만한 수치가 완성됐다.

[슈바인 스트링거]

[칭호: 마그마볼의 우승자]

[HP: 301/9,999], [MP: 10/10], [근력: 102], [민첩: 40]

화룡도 입소 당시 고작 10의 근력을 갖고 있던 내가 이만큼이나 강력해졌다. 이제야 수수깡으로 상대를 때려야 했던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정도면 비만고블린 차카 도기노브와 비슷한 수준의 근력까지 올라온 셈.

“방금 너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달라졌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내가 그걸 알려줄 것 같냐. 끙차.”

나는 성검 아론다이트를 다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제야 나는 가벼워진 등 뒤를 실감하며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하여 마왕과 나란히 누워 화룡도의 먹구름 낀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게 됐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탈진했기 때문이다.

[용사의 육체가 상극인 존재와 떨어져 상태 이상 ‘저주’가 해제됩니다.]

계속 나를 짓누르던 두통이 멀끔하게 사라졌다.

조금만 더 길었다면 미쳐 버렸을지도.

“후아. 일단 아홉 개 중 하나는 해냈군.”

그런데 이상한 건 마왕이었다.

녀석은 충분히 일어나서 다시 나를 공격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다만 분노가 사라진 차분한 어조로 물었을 뿐이다.

“진심으로 9층까지 오르려는 거냐. 약하디약한 몸으로?”

“응.”

“왜 그렇게 자신에 차 있지?”

“네가 만난 다른 용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있거든. 계속 강해질 수 있는 ‘잠재력’이. 방금 봤잖아?”

제르비어스는 눈을 감았다.

“나를 죽이면 네가 이 화룡도의 층장이 될 수 있다. 죽여라.”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죽이라고? 너, 진짜 죽고 싶어?”

“나는 지금껏 용사들에게 그래왔다. 내가 승자였기에 패자의 생살여탈권을 좌우해 왔지.”

“그렇게 대뜸 죽여 달라고 해도 말이야…….”

“그 대신 다른 방장들은 그냥 둬라. 그동안 내가 만든 규율에 충성했을 뿐 방장들에게 다른 죄는 없으니까. 마그마 볼에서의 원한도 경기장 안에서 끝내주었으면 한다.”

“응?”

“어지간한 일은 다이몬이 알아서 해 줄 거다. 그 녀석은 고지식하긴 하지만 명예를 아는 사내니까. 이자나르와 오르콰이움이 가끔 층장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다. 그때는 오히려 양쪽의 호승심을 자극해 서로 충돌시키는 걸 권한다.”

“어이어이, 잠깐만.”

“그리고 이건 권유가 아닌 부탁이다. 내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던 헬 판테라를 돌봐다오.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여기서 멈춰야겠다.

삭신이 쑤셔 죽겠는데 이 녀석이 열불 나게 하네.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소리쳤다.

“그만하라고, 이 자식아! 내가 널 왜 죽여?”

그러자 제르비어스 역시 스프링처럼 상체를 튕겨 올렸다. 마치 채식주의를 선언한 호랑이를 보는 시선이었다.

“마왕을 꺾었는데, 용사가 마왕을 죽이지 않는 거냐?”

도대체 이 녀석이 온 세계는 어찌 생겨먹었던 거냐.

일단 그걸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너는 999명의 용사를 죽였다 했어.”

“그래.”

“사실이야?”

“아니.”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니라고?

정보창의 설명이 틀렸다는 건가.

그런데 제르비어스는 입가를 씨익 올리더니 설명했다.

“천 단위부터는 세기 너무 힘들어진다. 천을 넘어선 뒤부터는 숫자 따위 세지 않았지. 그래서 999명의 용사를 죽였다고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용사를 죽였다.

그것은 이 제르비어스가 덤벼드는 용사들에게 단 한 번도 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마왕이었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명씩 용사의 목을 쳐도 19년.

용사라는 게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게 아닐 테니, 실제로 이 녀석은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용사를 때려죽였을 것이다.

그건 단순한 집착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인충동’에 휘말린 악의 화신이나 가능한 업보인 것이다.

문제는 용사의 심안이 아닌 인간 박상식의 눈으로 봤을 때, 이 녀석은 용사를 싫어하긴 해도 사이코패스 살인자는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 녀석의 칭호 ‘용사학살자’라는 별명에 눈이 가려져 매몰된 관점을 갖게 된 건 아닐까.

“제르비어스 폰타인.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나는 녀석의 침소에서 나왔을 때 다시 한 번 무수히 많은 헬코마타들을 만났다.

그야말로 수십 마리였다.

개중에는 빼빼 마른 녀석도 있어서 언젠가 소중하게 쓰일지 모를 빵을 던져줬다. 그러나 놈들은 모두 코를 대 킁킁거리기만 하더니 불타는 꼬리로 팩 쳐서 빵을 치워 버렸었다.

[헬코마타는 육식성 동물로서 고기만을 섭취합니다.]

‘이런 건방진 고양이 따위가 반찬을 차별해!’

[물론 냉동된 육류 역시 쳐다보지 않는 까다로운 식성입니다.]

‘알았으니까 닥쳐, 이 정보창아!’

그렇게 길길이 날뛰며 7번 방의 죄수들에게 돌아갔더랬지.

그때 내게 느껴진 위화감.

뭔가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그 퍼즐은 어쩌면 이 마왕의 숨겨진 면모였던 걸까.’

정리해 보자.

하나,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 화룡도의 죄수들에게 고기는 지급되지 않는다.

둘, 나는 분명 보았다. 제르비어스가 마그마 앨리게이터의 뱃가죽을 한 방에 뚫어버리는 것을. 그건 그 용암 악어의 약점 포인트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사냥법.

셋, 고양이들은 야행성이다. 그런데 밤에 돌아다닐 수 있는 죄수는 없다. 야간 출입을 금지하는 규율 때문에.

넷, 정기적으로 사냥을 나간다고 하는 층장. 놈이 마그마 엘리게이터를 잡고 다닌다고 한다면 대체 그 고기는 ‘누구에게’ 먹이려 하는 건가.

이로써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명탐정으로 빙의해 제르비어스에게 말했다.

“너지?”

“뭐가?”

“네가 악어를 때려잡아 그 고기를 헬코마타들에게 나눠준 거잖아? 다른 죄수가 그 모습을 못 보도록 야간통행금지의 룰까지 만들어서.”

그러자 제르비어스의 보라색 피부에 붉은 기가 돌았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무, 무슨 소리냐. 내가 그깟 고양이 따위 신경 쓸 것 같으냐. 나는 무자비와 무관용의 폭렬마왕으로서…….”

“그래? 그럼 내가 층장이 돼서 화룡도의 헬코마타를 싹 다 죽여도 상관없겠네.”

푸화아아아악!

무시무시한 검은 마기가 하늘까지 솟구쳐 올랐다.

붉게 타오르는 제르비어스의 눈빛.

“그.렇.다.면.내.영.혼.을.걸.고.널.죽.인.다.”

나는 황급히 백기를 들었다.

“진정해.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고?”

“그래, 내가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도 소싯적엔 참치캔 많이 뜯어본 몸이다.”

슈우욱.

살기가 없어지고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마 이 몸이 용사의 육체라서 그렇지 다른 죄수였다면 이런 패기에 짓눌려 진짜 심장이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마기를 거둔 녀석은 민망한지 뿔을 긁어댔다.

“이 새끼.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층장은 개뿔. 캣맘이었어. 아니, 캣마왕이라고 해야 하나.”

“알아듣지 못할 소리는 집어치워라.”

나는 추리가 적중한 것에 마음이 편해져 계속 질문했다.

“너는 왜 싸웠지, 용사들과.”

“그들이 덤볐으니까.”

“왜 죽였지, 용사들을.”

“그들이 내 가족을 죽였으니까.”

“……어?”

“내 아버지의 심장을 칼로 찔렀고, 내 아우를 매달아 불로 태웠으며, 내 자식들의…… 목을 잘라 마왕성의 외벽에 늘어놓았으니까.”

제르비어스는 반성의 기색 따윈 1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자식’의 존재를 입에 담았을 때는 동공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있던 세계는 마왕이 세계의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마왕성의 수호자였다는 건가. 거꾸로 용사들은 약탈자였고.

젠장, 마음이 약해지네.

“용사에게 마왕성으로 쳐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어?”

“그들과 대화가 통했던 적은 없다. 용사란 족속들은 뼛속부터 차별주의자다. 마족을 박멸대상으로만 보지.”

나는 내가 플레이했던 무수히 많은 게임을 떠올렸다.

그 게임들에서 내 앞을 막아섰던 마왕들을 칼로 찌르고, 불로 태우고, 목을 잘랐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유는 간단명료.

게임 속의 나는 용사였으니까. 그게 나의 퀘스트였으니까. 의심의 여지도, 필요도 없는.

마왕 제르비어스가 이글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너 역시 용사다. 나와는 공존 불가의 존재이지. 어서 목을 쳐라.”

“아, 뭘 자꾸 목을 치래!”

나는 툭 하고 내뱉었다.

“나 용사 관뒀어.”

“용사를 관뒀다고?”

나는 의아해하는 녀석을 향해 절걱대는 수갑을 들어보였다.

“그래. 보다시피 지금은 죄수를 하고 있지.”

아무래도 이 녀석과 대화를 좀 해야겠다.

이 마왕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제법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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