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5화 (25/300)

#025. 마인학살자 vs. 용사학살자 (2)

마왕이 파공음을 내며 주먹을 내뻗었다.

민첩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기 때문에 ‘만전불패의 체술’로도 피하기 버거운 공격.

나는 양팔을 열십자로 교차해 그것을 받아냈다.

뿌아아아악!

뒤로 한참을 물러서다가 덤블링으로 충격을 줄였다.

“덤벼라! 어째서 반격하지 않는가.”

제르비어스는 자신의 말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얕보아서 손속에 정을 두거나 하지 않고 초장부터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게 다야? 더 때려 보라고.”

화룡도에 흙을 싹쓸이해 퍼먹고 강해진 용사의 육체도 녀석만큼의 강자가 두들기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둔중한 충격이 내장까지 파고들어 왔다.

“크윽.”

[HP: 6,283/9,999]

이게 도대체 HP 체력 바가 떨어지는 속도인지, 비행기가 자유 낙하할 때 고도가 깎여나가는 속도인지 모르겠다.

제르비어스의 펀치가 작렬하고 발차기가 나를 밀어낼 때마다 체력이 뭉텅뭉텅 잘려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치밀하게 녀석의 공격이 얼만큼의 데미지를 줄 수 있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내가 반격 없이 얻어맞고만 있자 1층장은 잠시 맹공을 멈추고 나를 주시했다.

“단단한 것 하나는 칭찬해 줄만 하군. 하지만 내가 목숨을 거두었던 용사들 중 너보다 강했던 녀석은 수두룩하다.”

“입만 열면 용사, 용사. 대체 왜 그렇게 용사를 싫어하지?”

그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허리를 젖혀 웃었다.

“너희 용사들은 세계의 수호를 받고 있지 않나. 용사가 꿈을 품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하던가.”

억겁의 시간 동안 품어온 분노가 나를 내리눌렀다.

땅이 나를 잡아당기는 중력이 몇 배는 무거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마인들은? 어떠한 꿈도 품지 못한 채 용사란 족속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만 기다리고 있지. 우리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축복해주지 않고 수호해주지 않아. 우주의 증오를 받아 태어난 것이 우리란 말이다.”

마왕이 오른쪽 손날을 쭉 편 다음 힘을 끌어올렸다.

[마왕군 폭렬마법]

[1급 오의 ‘업화의 쌍장’]

그의 손끝에서 검은 마기(魔氣)가 응집해 칼날을 만들어 냈다.

어, 이런.

저거는 그냥 맞아주기엔 너무 아파 보이는데.

“자, 용사여. 편하게 태어난 대로 살아오기만 했다면 그뿐인 자여. 잘 다져진 비옥한 대지를 밟고 자라온 약골이여. 내 칼을 받아보아라!”

파도를 가르는 상어처럼 제르비어스가 내게 직선으로 검을 찔러왔다.

어젯밤까지의 내 육체였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가공할 속도와 파괴력.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믿을 구석이 있다.

바로 친구빨.

[친구 올쿠레 켄타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천년명마의 질주 Lv. 1]

나는 비약적으로 높아진 이동 속도를 이용해 제르비어스의 손날을 피해냈다. 마기가 내 왼쪽 죄수복을 찢었지만 아슬아슬하게 회피에 성공.

마왕의 동공이 커졌다.

“제법 잡기술을 가졌구나. 어디까지 피하는지 한 번 볼까.”

이후로도 마왕은 맹공을 퍼부었다.

즉사의 궤적이 끈질기고도 맹폭하게 내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사악한 독충이 눈앞에서 침을 휘두르는 느낌.

나는 극한의 집중력으로 녀석의 공격을 피했으나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천년명마의 질주는 그만큼 체력을 잡아먹는 기술이었다.

그럼 방전되기 전에 반격을 노린다.

카가각.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마기로 이뤄진 칼날을 잡아내었다. 손바닥으로 한 일이 아니다.

양 손목에 걸려 있는 수갑으로 집게처럼 칼날을 멈춰 세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부서지지 않는 수갑의 두 접촉면으로.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마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읊조렸다.

“태어난 대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게임을 할 때, 나는 늘 인간 종족을 택했었다. 인간은 변변한 특수 능력도 없고 어중간한 능력치를 가진 것이 보통이다.

다른 게이머들은 보통 시원시원한 파괴력을 가진 오크, 군대를 거느릴 수 있는 드루이드,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하이엘프, 매력적인 암살 스킬을 지닌 다크하운드 등을 골랐다.

언제나 인기가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늘 인간을 택했다.

‘아무런 특수 능력치가 없음에도, 게임 속에서만큼은 두 다리 멀쩡한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었으니까.’

양다리가 짓이겨져 그 어디에도 나갈 수 없어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만 했던 나날들을 떠올린다. 따사로운 봄날에도 좁은 고시원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 줌의 바람만 맞이해야 했다.

남들은 푸른 하늘을 상영관 삼아 벚꽃과 낙엽이란 명화(名畫)를 즐기는데, 내게 허락된 공간은 손바닥 2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큰 창문.

그게 내가 계절의 변화를 시청할 수 있는 유일한 화면이었다.

“내가 꿈을 꾸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나는 수갑을 비틀어 마왕의 칼날을 뒤로 튕겨냈다.

처음으로 반격의 자세를 취했다.

[친구 르팔타커스 시온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시전자의 투지와 숙련도에 반응해 레벨이 오릅니다.]

[만전불패의 체술 Lv. 2]

열.

꼬마들의 악의적인 폭력을 감내하기엔 너무 앳된 나이였다.

열여섯.

사랑하는 부모님을 동시에 잃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스물여섯.

골방에 틀어박혀 삶을 저주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다.

파스스스스.

마지막으로 남은 폭약 가루를 내 머리 위에 뿌린다.

온몸에 가득 달라붙는 파괴의 눈꽃.

입천장에 달라붙는 화약의 맛이 저리다.

“나 약골 맞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절대 비옥하지 않았어!”

나는 제르비어스의 얼굴에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꽈앙!

그리고 녀석의 가슴에 러시안 훅을, 마갑으로 감싸인 허벅지에 반달차기를 작렬시켰다.

정교한 컨트롤로 양 손목과 양 발목의 수갑이 피격점에 정확히 닿도록.

꽝! 꽈아앙!

내 타격이 적중될 때마다 가공할 폭발이 일어나 마왕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녀석이 데미지를 입는 것과 동시에 내 신체에도 폭발의 여파가 쌓여갔다.

그야말로 처절한 동귀어진의 술수.

하지만 점차 폭발의 규모가 약해지고 있었다.

“제대로 돌은 놈이로군. 하지만 화약이 다했나 보지?”

표정을 잔뜩 찌푸린 마왕은 비틀거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유심히 나를 지켜보더니 팔꿈치를 수직으로 쳐들었다. 그리고 내리꽂히는 공격은 일섬. 단 한 번 팔꿈치를 휘둘러 내 정수리를 찍어냈다.

꾸우우웅.

행성만 한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피가 왈칵 터져 화룡도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용사여.”

제르비어스가 내 수감복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의 숨이 끊어졌는지 확인하는 사냥꾼의 무감정한 손짓으로.

“네놈과 불행 대결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화룡도. 울부짖어봤자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

마왕의 뿔이 내 동공을 당장이라도 찌를 듯 위협해왔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턱에 고인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그래.

징징거려 봤자 들어주는 사람은 없지.

그러니까 적수가 과도하게 징징거리면 뭔가 흉계가 있다고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녀석을 향해 히죽 웃어주었다.

“너, 참으로 멱살 들어 올리기 좋아하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는 않는 건가.”

여차하면 이 녀석에게 두들겨 맞을 때 ‘체력 회복약’을 먹으면서 컨디션을 초기화시킬 수 있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 빈틈을 더 연구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됐다.

내 작전이 성공하려면, 초죽음이 된 상태로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이 제르비어스에게 ‘멱살을 잡혀 들어 올려져야’ 하기 때문에.

부들부들 떨리는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쫘악 펼쳤다.

“뭐 하는 거지, 용사? 그게 죽기 전에 네가 하는 기도인가?”

“기도? 아니. 너를 쓰러트릴 비장의 한 수를 이 손에 쥘 거야.”

나는 성검 아론다이트를 인벤토리에서 꺼내었다.

차캉.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은가?

성검이 십자가처럼 내 등을 짓눌렀고.

자연히 내 몸과 마왕의 몸이 샌드위치처럼 겹쳐졌다.

꽈아아앙!

“끄아아악! 뭐야!”

“어떠냐. 이거 근력 999가 아니면 못 들어, 이 새끼야. 아무리 너라도 꼼짝 못 하겠지?”

마왕은 내 몸 바로 아래서 용을 쓰는 듯 보였다.

녀석이 나를 위로 밀어내기 위해 내 턱과 볼을 손바닥으로 붙잡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으으으읍!”

[경고! 용사의 축복받은 신체와 상극인 존재와 접촉했습니다.]

[신체 접촉 시간이 1분을 넘겨 상태이상 ‘저주’에 걸립니다.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 정신을 침식합니다.]

“끄아아아아악!”

수천 개의 바늘이 뇌를 헤집는 두통이 나를 파고들었다.

이것이 상태 이상 ‘저주’의 위력. 게임 속에서는 캐릭터가 옴짝달싹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상태 이상인데 그 캐릭터의 몸속에 들어온 입장에서는 숨도 못 쉴 아픔이었다.

하지만.

저주가 걸리든 말든 나는 여기 목숨을 걸었다.

절대 해제하지 않아.

“끄으으으으응! 웃기지 마라. 나는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이깟 검 쪼가리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할 것 같은가.”

“응. 못해. 지금도 못하고 있잖아.”

제르비어스의 주변으로 보라색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내보려는 거겠지.

녀석이 똥힘을 폭발시키며 발버둥 치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즐거웠다.

그랬더니 마왕은 욱해서,

“이 상태라면 너 역시 관절 하나 꼼짝 못하게 된다. 무슨 수로 결승점에 마그마 볼을 던질 거지? 응?”

“마왕, 네가 처음에 그랬잖아? 이 경기는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라고. 반드시 내가 분화구에 볼을 집어 던질 필요는 없어.”

“제정신이냐! 올쿠레 켄타도, 비르카 리케우톤도, 디멜 무바크도 모조리 퇴장했다. 이 시련의 길 위에 너를 도와줄 감방 동료는 이제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그래.

시련의 길 ‘위에’는 없지.

그런데 아래에는 있어.

“빨리 텨나와!”

나는 땅 밑을 향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내 밑에 깔린 마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로부터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의 지면이 꿈틀댔다. 마치 땅바닥에 누군가 혹을 낸 것처럼 작은 크기의 융기가 생겨난 것이다.

“제르비어스, 내가 왜 너와 싸우면서 그놈의 용사 타령을 계속 들어준 줄 알아? 시간을 끈 거야. 우리 팀의 에이스께선 안타깝게도 걸음이 조금 느려서 말이지.”

뿅!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앙증맞은 두더지 토인.

파르르 떨리는 수염이 매력적인 녀석 뚠 아티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성검에 깔린 나와 마왕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슈, 슈바인? 괜찮은 거야?”

“아니. 뒈지기 일보 직전이야. 그러니까 어서 저기 굴러가는 마그마 볼을 주워.”

뚠은 양팔에 힘을 주어 하반신을 빼내더니 조심스레 우리 쪽을 향해 다가왔다.

제르비어스는 앙금앙금 기어 오는 뚠 아티르를 보고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네놈은 두더지 뚠? 이 화룡도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죄수 아니냐.”

놈의 말을 내가 받았다.

“맞아. 뚠의 전투력은 아마도 화룡도가 생긴 이래 사상 최약. 존재감이 너무나도 약하지. 소리 없이 사라진다 해도, 어느 순간 너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질 만큼.”

뚠은 덜덜 떠는 손으로 마그마 볼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앞발톱으로 단단히 잡고는, 화산 꼭대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거기 당장 멈춰라, 뚠 아티르!”

마왕이 최약 죄수에게 벌컥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가 두더지 토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내게 마그마 볼을 돌려준다면 너의 발칙한 행동을 모두 눈감아주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용사 놈을 도운 죄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을 선사해 줄 것이다.”

뚠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제르비어스의 협박이 통한 것일까.

하지만 난 잠자코 그 두더지의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하하! 그래, 그래야지. 겁쟁이는 겁쟁이답게 굴어야 해. 너의 형량이 얼마나 긴지 떠올려라, 뚠 아티르.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죄수들의 괴롭힘을 당하며 화룡도에서 버틸 각오가…… 응?”

뚠 아티르가 다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어이없을 만큼 좁은 보폭이었지만 그 동작이 내 아래 깔린 마왕에게 주는 충격은 컸다.

“죄, 죄송해요 층장. 하지만 우리의 7번 방장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죄수들한테 언제나 반항해왔어요. 늘 등을 보여주며 우릴 지켰죠.”

녀석은 한 호흡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등을 보여줄 차례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