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성검에선 냄새가 난다 (1)
“설마 차카 녀석의 독 트림을 맞고 녹아내린 게…… 여기 방장이었어?”
“응. 조금 덤벙대서 그렇지 나쁜 녀석은 아니었는데. 안타깝게 됐어.”
괜스레 이 뚠이란 녀석에게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방장일 리가 없지. 차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흉악범만 데려온다면서 어떻게 된 거야? 평화와 비폭력의 요정 같은 녀석이 왜 푸르가토리움에 있는 거냐고.
[이름: 뚠 아티르]
[종족: 두더지 토인], [클래스: 건축가]
[칭호: 최하급 죄수]
[HP: 4,200], [MP: 20], [근력: 7], [민첩: 5]
[형량: 783년]
[마왕군의 땅굴을 파던 잡역부 출신입니다. 타고나기를 워낙 게을러서 지면을 파고 낮잠을 자는 것이 특기입니다. 숙면을 취하기 좋은 터를 골라 침소를 마련한 게 그만 초절마왕의 옥좌 아래였습니다. 수명이 다한 초절마왕은 푸르가토리움의 소환 빔을 얻어맞기 직전에 자연사했고, 대신 옥좌 밑에서 낮잠을 자던 뚠 아티르가 소환빔을 맞아 화룡도에 갇히고 말았지요.]
소환빔 오발.
갑자기 이 뚠이란 녀석에게 격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실로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도 더 억울하게 붙잡혀온 녀석 아니야?
신기한 건 나머지 스탯이 엉망진창인 것에 비해 HP만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점이었다. 뭐, 그래서 한 자릿수 근력 스탯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거겠지만.
뚠의 등 뒤에서 두 번째 죄수가 말을 걸어왔다.
“켈켈켈켈! 환영한다, 신참! 나의 이름은 비르카 리케우톤. 보시다시피 가장 자랑스러운 신체 부위는 골격이다.”
……신체 부위고 뭐고 너 뼈만 남아 있잖아.
비르카 리케우톤은 걸어 다니는 해골, 스켈레톤이었다. 보통 던전의 1층에서 모험가들에게 아낌없이 경험치를 퍼주는 종족.
“어, 그래. 반갑다.”
나는 아래턱을 딱딱거리며 호탕하게 말을 거는 녀석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엉겁결에 악수했다.
그런데 악수한 손을 흔들다가 그만 녀석의 팔꿈치 밑 부분을 분리시키고 말았다.
떨그락.
“으아아악! 미안. 이렇게 뚝 떨어질 줄 몰랐어.”
“켈켈! 신경 쓰지 마. 이런 일은 자주 벌어지거든. 이렇게 자석처럼 철컥! 붙이면 된다구.”
비르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왼손으로 오른 손목뼈를 팔꿈치에 대충 붙여두고는 또 한 번 턱을 딸각거리며 웃었다.
[이름: 비르카 리케우톤]
[종족: 스켈레톤], [클래스: 창병]
[칭호: 최하급 죄수]
[HP: 210], [MP: 90], [근력: 9], [민첩: 12]
[형량: 592년]
[대마도사가 자신의 마력을 쪼개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전투생명체입니다. 원래는 무척이나 강력한 위용으로 대마도사의 적군을 격퇴하는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푸르가토리움의 죄수가 되자마자 대마도사의 가호가 끊겨 전투력은 물론 관절의 접합력마저 초라해졌습니다. 대마도사에게 회화 교육을 받는 바람에 웃음소리가 그를 닮아 괴상합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상적인 죄수가 없잖아.
관절염 걸린 스켈레톤이라니. 내가 교도관이었으면 안쓰러워서 진즉에 가석방이라도 해줬겠다.
‘정말이지 멀쩡한 죄수는 없는 거냐?’
나는 기선제압의 목적은 까맣게 잊고 제발 다음 죄수만큼은 극한지옥의 수감자다운 모습을 갖고 있기를 빌었다.
바로 그때.
오른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근육질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틀어 올린 백발과 은빛 수염. 그에 비해 프로레슬러를 연상시키는 맹폭한 육체를 가진 노병.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풍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죄수를 영접하나 했는데 시선이 아래로 간 순간 나는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에게는 하반신이 없었다.
“괜찮네, 청년. 나를 처음 보는 자들은 다 그런 표정을 짓곤 하니까. 하지만 짐작하는 것처럼 하반신을 잘리거나 한 건 아니야.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네.”
[이름: 올쿠레 켄타]
[종족: 켄타우로스], [클래스: 기마병]
[칭호: 최하급 죄수]
[HP: 950], [MP: 130], [근력: 395], [민첩: 225]
[형량: 8,234년]
[수인병단의 기마병으로서 셀 수 없는 전사들을 쓰러트렸습니다. 허나 그가 있던 차원의 켄타우로스는 인간의 상반신만을 갖고 태어나는 켄타족과 말의 하반신만을 갖고 태어나는 우로스족의 생체결합으로 태어나는 키메라입니다. 푸르가토리움은 이 켄타우로스의 학살죄를 판정할 때 다리가 되어준 우로스가 아니라 도끼를 휘두른 켄타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오직 이자만을 감옥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노인은 반쪽 죄수였다.
뛰어난 민첩 스탯, 그리고 8천 년이 넘는 형량으로 보았을 때 그가 우로스의 질주와 함께 얼마나 많은 전사들의 목을 쳐왔을지 능히 짐작되었다.
순식간에 네 다리를 잃고 기동성을 박탈당한 뒤 감옥에 떨어졌을 그의 심정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반면에 나는 오히려 이 감옥에 오면서 새로운 육체를 얻어 희망이 생긴 쪽이니까.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올쿠레는 팔베개를 하며 씨익 웃었다.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나는 관상을 어느 정도 볼 줄 알아. 자네는 분명 호기심 때문에 험한 신세를 걸을 팔자로군. 이 화룡도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다면 나를 찾아오게. 노인이 청년에게 빌려줄 건 경험뿐이지 않겠나.”
그리고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죄수.
처음엔 얼굴이 너무 하얘서 창백한 얼굴을 가진 마인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녀석은 볼이 움푹 들어간 눈사람이었다.
[이름: 디멜 무바크]
[종족: 잭 프로스트], [클래스: 마도병]
[칭호: 최하급 죄수]
[HP: 55/340], [MP: 170], [근력: 15], [민첩: 10]
[형량: 601년]
[행성의 최북단 얼음 왕국에서 이름을 떨친 마도병입니다. 그가 속한 병단의 배신자들을 마법으로 고문해 심판하는 일을 맡았던 냉혹무비한 심판관입니다. 다만 암열이 가득한 화룡도에 떨어지면서 지독한 열사병에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엔 열사병 걸린 눈사람이냐.
다른 죄수와 달리 HP가 뭉텅이로 깎여 있는 걸 보니 화룡도의 더위가 이 눈사람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는 방구석에서 시종일관 내게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조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방장은 네가 해야지. 어찌 되었든 오늘의 싸움으로 인해 우리 방은 방장을 잃었으니까.”
“뭐? 내가 방장을 하라고?”
나는 몇 분 전에 방장을 때려눕히려고 꽥 소리친 것도 잊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원래 우리 방은 제비뽑기로 정해. 하지만 너에겐 일말의 책임이 있으니 거부하지 않을 거로 알겠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탈옥의 첫 단계는 당연히 힘 싸움으로 방장이 되어 같은 방 죄수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도 각오해 ‘만전불패의 체술’을 발동시킬 준비까지 마쳤었는데.
도대체 이 분위기는 뭐야?
“어어, 그럼 내가 방장 한다?”
“켈켈켈켈! 새로운 방장의 입소를 축하하네!”
두더지 뚠과 해골 비르카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방장이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기분이 몹시 떨떠름했다. 새로운 리더를 영접하는 얼굴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마치 내가 앞으로 겪을 고난의 무게를 알기에 위로를 건네는 표정에 가까웠다.
이제야 코제트가 보여준 표정의 의미를 알겠다.
‘공교롭다. 7번 방이라니.’
나는 많은 경우를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골 때리는 죄수들만이 모인 방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마왕의 밑에서 낮잠을 자다가 재수 없게 끌려온 두더지,
대마도사의 실험실 출신인 관절염 스켈레톤,
평생의 동반자인 하반신과 이산가족이 된 켄타우로스,
열사병 때문에 침대가 젖어있는 잭 프로스트까지.
‘꼭 패잔병들의 병동 같잖아.’
그래서 이 방의 공기는 불운과 낙담, 그리고 절망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의 대탈옥 서막은 이곳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7번 방의 방장이 되었다.
아무런 유혈사태 없이.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곳 화룡도의 다른 방 죄수들이 우리 7번 방을 어떻게 대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
고시원 침대에서 눈을 감을 때, 나는 종종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이대로 다시는 눈을 뜨지 말기를.
아침이 되면 또다시 지옥 같은 하루가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깡깡.
“기상이다! 수감자들은 모두 일어나라.”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지. 막상 진짜 지옥에 오니 너무나도 상쾌한 기분으로 두 눈이 떠졌다.
단잠을 난폭하게 방해받았는데도 이상하게 전혀 불쾌하지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내밀어 바깥을 보니 2번 방장 다이몬이 곡괭이로 방의 철문을 두드리면서 죄수들을 깨우고 있었다.
“몸이 왜 이렇게 가뿐하지?”
상태창의 스탯이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HP 100/100]
자고 일어나니 차카와의 전투로 인해 깎였던 체력이 온전하게 차올라 있었다. 대충 만든 이 침대에 어쩌면 ‘오토 리젠’이라도 걸려 있었던 건가.
“일어났나, 방장.”
머리카락이 고드름으로 만들어진 남자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냉미남. 낯선 얼굴이었지만 추측하건대 이 녀석은 어젯밤까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잭 프로스트일 것이다.
“디멜이라고 했나. 우와. 그게 네 원래 얼굴이야? 조각 미남이네.”
“실실 웃지 마라. 일과를 시작하면 그 웃음도 쑥 들어가겠지만.”
디멜의 말이 맞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합숙소가 아니라 차원의 죄수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감옥이니까.
내 상태창 또한 그것을 상기시켜준다.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잔여 형량: 99년 364일]
옆의 침대에선 백골로 이뤄진 스켈레톤이 두더지 인간을 침대로부터 떼놓으려 애쓰고 있었다.
“눈을 떠라, 뚠! 이봐, 방장. 나 좀 도와줄래? 이래봬도 이 친구가 손아귀 힘만큼은 장사라서 말야.”
“흐아앙. 10분만 더 잘게. 아니면 5분만. 응?”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다가가 뚠 아티르의 복슬복슬한 왼쪽 뒷다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끌어내는 걸 도와줬다.
비르카의 관절이 두 번 끊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뚠을 바닥에 패대기칠 수 있었다.
“자, 앞장서게, 방장. 뭉그적대다간 후회할 일이 생길 테니까.”
쿠르릉!
한 팔로 땅을 짚고선 켄타우로스 올쿠레가 다른 팔로 철문을 밀었다.
어느 방향이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다른 방의 죄수들이 한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마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강해 보였다. 아마도 각 방의 방장들이겠지. 분하지만 가진 능력치가 가장 초라한 건 아무래도 이 몸인 것 같다.
몇몇 방장들이 나를 면밀히 살폈다. 개중에는 명백한 조소가 담겨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최약체 방의 방장이 되었으니 은근히 무시하는 거겠지.
“방장이 됐네, 오빠? 축하해!”
코제트는 네 명의 다른 여성 죄수들을 이끌고 내게 손 키스를 보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이 고양감을 가라앉히려고 일부러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을 찾았다.
울상인 오크와 고블린들을 이끌고 있는 차카 도기노브.
역시 효과가 있었다. 놈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마치 명경지수처럼 침착해지는 것 아닌가.
마침 차카 녀석도 나를 찾고 있던 모양이었다.
“슈바인 스트링거, 밥맛 떨어지는 녀석.”
“네 뱃살의 두께를 고려하면 밥맛이 좀 떨어지는 걸 권장해. 그새 13번 방의 우두머리가 됐나 보지? 축하한다.”
“너 역시 방장이라고 해서 우리가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알아보니 같은 죄수를 죽이면 형량이 100년이나 추가된다는군. 너에겐 반가운 소식이지. 아니냐?”
올쿠레를 내려다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카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하긴, 죄수들끼리의 무분별한 살육전을 막기 위한 시스템은 있어야겠지.
나는 차카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어제 겪고도 모르겠냐. 넌 나를 못 잡아.”
“꾀를 부렸다만 두 번은 안 당해. 내가 이 감옥이 마음에 들어서 좀 더 눌러앉고 싶어지면, 제일 먼저 7번 방의 문을 노크하도록 하지.”
아니. 노크하지 마.
부담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