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화 (2/300)

#002. 용사로 전생했는데 감옥 안이라고요? (2)

어느 차원일지 모를 감옥 안에서 나는 절규했다.

반드시 이곳에서 탈옥하겠다고.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마치 내 일갈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Durkaaaa!!”

맞은편 새카만 암흑 속에서 벼락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건 덫에 걸린 육식동물만이 낼 수 있는 강렬한 사자후였다.

어라. 나만 잡혀 온 게 아니었던 건가?

번쩍.

복도 천장의 등이 켜지면서 내내 어두웠던 사위가 화악 밝아졌다. 내가 갇혀 있는 방 맞은편에 나와 똑같은 포즈로 절규하는 죄수가 있었다.

“이봐요! 그쪽도 잡혀 온 겁니까!”

반가움에 내 얼굴엔 잠시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 죄수의 자세한 생김새를 본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히 식는 기분이 들었다.

“Qechaj ma Yodtiaľto. Vázni Kastardi!”

돼지 같은 얼굴에 회색 갈기,

2미터를 조금 넘어 보이는 근육질 괴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아니잖아?”

[용사의 심안이 발동됩니다.]

녀석의 흉포한 외모가 시야에 온전히 들어온 순간, 허공에 띠링 하고 정보창이 떠올랐다.

[이름: 차카 도기노브]

[종족: 홉고블린], [클래스: 보병]

[칭호: 신참 죄수]

[HP: 880], [MP: 50], [근력: 103], [민첩: 21]

이 정보창이 어디서 밑장 빼기를 하고 있어.

구라 치지 마. 홉고블린이 저렇게 덩치가 크다고? 잘하면 오우거도 때려잡겠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상태창의 설명에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형량: 320년]

[도기노브 인신매매단의 두령입니다.

숲의 정기를 받은 어린 엘프들의 내장을 뜯어먹어 비정상적으로 커진 덩치와 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정이 포악하며 반성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를 퇴치하려 한 왕국군 병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맹독을 내뿜어 몰살시킨 흉악범입니다.]

와씨. 겁나 무시무시한 놈인 거잖아. 어쩌면 저 녀석이 속해 있던 차원의 홉고블린 중에서 짱 먹는 놈을 데려온 거 아닐까?

엮이지 말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차카란 녀석이 나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험악하게 노려보며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는데.

“Dam Zide? Biete, kde to je? Nurobiť Rodpoveď?”

“저기, 그렇게 흥분해 소리쳐도 이쪽에선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Frečo je ten Nizerný chlap Wočúvajúci?”

알아들을 순 없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저놈이 날 위협하고 있다는 걸. 아마 너는 누구고, 여긴 어디냐고 묻고 있는 거겠지. 걸쭉한 욕설을 섞어서.

“Wočúvajúci?”

귀가 따가운 괴성을 무한정 듣고 있자니 슬금슬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러시아 말을 전혀 모르는 한국인도 면전에서 러시아 욕설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모멸감을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서 외쳤다.

“근데 이 새끼가 언제 봤다고 윽박이야?”

어차피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거, 변비 걸린 멧돼지 얼굴을 해 가지고 아주 시끄러워 죽겠네.”

후우우우욱.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시원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사람 말로 해, 이 돼지 새끼야!”

내가 ‘사람 말로’를 외치던 찰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0층의 교도관이 소통의 권능을 발휘합니다.]

[죄수들의 귀는 이제 온 우주의 모든 언어를 번역할 수 있게 됩니다.]

꽥꽥대던 차카 도기노브가 어느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더욱 살벌해졌는데.

이 흐름은 설마…….

돼지의 주둥이에서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너, 지금 나보고 돼지 새끼라고 했냐?”

꽈앙!

녀석이 휘두른 주먹에 맞은 철장이 거세게 흔들렸다.

잠깐, 흔들렸다고? 내가 때렸을 때는 꿈쩍도 안 했는데?

“지금껏 내 면전에서 그 단어를 꺼낸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어, 그건 좀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너 되게 돼지같이 생겼어. 흑돼지.

“왜냐하면 ‘돼’와 ‘지’ 사이에 목이 날아갔거든.”

아무래도 건드려선 안 되는 놈을 도발한 모양이다.

뭐, 당장은 괜찮지 않을까. 저 녀석과 나 사이에는 아주 단단한 철장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덕분에 나는 용기를 쥐어 짜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철장 안에서 뭐 어쩔 건데. 이 돼지…… 놈아.”

물론 ‘새끼’를 ‘놈’으로 바꾼 것은 내 무의식적인 공포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차카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푸르딩딩해지고 있었다.

“너는 내가 반드시 씹어 죽인다. 음악과 미술 중에 뭘 더 좋아하나.”

뭐지, 이 신선하지만 언밸런스한 협박은?

“미술?”

난 왜 또 거기에 대답을 처하고 있나.

녀석은 씨익 웃더니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럼 귀를 먼저 씹어 먹은 다음 눈을 씹어 먹어주마.”

야, 그렇게까지 살벌할 거 있냐.

“이걸 왜 지금 물어봐 두는 건지 궁금하지 않나? 제일 먼저 씹어 먹어줄 게 네놈의 혓바닥이기 때문이야.”

위험하다. 저놈은 확실히 위험해.

“이 철장이 열리지 않기만을 기도해라, 애송이!”

어. 안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 걱정 마.

나는 씩씩거리는 차카를 외면하고 벽 쪽으로 물러섰다.

지금의 나는 전설캐에서 순식간에 똥캐로 강등당한 상황이다. 만약 차카가 날 잡아 잡숫겠다고 덤벼온다면 녀석의 소망이 실현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힘을 키워야 해. 본래의 힘까진 아니더라도.’

하지만 당장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은 차원 너머에서 죄수를 데려오는 감옥. 플레이어의 레벨에 맞춰 친절하게 사냥감을 제공해주는 게임 속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벽에 기대앉으려던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악, 깜짝이야.”

지금까지 유심히 살피지 않았던 벽면 구석에 한 죄수가 누워 있었다.

벽면을 바라보고 누운 뒷모습에서 엄청난 박력이 느껴지고 있다. 낡고 해져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수감복. 그 수감복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구릿빛 근육이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나는 용사의 심안으로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름: 르팔타커스 시온]

[종족: 인간], [클래스: 영웅]

[칭호: 무쌍의 검투사, 여덟 대륙의 패왕, 천공돌파의 수왕(囚王)]

[HP: ??,???], [MP: ?,???], [근력: ?,???], [민첩: ?,???]

[형량: ??,???년]

[감옥의 제어기능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특정 불가, 수치화 불가.]

얼마나 강하면 모든 능력치가 물음표로 표시될까.

저릿저릿하다.

영웅을 알아보는 것은 영웅이다. 용사의 육체가 가진 어떤 본능이 사내의 패기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일어나 봐요. 네?”

그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돌아누운 자세로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산 같은 존재감을 뿜어대고 있다.

뿔도 없고, 꼬리도 없다.

뒷모습에서 짐작되는 그의 종족은 분명 나와 같은 인간. 어쩌면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에 얼마나 계셨던 거예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쫌.”

처음엔 속삭임이었던 것이 점점 목청이 커졌다.

그러자 줄곧 나를 노려보던 차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야. 너 지금 뭐 하냐?”

“뭐하긴. 여기 누워 주무시는 죄수를 깨우려는 건데.”

“무슨 개소리냐. 거기…… 그냥 빈 벽면이잖아.”

갑자기 팔목에 소름이 돋았다.

“이분이 안 보인다고? 그냥 네가 야맹증이어서는 아니고?”

“……달빛 하나 없는 그믐밤. 숲속에 짱 박힌 엘프들을 추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나는 그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뜯어먹으신 몸이다. 네가 가리키고 있는 곳엔 분명 아무것도 없어.”

엄청 특이한 부분에서 자부심을 갖는 스타일이냐.

하지만 저 녀석이 말하는 내용만큼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진짜로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내가 르팔타커스라는 죄수와 차카를 번갈아 쳐다보는 동안 녀석은 나를 두고 ‘공포에 헛것을 보기 시작한 건가’ 하며 중얼거렸다.

헛것이라니, 이렇게 생생하게 보이는데? 게다가 정보창까지 뜨잖아. 허상이나 유령이라면 그럴 리가 없지 않을까.

내 눈에만 보이는 이 죄수.

가까이 가지 말라는 본능과 그의 정체를 알아봐야 한다는 이성이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끝에 가서 승리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죄수 르팔타커스 시온의 어깨를 만졌다.

“저기요?”

그러자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메시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경고! 경고!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유해와 지나치게 가깝습니다.]

[전방에서 상정불가의 마력과 끝을 알 수 없는 원한이 탐지됩니다. 이 유해와 절대 접촉하지 마십시오.]

절대 접촉하지 말라고?

야이씨, 그딴 건 건드리기 전에 말해줘야지. 만져버린 다음에 만지지 말라고 경고해주면 무슨 소용이야!

르팔타커스의 모습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떠오르며 내게 밀려왔다.

태산 앞의 지렁이가 된 기분이다.

하나의 존재가 일평생 무(武)의 길에 혼을 불살라 일궈낸 영혼의 격이 나를 짓눌러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

평생 패왕의 길만 걷는 자만이 낼 수 있는 음성이었다.

[짐의 유해를 볼 수 있는 죄수여.

짐은 그대의 얼굴과 이름을 알 수 없겠지. 그리고 지금 그대가 발 딛고 있는 시대 역시 짐작할 수 없을 터이고. 허나 짐의 유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대의 마음 안에 나와 동일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일지니.]

동일한 욕망?

설마 이자는 내가 가려던 길을 앞서 걸었던 자일까.

그것도 아주아주 오래전에.

[이 음침한 감옥의 꼭대기에 올라 교도관들의 오만함을 박살내는 것. 최초의 탈옥자가 되려는 것. 그것이 그대의 욕망일 것이다.

짐은 그대보다 먼저 그 길을 제패하려 했으나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짐은 이 감옥의 누구보다 먼저 가장 높은 층에 발을 디뎠노라. 허나 꼭대기에서 추락해 박살 난 영혼은 파편조차 맞추기 어려운 법. 그래서 짐의 남은 생명력이 바닥으로 꺼지기 전에 여기에 남긴다.

짐이 그대의 욕망을 알아봤으니,

그대는 짐의 원한을 헤아려다오.

받아들인다면 하늘 바깥의 하늘, 영웅 중의 영웅이었던 르팔타커스 시온의 이름으로 그대를 가호하겠다.]

영겁의 세월 동안 쌓여있던 누군가의 강력한 의지가 내 온몸을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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