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마그마 볼 (2)
[모든 수감자에게 알립니다. 오늘 노역은 면제입니다.]
아침이 되었다.
모든 감방 문이 일제히 열리고, 하품을 하면서 걸어 나오던 죄수들이 갑자기 들려온 방송에 고개를 갸웃했다.
“면제라고? 이런 거 처음 있는 일 아니야?”
“아니. 나는 한 번 겪었던 거 같은데. 설마 이거…….”
[오늘 100년 만에 화룡도의 한 죄수가 마그마 볼에 도전합니다. 그러니 시련에 참가할 죄수들은 모두 경기장으로 모일 준비를 하십시오.]
나와 7번 방의 죄수들은 이미 감방 바깥으로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물론 결의에 찬 나를 제외하면 다들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들 준비됐죠? 작전대로만 하면 우린 이깁니다.”
괜찮다.
겁을 먹는 건 정상이다.
도망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절대 의지를 꺾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뚠 아티르, 비르카 리케우톤, 디멜 무바크, 올쿠레 켄타는 모두 내게 힘을 보태주기로 맹세했다.
“방장이 먼저 우릴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까. 그 숭고한 희생을 외면할 수야 없지.”
조금 찔리긴 하지만 동기부여는 중요하니까.
그래, 동기부여야말로 승리를 향한 가장 중요한 요소!
화룡도의 다른 죄수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마그마 볼이라니? 그게 뭔데!”
설명을 요구하는 죄수들부터.
“나 본 적 있어! 크하하하. 오늘 누가 고기 방패가 될지 모르겠지만 백 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날이겠구만.”
참아왔던 폭력의 분출구가 생겼다며 환호하는 죄수들까지.
“그런데 누구야? 모든 죄수가 꿈도 못 꿨던 무모한 도전을 하겠다고 나선 녀석이?”
태양 빛이 하나로 모이는 광경을 본 적 있는가?
나는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종이 위에 비추는 실험을 했던 어린 시절 이후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태양 빛이 저절로 한 곳에 보이더니 나를 비춘 것이다. 록 밴드 보컬에게 선사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시련의 주인공은 7번 방장 슈바인 스트링거입니다. 그를 포함한 다섯 명의 죄수들은 한 시간 뒤 출발지점인 해안가로 집결하십시오.]
그러자 모두가 실망한 얼굴들.
“에이, 뭐야. 난 또 다이몬이나 오르콰이움이 드디어 칼을 뽑은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이자나르면 모를까. 7번 방 녀석들이라면 몇 분이나 버텨줄지 기대가 안 되잖아.”
“7번 방에는 마(魔)가 낀 거야. 한 달 사이에 또 방장이 죽어 나가겠네.”
그 누구도 우리의 성공을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또 하나의 유희 거리가 생겼고, 그게 오래 가기를 바라는 왈패들처럼 웃었다.
그렇게 조롱 섞인 야유 속에서 나는 7번 방의 죄수들을 통솔해 해안가로 갔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실력으로 증명하면 되니까.”
*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마그마 볼을 도전자에게 양도합니다.]
마치 축포가 쏘아지는 것처럼 기암산의 정상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그것은 혜성처럼 불꽃의 꼬리를 그리면서 화룡도의 하늘을 날아와 우리 앞의 모래에 처박혔다.
꾸우우우웅!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그란 마그마 볼.
이름 모를 태초의 죄수.
그의 발목에 채워졌었다는 족쇄가 내 눈앞에 있었다.
“슈바인, 이런 동작을 꼭 해야 해?”
7번 방의 죄수들은 둥그렇게 모여 손바닥을 내밀자는 내 제안에 황당해했다. 우리는 키가 작은 뚠과 상반신만 있는 올쿠레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자라온 별의 의식이야.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전의를 다잡는 거지.”
올쿠레가 먼저 내 손 위에 손바닥을 포갰다.
“켄타우로스 일족의 전통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 오랜만이군.”
“켈켈켈! 뼈가 박살나라 뛰면 된다구.”
“비르카, 넌 그냥 걸어도 박살나곤 하잖아.”
단 하나도 비슷한 점이 없는 다섯 개의 손이 겹쳐졌다.
다른 차원에서 붙잡혀 온 죄수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나의 ‘탈옥’을 위해서.
처음으로 이 감옥에 온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꼭대기까지 갑시다. 빌어먹을 교도관에게 한 방 먹여주자고요!”
우리는 화이팅을 외친 다음.
마그마 볼의 앞에 섰다.
내 왼쪽에는 두더지 토인 뚠 아티르.
오른쪽에는 스켈레톤 비르카 리케우톤.
배후에는 잭 프로스트 디멜 무바크.
그리고 올쿠레 켄타는 디멜의 등에 업혀 있었다.
[경기를 시작합니다. 모든 죄수의 무운을 빕니다.]
모두의 무운을 빈다고? 웃기지 마라.
이 경기는 승자와 패자의 처지가 극명히 나뉘는 경기. 7번 방이 전멸하느냐, 나머지가 궤멸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마그마 볼을 집어 들었다.
띠링!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3. ‘마그마 볼’]
[1층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마그마 볼의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신은 190년 동안 살육의 본능을 억눌러 온 75명의 죄수들에 맞서 마그마 볼을 정상까지 운반해야 합니다.]
[기한: 12시간]
[보상: 근력 +30, 민첩 +30]
[실패 시: 재도전 기회 영구박탈]
재도전 기회는 없다니, 악랄하구만.
등반죄수가 되기 위해선 이 정도 시련은 거뜬히 통과해보라는 거겠지.
“좋아. 갑시다!”
나는 모래를 박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기암산의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널찍한 언덕길은 마치 4차선 대로 같은 넓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 거대한 언덕길 위에서,
“와아아아아! 내가 공을 뺏을 거다!”
“멍청아! 처음부터 뺏으면 안 돼. 죽이는 게 먼저다!”
죄수들로 이뤄진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
“저기, 7번 방 녀석들이다!”
오크와 트롤, 코볼트와 임프로 이뤄진 선두 그룹이 언덕 위에서 대로로 뛰어들었다.
마치 레이싱 경기장에 난입하는 성난 관중들처럼.
“사지를 뜯어 주마, 슈바인 스트링거!”
그 안에는 내게 얻어터졌던 16번 방장 콩파스도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전치 4주는 될 부상이었는데 감방 침대의 회복 효과 때문에 아주 쌩쌩해 보이네.
나는 정면만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다들 흩어지세요!”
밀려드는 죄수들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7번 방의 죄수들이 멀리 흩어졌다.
“마그마 볼은 여기 있다! 덤벼라.”
나는 달리면서 일부러 공을 높이 들어 올려 습격을 나에게 집중시켰다.
방해꾼 죄수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화살표 모양으로 짓쳐들어왔다.
한 오크 죄수가 주먹을 휘두른 것과 동시에 ‘만전불패의 체술’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자연히 빠져나갈 길이 내비게이션처럼 눈에 그려진다.
망치처럼 주먹을 내려찍는 오크 죄수. 궤적이 훤히 보인다. 녀석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든 다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그러면 타고 넘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두 번째로 들이대는 구울이 보인다. 날 깨물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다. 턱을 올려쳐 냄새나는 녀석의 이빨을 부숴준 다음, 쓰러지는 녀석의 정수리를 짓밟고 뛰어오른다.
“놓치지 마!”
“위로 보내면 우리 방의 망신이다.”
놈들의 복부를 밟고, 팔꿈치로 귀를 때리고, 옆구리 밑을 슬라이딩으로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나는 질주 속도를 거의 늦추지 않고 죄수들을 통과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놈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포위진을 만들어. 둥그렇게 둘러싸라!”
콩파스의 외침에 죄수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이윽고 나는 방해꾼 죄수들에게 빙 둘러싸였다. 물샐 틈 없이 퇴로를 막아선 다음 숨통을 조여 오겠다는 거겠지.
중간중간 골렘급으로 덩치가 큰 녀석들이 팔을 벌린 채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마술 하나 보여줄까?”
죄수들의 시선이 모두 내 손에 집중되었다.
나는 마그마 볼을 가슴 앞으로 내밀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인벤토리의 아이템 칸에 집어넣었다.
죄수들의 경악이 전선 위의 벼락처럼 전파되었다.
“뭐야? 마그마 볼이 사라졌어!”
나는 양손바닥을 툭툭 털면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디 한 번 죽여 보시지? 죄수살해죄 면제는 마그마 볼을 든 죄수에게만 적용된다는 건 알고 있지?”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들을 지나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놈들에게서 제법 멀어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마그마 볼이 뿅! 하고 튀어나왔다.
내가 꺼내겠다고 마음먹지도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그것을 캐치했더니,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마그마 볼을 아공간에 넣는 편법은 인정할 수 없다 선언합니다.]
[한 번 더 반칙을 사용하면 탈락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교도관이 으름장을 놓았다.
쳇. 첫 번째 방법으로 골인 지점까지 가게 놔두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단박에 제재를 당할 줄이야.
“괜찮나, 슈바인?”
좌우로 벌려진 채 달려오고 있던 7번 방의 죄수들이 다시 내 옆으로 붙었다.
내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려던 그때.
“어딜 가는 거야, 슈바인 오빠?”
다섯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선녀처럼 하늘에서 부유해 내려왔다.
코제트를 필두로 한 5번 방의 서큐버스와 사이렌(Siren)들이었다.
솔직히 이건 의외였다.
5번 방마저 이 시련의 방해꾼으로 참전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토라진 얼굴의 코제트가 그것을 설명해 주었다.
“아직 오빠의 정기를 한 번도 못 빨아 먹었는데. 이렇게 다음 층으로 보내줄 것 같아? 어림없는 일이지.”
코제트의 앙증맞은 꼬리에서 분홍색 서클 빔이 퍼져 나와 나를 감쌌다.
“못 보내줘. 너처럼 예쁘게 생긴 사내는 내 애완동물이 돼야 하니까.”
쿵.
마그마 볼이 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코제트의 교태나 유혹을 내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착각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오만이었다.
나뭇잎에 올라탄 채 태풍을 이겨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안겨, 슈바인 스트링거.”
코제트뿐 아니라 다른 서큐버스들도 우리에게 매료 빔을 내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 번갯불이 수천 번 치는 것 같다.
숨이 가빠오고, 눈앞에 있는 여인들과 천년만년 뒹굴고 싶다.
‘저렇게 어여쁜 여인을 두고 나는 어디를 가려는 거야?’
나는 천천히 아래로 구르는 마그마 볼을 뒤로하고 코제트의 품에 안기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귓가에는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저기 눈앞에 예쁜 두더지가 있어. 나랑 결혼해 줄까? 흐어어.”
“설녀다! 전설 속의 아름다운 설녀를 내가 이 감옥에서 만나다니.”
뚠과 디멜이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며 서큐버스들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
이성이 깊은 늪에 잠기는 이 와중에도 올쿠레 켄타의 눈에 하트가 뿅뿅거리는 장면에는 위화감이 들었다.
“……어르신은 왜 당하는 겁니까. ‘그것’도 없잖아요?”
“무슨 소리인가. 켄타족에게도 성기는 있다네. 어디에 있는지 지금 보여줄까? 나의 우람한…….”
올쿠레가 만취한 선원처럼 바닥에서 비틀거릴 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주인공이 땅을 박차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