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83화
본디 일곱의 대천사와 수천에 달하는 천사들을 소환하는 것은 단순히 신성력만 모은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천사들을 소환하여 마왕들에게 대적했으리라.
그렇다면 발타자르는 어떤 방법을 통해 이들을 소환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환 의식을 거행한 사제들의 옷을 붉게 물들인 혈흔의 주인들.
단도에 심장이 꿰뚫려 싸늘한 주검이 된 용사들이 바로 이번 소환의 핵심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바알의 손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뒤 발타자르는 고민했다.
과연 현재 제국의 전력으로 바알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확실하게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하여 발타자르는 제3의 세력을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다. 신계의 천사들을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발생했다.
천사들의 소환은 앞서 말했듯 단순히 신성력을 모은다고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천사들을 소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였고 일전에 사망한 사령군주死靈君主 오필리아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궁지에 몰렸던 오필리아는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마왕의 강림을 시도했고 예정된 시기보다 한발 앞서 포르네우스를 소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발타자르는 이 점을 눈여겨보았고 곧장 북부로 향해 아가레스에게 자문을 구했다.
처음 아가레스는 답하기를 망설였지만 이내 답을 내어주었다.
현재 상황으론 마신의 강림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차선으로 바알을 처단하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아가레스가 내어놓은 답은 이러했다.
천신과 마신은 각기 자신들이 보유한 간섭력을 통해 중간계에 마왕과 용사들을 불러들였다.
그 말인즉.
이 간섭력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신계의 천사들을 소환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고 아가레스는 간섭력을 이용할 방법으로 한 가지 방법을 권유했다.
그것은 바로 인신 공양.
용사들을 제물로 바쳐 천사들을 소환하라는 것이었다.
과거, 오필리아가 제 영혼을 바쳐 포르네우스를 소환했듯이 말이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제국에는 변절자들을 비롯하여 제물로 바칠 용사들이 넘쳐났으니까.
* * *
“대체 이게 무슨…….”
인도자 갈라호른을 비롯하여 일곱의 대천사들은 이 갑작스러운 소환에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진행된 대규모 소환.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눈앞에 보이는 바알이었다.
대천사들의 수장.
영도자領導者 카마실브를 살해했을 그 당시처럼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로부터 강대한 마기를 흡수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호오. 이게 누구야. 저들 살겠다고 제 주인을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들이잖아?”
치욕적인 언행.
그러나 대천사 중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뼛속까지 뿌리내린 공포가 그들의 몸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한심한 놈들.”
그런 대천사들의 모습에 바알이 흥이 식었다는 듯 혀를 찼다.
“이봐. 발타자르. 만약 이게 네가 준비한 비장의 한 수라면 넌 선택을 잘못한 거야. 저런 겁쟁이들론 결코 날 쓰러뜨릴 수 없어.”
바알이 어느샌가 다가온 발타자르에게 시선을 주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글쎄. 적어도 고기 방패 정도는 되어줄 것 같은데.”
발타자르의 말에 대천사들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고기 방패라고?”
“이 건방진 인간 놈이!”
“실로 오만방자하구나! 바알이 우릴 업신여긴다 하여 네놈 역시 그래도 된다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바알 앞에서는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그들이 발타자르에게는 언성을 높이며 윽박질렀다.
이에 발타자르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곤 검을 뽑아 들어 대천사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동안 중간계를 방패 삼아 충분히 평화를 만끽했을 터이니 이제 밥값을 할 시간이다. 싸워라. 맞서지 못하겠다면 고기 방패라도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 전쟁터는 이곳 중간계가 아닌 신계가 될 터이니.”
대천사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발타자르를 향해 덤벼들 것 같던 그들이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발타자르의 말대로 여기서 바알이 승리한다면 다음 목표는 신계가 될 것이었다.
따라서 발타자르와 대립한다는 것은 곧 공멸을 의미했기에 대천사들은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억누르며 바알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바알을 쓰러뜨린 이후. 반드시 네놈을 징벌하리라.”
관망하는 자 잉그리트가 발타자르를 한 번 쏘아보고는 손에 쥔 창대를 휘둘렀다.
“가라! 저 간악한 마왕을 쓰러트리고 중간계의 질서를 바로잡아라!”
잉그리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사들이 일제히 바알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아군 진영으로 돌아온 발타자르는 바알과 천사들의 전투를 관망했다.
지상에선 토벌대가, 하늘에선 천사들이 바알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알의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심지어 대천사들까지 가세했음에도 말이다.
“무시무시하군.”
손짓 한 번으로 수십의 천사들이 추락하는 광경을 목격한 칼 프란츠가 혀를 내둘렀다.
“이대로 있다간 천사들의 소환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될 텐데 슬슬 우리 쪽에서도 참전해야 하지 않겠나?”
칼 프란츠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간다르바!”
발타자르의 부름에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간다르바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국과 이종족 연합의 아크메이지들이 모두 허공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신호를 보내자 아크 메이지들을 비롯하여 토벌대의 모든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푸른 빛줄기가 되어 쏘아진 마력들은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바알과 천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전장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온전히 제 형태를 찾은 마법진은 이내 검은빛을 토해내며 제 존재감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바알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해보지만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천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적 우위의 이점을 이용하여 몸을 내던져가며 바알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결과.
아홉의 아크메이지와 수백의 마법사들이 동원되어 펼쳐진 대마법.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전장에 강림했다.
꽈르르르릉─!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과 함께 검은 빛이 유성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유성우들이 향하는 곳은 단 하나.
바알이었다.
* * *
희뿌연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마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쓰러뜨렸나……?”
칼 프란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한 발타자르가 말을 몰아 천천히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마스터들은 집결하라! 이제 우리가 나설 때다!”
외침과 동시에 발타자르가 탄 말이 대지를 박차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마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여 그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
그렇게 발타자르를 위시한 마스터들이 움직이던 그때.
하얀 연기를 뚫고 검은 촉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균열에서부터 돋아난 촉수들은 쉼 없이 꿈틀거리며 천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래야지.]
세 쌍의 날개.
전신이 검은빛으로 물든 어둠의 거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인, 바알의 웃음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자아! 와라! 이 몸은 바알. 일흔아홉의 마계 위에 군림하는 자. 파멸공 바알이니라!]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진 바알은 이내 대천사 둘의 심장을 맨손으로 꿰뚫으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대천사 중 그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도망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어차피 여기서 바알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신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신계를 수호할 의무가 있는 대천사들은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바알을 향해 덤벼들었다.
폭풍이 몰아치고,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대천사들의 권능에 반응하여 마스터들의 신검들이 공명하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열하나의 마스터와 다섯의 대천사가 바알을 쉼 없이 몰아쳤다.
꽈아앙─ 꽈아앙─
연신 폭음이 울려 퍼지며, 격돌의 여파가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격렬한 격돌 속에서도 바알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은 미소를 그리며 자신의 적들을 하나, 둘 쓰러뜨려 나갔다.
실로 압도적인 무위였다.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강적이었다.
“이렇게나 두드렸는데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군.”
잠시 지면에 내려선 발타자르는 고개를 들어 바알을 응시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효율의 극치를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이젠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나.”
작은 한숨과 함께 발타자르가 비비안을 소환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 물의 발판을 만들어 내었다.
발타자르는 그것을 딛고 뛰어올라 순식간에 바알의 앞까지 도달했다.
키이이이잉─
에테르 블레이드가 맹렬히 회전하고.
발타자르는 지체 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 일격은 바알의 손에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회전하는 에테르 블레이드를 맨손으로 붙잡은 바알은 그대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발타자르가 미련없이 검을 놓아버리며 물러서려 했지만 바알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대천사들과 마스터들의 일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발타자르를 향해 몸을 날린 끝에 바알은 그대로 발타자르의 어깨를 붙잡을 수 있었다.
푸욱-
바알의 손이 발타자르의 등을 뚫고 나왔다.
“커억…….”
발타자르의 입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몸.
초점 없는 동공.
이 모든 것이 발타자르의 죽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알!”
비비안이 바알의 손에서 발타자르의 몸을 빼돌리려 했지만 바알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크흐…… 드디어.]
바알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식사에 방해가 되는 대천사들과 마스터들을 향해 강맹한 일격을 날렸다. 그들은 이 일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일제히 추락했다.
[발타자르. 내 몸의 일부가 되어라.]
바알의 입이 쩌억 하고 크게 벌려졌다.
단숨에 발타자르를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 순간.
구멍 난 발타자르의 심장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의 정체는 아가레스로부터 강탈한 라이프 베슬이었다.
라이프 베슬은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시키며, 발타자르를 되살렸다.
하지만 발타자르를 잡아먹을 생각에 이성이 마비된 바알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알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바알이 그랬듯.
발타자르의 손이 바알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억…….]
검은 피를 쏟아내는 바알.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에 바알은 황급히 발타자르의 몸을 내던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지면으로 추락하던 발타자르는 이내 비비안의 도움을 받아 자세를 바로잡곤 바알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에테르 블레이드가 재차 맹렬히 회전하며 검신을 휘감았다.
직후.
비비안이 만들어낸 발판을 통해 바알을 향해 쏘아지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꽈아아앙─
막아서는 촉수들을 한순간에 베어 넘기며 바알의 머리 위에 도달한 발타자르는 이내 푸른 빛무리에 휘감긴 에테르 블레이드를 바알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순간, 바알의 두 눈이 크게 치켜 떠지고.
“이걸로 끝이다. 바알.”
발타자르의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파앙─
허공을 박찬 발타자르의 신형이 바알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하늘을 가르는 일격.
그것이 바알의 미간에 적중한 순간.
파아아앗-
찬란한 서광이 세상을 뒤덮었다.
Epilogue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서자 겨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밖으로 차가운 한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으로 뒤덮인 정원을 거닐고 있자니 문득 지난날들이 하나둘씩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죽음과 새로운 시작.
이 땅의 운명을 뒤바꾸기 위한 기나긴 여정들.
그리고 그 길에 함께한 수많은 동료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종종 이렇게 과거를 회상할 때면 드문드문 생각하곤 했다.
과연 내가 지나온 길이 옳은 것이었는지.
좀 더 잘할 수 있었는지는 않았는지.
“날이 춥군.”
슬슬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저 멀리 다가오는 여인이 보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연보랏빛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
뭇 사내들이 보았다면 단숨에 심장을 빼앗겨 버릴 만큼 아름다운 그녀는 발타자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와락-
단숨에 발타자르의 품에 안겨든 여인.
청아한 프리지아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오라버니!”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된 아이린이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다녀왔어요!”
저 멀리 남부 대수림에 살고 있다는 유니콘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그녀가 돌아온 것이었다.
“어서 오렴. 아가.”
언제부턴가 발타자르는 린을 아가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 자신을 향한 애정의 표현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때때론 이 호칭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해서, 아가란 애칭을 바꾸어 달라 매번 요청하지만, 그때마다 발타자르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모른 척했다.
“아이참. 언제까지 아가라고 부르실 거예요. 이제 저도 다 컸다구요.”
아이린이 뚱한 표정으로 발타자르를 흘겨보자 그런 그녀에게 발타자르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행복하니?”
발타자르의 물음에 고민하던 것도 잠시.
아이린은 이내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는요?”
그녀가 묻자 발타자르 역시 그녀가 그랬듯 마주 웃어 보였다.
“네가 행복하니 나도 행복하구나.”
지나간 날들에 대한 아쉬움은 많지만, 그럼에도 한 점 후회는 없었다.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웃고 있으니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