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용사로 전생했는데 감옥 안이라고요? (3)
스탯창과 무기, 방어구 인벤토리. 그리고 액세서리 칸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감옥에 뚝 떨어진 후 처음 보았을 때와 비교해보면 창들의 구도와 배치엔 손톱만큼의 미동도 없었다.
스탯창은 좌측 상단. 무기와 방어구 인벤토리는 우측 상단. 우측 하단엔 액세서리.
지지지지직.
그런데 지금 그 배치가 격동하며 시야 전체에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었다.
[파천황의 유해가 교도관장의 관리 시스템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대응합니다.]
[대응 실패.]
인벤토리 창들이 강제로 밀려나 만들어낸 공간.
그곳에 처음 보는 슬롯이 한 줄 생겨났다. 직관적으로 봤을 땐 마치 사각형 빈 상자들을 길고 동그랗게 묶어 만든 팔찌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빈칸인데?”
내가 직접 이 상자들을 채우라는 얘기인가? 뭐로?
시험 삼아 무기나 방어구를 새로 생긴 빈칸에 옮겨보려 했다.
[유효하지 않은 동작입니다.]
흐음. 그러면 포션이나 액세서리를 넣는 칸일지도 몰라.
[유효하지 않은 동작입니다.]
내 예상은 다 빗나갔다.
그렇다면 이 칸은 아이템을 넣는 칸은 아니란 소린데.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는 나의 욕망에 반응했다. 이것이 절대로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 그는 자신이 유해를 남긴 이유를 ‘원한’이라 설명했고, 내게 남긴 이 현상을 ‘축복’이라 칭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탈옥의 꿈을 이루는 데 있어서 힘을 빌려주겠다는 것이겠지. 하루빨리 강해져야 하는 내게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르팔타커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감옥은 거대한 세계다, 죄수여. 진정 탈옥을 원하는가.]
“원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심연보다 깊은 절망이 그대를 노릴지라도?]
“죽음은 극복하고 심연은 잘라내겠습니다.”
[마음에 든다, 죄수여. 짐의 친구가 되겠는가.]
“네. 당신이 남긴 바통을 주워 결승점에 꽂아드리겠습니다, 르팔타커스.”
[좋다. 짐이 그대와 함께한다는 징표를 남기겠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왼쪽 팔목에 문신이 새겨졌다.
장쾌한 필치로 그려진 묵빛의 그림.
바로 용의 목을 짓밟고 포효하는 사자였다.
르팔타커스 시온이라는 사내의 상징 같은 걸까.
띠링!
이제까지의 푸른 상태창과는 다른 붉은색의 독특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1. ‘연옥 탈옥’]
[용사는 어찌 된 일인지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에 갇혔습니다.
형량은 ‘마인학살죄’로 받은 100년. 그 세월을 감옥에서 견뎌낼 수 없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푸르가토리움을 탈출하십시오.
방법은 최종층의 문에 열쇠를 꽂는 것입니다.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당신의 앞길을 안내할 것이나 용기와 지략은 물론, 때로는 중첩된 행운도 필요할 것입니다. 무운을 빕니다.]
[기한: 100년]
[보상: 탈옥 시점의 육체와 함께 당신이 원하는 공간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실패 시: 윤회 불가의 소멸.]
‘소멸’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압박감이 아찔했으나 나는 이내 보상이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에 전율하고 말았다.
탈출 불가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 때.
그때가 정녕 온다면,
‘나는 완벽한 용사의 몸을 갖고 지구로 돌아가는 거다.’
운명은 예고 없이 나를 이 감옥에 가뒀다. 그런데 우연히 나보다 앞서 잡혀 온 자가 남긴 스푼을 줍게 되었다.
내가 봐온 모든 탈옥 영화의 출발점이 바로 스푼이었지.
르팔타커스가 넘겨준 이 스푼이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때, 마치 스피커로 전체 방송을 하듯 음성이 흘러나왔다.
[푸르가토리움 대기실의 수감자들에게 알립니다. 죄수 배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쿠르르르!
굳건했던 철장이 거짓말처럼 바닥 아래로 꺼졌다.
바짝 긴장한 채 한 걸음 물러선 나와는 달리 차카는 웃고 있었다. 양 주먹을 부딪치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만찬의 종이 울렸구나. 이리 나와라, 겁쟁아.”
내가 차카 녀석의 두툼한 다리를 보며 달리기 속도를 계산하고 있을 때,
[0층의 교도관 ‘나태에 짓눌린 쥐’가 화신체를 만들어 냅니다.]
차카 옆에 느닷없이 뿅 하고 두 발로 선 쥐가 나타났다. 나태에 짓눌린 쥐는 이름 그대로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수감자 차카 도기노브, 여기는 대기실입니다. 수감자 사이의 적대행위는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휴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 ‘너희는 죄수를 잘못 골랐다’는 둥, ‘반드시 탈옥하고 말겠다’는 둥 우렁차게 포부를 밝혔던 주제에 교도관이 말려준다니 안도나 하고 앉아 있고.
한심하다.
하지만 차카는 교도관의 말에 잠자코 따라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나를 가둔 놈이냐! 너부터 짓이겨 주지.”
차카의 주먹이 망치처럼 교도관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교도관의 덩치는 딱 녀석의 주먹만 해서 그대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꽈앙!
그러나 차카의 주먹은 애꿎은 바닥만 때릴 뿐이었다.
“한 가지 빠트렸군요. 수감자는 자신의 방에서 나올 때 운신의 제약을 받게 됩니다.”
어느새 차카의 등 뒤에서 나타난 교도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차카의 수갑과 족쇄에 두툼한 굵기의 쇠고랑이 생겨났다. 철커덩.
“이 자식이!”
“물론 교도관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금지입니다.”
교도관이 손가락을 또 한 번 튕기자 그를 걷어차려던 자세 그대로 차카의 몸이 굳어버렸다. 마법이든 마술이든 강력한 권능이 아니면 불가능한 솜씨였다.
이 쥐, 정체가 뭐지?
나는 용사의 심안이 발동되도록 뚫어져라 교도관을 주시했다.
[이 존재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0층의 교도관이라는 이 존재는 비록 작은 쥐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 속아선 안 될 것 같다. 그의 혼잣말이 귓가를 파고든다.
“이래서 교도관 따윈 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귀찮아. 다 소멸시켜버리고 싶어.”
나는 애써 그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고 교도관에게 다가갔다. 철컹. 복도로 나오자 내 수갑과 족쇄에도 쇠고랑이 채워졌지만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교도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뭡니까, 수감자 슈바인 스트링거.”
“저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잘못 끌려온 거라고요!”
“아, 당신은 누명파입니까. 난동파에 이어 누명파. 오늘은 일진이 안 좋군요.”
“아니, 일진이고 뭐고. 저는 태어나서 누굴 때리거나 죽여본 적이 없습니다. 형량 100년은 말도 안 된다고요. 뭣보다 제 이름은 슈바인이 아니고 박상식······.”
“알겠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 설마 이렇게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건가.
“제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지구라는 곳입니다!”
“지구. 들어본 적이 없군요. 들어봤지만 귀찮아서 까먹었을 확률이 높을 테지요. 저는 교도관이지 판사가 아닙니다. 수감자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건 귀찮······ 아니, 권한 밖이지요. 귀찮으니 그냥 소멸시켜드리겠습니다. 부디 영원토록 평온한 안식을 취하시길.”
교도관 녀석이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며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물속에 빠진 것처럼 흐려진다.
“으악! 아닙니다. 취소하겠습니다. 취소오!”
나는 황급히 교도관을 말려야만 했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
거슬린단 이유로 나를 죽이려는 죄수도 또라이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나를 소멸시키려는 교도관도 그 못지않은 상또라이였다.
이 감옥은 온통 또라이투성이다.
“그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기실에서 수감자를 몇 번 소멸시켜 봤는데, 그때마다 다른 층의 교도관들이 항의해오니까요. 수감자들의 난동도 귀찮지만 그분들의 항의는 더욱더 귀찮습니다.”
정말이지 나태란 단어가 이놈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을 거다.
나태에 짓눌린 쥐는 앞장서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수감자 두 분을 빨리 안내해드린 다음 쉬고 싶으니까요.”
그제야 차카를 꼼짝 못 하게 했던 주박이 풀렸는지 녀석이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머리에 우동 사리만 들은 녀석은 아니었는지 또다시 교도관에게 덤벼들진 않았다.
녀석은 몸을 일으키며 내게 으르렁거렸다.
“이 쇠고랑만 보고 너무 안심하지 마라.”
“아까 못 들었어? 벽창호 녀석. 여기서 나 때리면 너 소멸.”
“날 자극해서 건드리게 만든 뒤 교도관의 힘을 이용해서 날 제거하려 해도 소용없다. 네가 도망갈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올 테니까.”
“응. 그 입 냄새에 내가 질식해도 너 소멸.”
이윽고 우린 거대한 철문 앞에 도달했다.
“여길 넘어가라는 건가.”
고대의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철문에는 날카로운 검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악귀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경탄스러운 것은 아찔한 크기에서 오는 위압감이었다.
이 문 앞에 서니 나와 차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의 햄스터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대기실이라고 했지? 그리고 우리 같은 죄수가 수감될 진짜 층으로 가는 ‘문’이라고 했어.
그럼 이렇게 크게 만들어놓은 이유는 단 하나.
“설마 드래곤도 끌려오고 그러는 건가.”
내 혼잣말에 교도관 쥐가 대꾸했다.
“호오. 슈바인 수감자, 제법 눈치가 있군요. 그렇습니다. 죄를 지은 고룡과 마룡들은 7층에 갇혀 있습니다.”
절로 한숨이 내쉬어진다.
내가 클리어했던 대부분의 게임에서 드래곤만큼은 언제나 최강의 종족이었다. 한 번 날아올라 산을 무너트리고 두 번 내려앉아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괴수들이었다. 죽일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라 공물을 바쳐 아이템을 만드는 NPC인 경우도 많았고.
하지만 이 감옥에는 그런 드래곤들조차 가둬놓을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탈옥을 꿈꾸는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내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사이 감옥의 판정이 끝났다.
[차카 도기노브. 등급 마인. 1층 화룡도에 배정됩니다.]
홉고블린 녀석은 어째서 자신이 최하층이냐며 투덜댔다.
다음은 내 차례겠지.
[슈바인 스트링거. 등급 인간. ······존재가 불순하여 배정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영혼의 인식표와 육체의 좌표가 미묘한 불일치를 일으킵니다.]
[관리시스템을 부정한 방법으로 오염시킨 혐의가 있습니다.]
[죄수의 배치에 참고할 사례를 검색 중입니다.]
[검색 결과 없습니다.]
[연옥의 문이 푸르가토리움의 모든 층의 교도관을 소집해 의견을 구합니다.]
마지막 메시지에 나태에 짓눌린 쥐가 흠칫 놀라 내 얼굴을 쳐다봤다.
“신기하군요. ‘연옥의 문’이 위층의 교도관들을 한데 불러 모으는 건 몇 백 년 만인지요. 당신 진짜로 억울하게 끌려온 건가요.”
“아, 그렇다니까요! 당신들 사람 잘못 잡아 온 거야.”
“제게 따지지 마십시오. 귀찮으니까요.”
“이익!”
순간, 불길함이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군가가 나를 훔쳐보는 듯한 시선. 양쪽 어깨에 여러 마리의 마운틴 고릴라가 올라탄 듯 괴로운 기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푸르가토리움의 아홉 교도관이 모두 0층에 모였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강대한 존재들이 나를 룰렛 위에 올려놓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근육과 혈관은 물론 뼛속까지 투시당하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함이었지만 떨쳐낼 수가 없었다.
[5층의 교도관 ‘저울추를 속이는 바늘’이 당신의 존재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2층의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이 당신에게서 ‘수왕’의 냄새를 읽고 불쾌해합니다.]
[6층의 교도관 ‘폐허에서 춤추는 이끼’가 당신의 허약함에 의아해합니다.]
[8층의 교도관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가 헛된 기대를 품지 말라며 교도관들을 다독입니다.]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제비뽑기를 제안합니다.]
이 작자들이 지금 나를 두고 뭘 하겠다고?
속이 터질 듯이 답답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교도관들의 제비뽑기가 시작됩니다.]
뭘 빌어야 할지 모르겠네.
상식적으로 탈옥에 유리한 건 분명 1층이나 9층일 것이다.
다만 르팔타커스의 유해는 분명 ‘가장 높은 곳’에 먼저 올랐다고 했다. 즉, 탈옥이 가능한 층이 최상층에 가깝다는 의미 아닐까.
최소한 7층 이상이었으면 좋겠는데.
제발 9층 나와라, 9층!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메시지가 떴다.
[4층의 교도관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이 추첨의 투명성을 의심하며 자리를 뜹니다.]
[3층의 교도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장난감을 놓쳤다며 입맛을 다십니다.]
[1층의 교도관 ‘불꽃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불길하다.
1층의 교도관이 좋아한다고?
[슈바인 스트링거. 등급 인간. 1층 화룡도에 배정됩니다.]
아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