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마그마 볼 (1)
지금의 내 능력으로 이 검은 마왕을 꺾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사내가 정확히 얼마만큼 강력한지, 즐겨 쓰는 공격법의 종류와 파괴력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훗날 제대로 승부를 걸었을 때,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일 수 있다.
그러니 도망치지 않는다.
‘부딪혀 보겠어. 일단 맷집 하나는 잘 키웠으니까.’
지금 이곳에서 마왕의 공격을 받아내다가 죽을 위기가 되면, 나는 권능 ‘반갑다 친구야’로 7번 방에서 잠들어 있을 뚠의 곁으로 순간이동할 계획이었다.
“마왕의 품격을 보여주지.”
그의 망토가 천천히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왕군 폭렬마법(爆裂魔法)]
[3급 오의 ‘허공분쇄마탄’]
제르비어스의 손바닥에서 검은 구체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응집했다.
‘저걸로 건물 바깥에서 나를 한 방에 날려 보낸 건가.’
그때, 귓가에 울려 퍼지는 안내 음성.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경고합니다. 7번 방장 슈바인 스트링거의 즉결처분을 멈추라 합니다.]
아마 이 음성은 제르비어스에게도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째서? 언제부터 화룡도가 죄수를 특별취급하기 시작했지.”
[1층의 교도관이 ‘특별취급’이라는 표현을 부정합니다. 7번 방장은 등반죄수가 되겠다고 선언하였으므로 ‘시련’이 끝날 때까지 처형이 불가합니다.]
1층장의 붉은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등반죄수가 되겠다고? 마족에게도 험난한 길일진대, 약하디약한 인간의 몸으로 그 길에 도전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교도관이 아니라 내가 대답할 부분이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해봐야 알지. 교도관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층장인 너에게도 내가 그 ‘시련’에 임하는 걸 막을 권리는 없나 본데.”
제르비어스의 손에서 검은 스파크의 구체가 슥 하고 사라졌다. 그는 다시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와 말했다.
“맞다. 이 화룡도에는 등반죄수의 자격을 시험하는 시련이 있지.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열쇠를 걸고 벌이는 사투. 우리는 그것을 ‘마그마 볼(Magma Ball)’이라고 부른다.”
“마그마 볼?”
그것이 정식으로 1층의 열쇠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던 것인가.
“참고로 말해주자면 190년 동안 통과한 사람이 없는 몹시 어려운 관문이다. 용사 놈이 그 시련에 도전한다고 하면 나야 반가운 일이지.”
제르비어스가 망토를 펄럭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은 같은 죄수면서 왜 수감복을 안 입고 간지 나는 검은 마갑에 망토까지 두르고 있는 거야?
이거 수감자 차별이잖아.
“네놈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다.”
“왜? 네놈이 그렇게 무시하는 용사라서?”
“아니.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마왕이 조소했다.
“마그마 볼은 단체전이거든.”
단체전?
예상 밖의 단어에 머릿속이 띵하고 울린다. 등반죄수를 선포한 것은 나뿐인데 왜 단체전을 해야 한다는 거야?
“마그마 볼의 시련에서 살아남으려면 도전자가 속한 방의 죄수들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야만 하지. 화룡도의 죄수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피의 제전(祭典)’이다. 그런데 약골들만 모아놓은 너희 7번 방의 녀석들이 100여 년 동안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걸 이루겠다고?”
이 녀석도 마찬가지인가. 우리 7번 방을 허섭스레기의 모음으로 보는 건.
참 이상도 하지.
나는 분명 탈옥의 길에 가까워지려고 방장의 완장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이렇게 7번 방을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 위산이 역류하는 기분이 들면서 뱃속이 뜨거워진단 말이야.
나는 제르비어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마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지난주부터 7번 방에 대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몹시 유능하고 투지가 넘치는 방장을 하나 영입했거든.”
“100년 만이라. 좋은 여흥이 되겠군. 부디 시작하자마자 죽지는 말아다오.”
용사와 마왕은 서로를 그렇게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
“어허어엉! 슈바인, 자랑스러운 우리 방장이 돌아왔구나.”
“켈켈켈! 매일 밤 절망의 탑을 향해 내가 방장의 무사 기원을 비는 기도를 올렸건만 통했나 보군.”
“대단하네, 방장. 약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자네의 숭고함. 내 절대 잊지 않으리.”
7번 방으로 돌아오니 잠들어 있던 죄수들이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겨주었다. 너무 격하게 감동하며 나를 끌어안아서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니네 왜 이래?”
대답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뚠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를 위해! 핍박받아온 7번 방을 위해 방장의 몸을 불살라서 싸웠다면서.”
“그래, 거들먹거리면서 우릴 괴롭혀 온 콩파스 녀석의 얼굴이 피떡이 된 걸 보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켈켈!”
아. 그런 거였나.
내가 독방의 흙을 파먹기 위해 스스로 자원한 것을 녀석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조금 찜찜해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흠흠.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 두지.”
디멜 무바크 녀석마저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게 아닌가.
어, 그렇다면 오해는 뭐 나중에 풀어도 상관없겠지?
지금 당장은 7번 방 모두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들어줘. 중요한 할 말이 있거든.”
나는 독방에서 몰래 빠져나온 것.
그리고 층장 제르비어스의 침소 앞에서 그와 마주친 것.
교도관의 말에 층장이 날 살려줬으며 ‘마그마 볼의 시련’에 우리 7번 방이 도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덤덤히 알려주었다.
반응은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였다.
“마그마 볼! 그걸 하겠다고?”
“다시 생각해, 방장. 그건 화룡도에서 가장 끔찍한 자살 방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녀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물러섰다.
나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올쿠레 켄타에게 물어보았다.
“어르신, 마그마 볼이 뭐기에 쟤들이 저러는 겁니까. 층장도 제가 마그마 볼에 도전한다니까 이미 나를 시체로 보는 눈치던데요.”
7번 방의 최고참인 올쿠레가 긴 설명을 시작했다.
“푸르가토리움 태초의 죄수가 매고 있던 족쇄. 마그마도 녹이지 못했던 그 족쇄를 우리는 마그마 볼이라고 부른다네. 이 시련에 도전한 방장과 죄수들은 출발점인 화룡도 최남단 해안가에서 마그마 볼을 받아들게 되지. 그리고 그걸 끝까지 잃지 않은 다음 최북단에 위치한 기암산 꼭대기의 화산에 던져 넣으면 된다네.”
“그냥 던져 넣기만 하면 된다고요? 정말로?”
“그렇다네.”
“아하. 그 마그마 볼이란 게 엄청나게 무거운가 보지요?”
올쿠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 역시 몇 번 등반죄수들의 도전과 죽음을 보아왔기 때문에 마그마 볼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지. 그건 우리의 다리에 채워지는 족쇄와 똑같은 크기일세. 내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지.”
그런데도 모두가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악독한 시련이라는 건가.
아마도 마그마 볼이라는 시련의 상세한 룰에 그 답이 있을 터다.
“당연히 마그마 볼을 기암산 꼭대기까지 올려놓는 것만이 아니지. 화룡도에 수감된 모든 죄수가 ‘방해꾼’으로 참가해 시련의 당사자를 막아서게 된다네. 어떤 죄수이든지 도전자로부터 마그마 볼을 빼앗아 화룡도의 아무 바다에나 던져 넣는 데 성공하면 그 방은 1년 치 노역을 면제받거든.”
“굉장한 메리트군요. 그렇다면 드워프 하스록처럼 이 감옥에 붙박이하려는 죄수가 아니면 모두 참전한다고 예상해야겠어요.”
올쿠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일한 기대일세. 마그마 볼을 손에 든 죄수를 공격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을 때 그 죄수는 아무런 형량 추가를 받지 않아. 죄수살해죄가 적용되지 않는 거지. 교도관이 만든 놀이에 참여하다가 벌어진 일로 해석해 예외로 둔 거야. 즉, 하스록이나 나처럼 감옥에 눌러 앉기로 결심한 녀석들에게도 마그마 볼은 무척 환영할 만한 행사야. 형량이 추가될 위험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살육의 축제인 것이지.”
이런.
그래서 마왕이 내게 ‘피의 제전’이라 한 것인가.
올쿠레를 제외한 7번 방의 죄수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다 들었으니 어서 마그마 볼에 도전한다는 걸 취소해’라는 얼굴이다.
정작 내게 룰을 설명해 준 올쿠레마저도 만류의 의지가 목소리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나도 저 친구들과 동감일세. 그만두게, 슈바인. 마그마 볼은 도전자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한 경기니까.”
듣고 있던 디멜 역시 평소처럼 부정적이었다.
“마그마 볼의 코스는 길어. 현재 화룡도에서 가장 강한 다이몬, 오르콰이움, 이자나르가 한 팀이 되어 도전한다 해도 코스의 절반이나 겨우 정복할 수 있으려나.”
하지만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내가 있던 세계의 럭비란 운동과 비슷하네.”
방장을 포함한 다섯 명의 죄수가 마그마 볼을 경기장 끝까지 가져가면 이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열다섯 방의 죄수들 칠십오 명이 달려들어 도전자들을 전력으로 방해한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
즉, 죽이기 위해 덤벼들 것이다.
“층장이 우리가 실패할 것이라 단언했던 것도 이해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는 모르니까.
하지만 올쿠레의 설명을 듣는 순간에도 내 머리는 계속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미약한 돌파의 가능성을 찾아내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파구가 없다면 내 손으로 만들겠다.’
나는 이때부터 말없이 벽을 마주 보고 서서 우리 7번 방의 전력으로 목표까지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바늘로 거산을 뚫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점’을 찾는 일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망망대해에서 단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내야만 하는 이 감각은 내가 평생 동안 헤쳐 나왔던 감각이기도 했다.
‘괜찮아. 이곳에 갇힌 이래 1초도 놀고 있지 않았다. 흙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강해졌지. 다른 방장이나 죄수들이 어떤 놈들인지도 충분히 파악했고.’
계획의 재료는 갖춰졌다.
잘 꿰어 맞추기만 하면 돼.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걸까.
내가 벽에 대고 있던 이마를 떼어냈을 때.
화룡도의 기암산엔 어느덧 먼동의 기운이 차오르고 있었다.
“작전을 완성했어요. 다들 들어 주세요.”
오늘 마그마 볼의 시련에서 우리는 모두를 놀래킬 것이다.
그리고 결승점의 분화구에 그 공을 처넣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