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82화
적막한 숲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뒤이어 동물들 역시 다급한 발놀림으로 숲속을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이 갑작스러운 이변에 휴식을 취하던 마족들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숲을 응시했다.
그러나 앞서 벌어진 이변은 허상이었다는 듯 숲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뭐야. 맹수라도 지나갔던 건가?”
김이 샜다는 듯한 마족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쿵- 쿵-
조금씩 땅이 흔들리며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마족 몇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끝없이 늘어선 깃발의 향연.
“저, 적습이다!”
개중에 눈치 빠른 마족 하나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것과 동시에.
뿌우우우─
긴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일사불란한 군화 소리가 척척-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지고 곧이어 그 수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마족들은 도망치기는커녕 전의를 불태우며 마수들을 앞세워 제국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쟤들은 겁도 없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트리스탄이 히죽- 웃으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다섯 발의 화살이 반원을 그리며 표적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하겠나?”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외눈의 사내, 타우렐 서머셋이 다가와 내기를 제안했다.
“어떤가. 발타자르 공작 가와 칼 프란츠 대공 가의 번견 중 누가 더 뛰어난 사냥개인지 겨루어 볼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타우렐 서머셋의 도발에 트리스탄이 대꾸 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피이이잉─
깃대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다섯 발의 화살은 정확히 목표한 마족들의 머리통에 꽂혀 들었다.
추락하는 마족들.
트리스탄이 차가운 눈동자로 타우렐 서머셋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섯 마리.”
순간, 타우렐 서머셋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겁하군.”
타우렐 서머셋의 말에 트리스탄이 조소하며 답했다.
“순진한거야 아님 멍청한거야? 전장에서 비겁한 게 어디 있어? 어떤 수를 쓰던 주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 그게 사냥개잖아?”
말하며, 트리스탄이 재차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사냥개에게 명예는 사치지. 안 그래?”
피잉─
쏘아진 화살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마족들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놓았다.
“여덟 마리.”
트리스탄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그녀의 도발에 타우렐 서머셋이 자리를 박차고 전장을 향해 뛰어들고 그것을 바라보던 트리스탄이 활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자! 전쟁이다!”
트리스탄의 외침을 신호로 본격적인 바알 토벌이 시작되었다.
* * *
“진형을 유지해라!”
“물러서지 마라!”
거대한 마수들이 전열을 휩쓸고 그 뒤를 이어 마족들의 마법이 토벌대 진영을 강타했다.
마족은 개개인이 마법사이며 동시에 기사였고 이로 인해 수적으로 우세하던 토벌대가 일시적으로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하나를 쓰러뜨리면 둘이 덤벼들고, 둘을 쓰러뜨리면 다섯이 덤벼들었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토벌대의 공세 앞에 마족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결국 숫자놀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금방 끝나겠어.”
후방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칼 프란츠가 짧게 평을 내렸다.
마법사들을 비롯한 고위 전력이 투입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숫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황은 점점 토벌대 측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데 기사들은 투입하지 않을 생각인가? 그들을 투입시킨다면 더 빨리 전투를 끝낼 수 있을 터인데. 바알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잡졸들은 빠르게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칼 프란츠의 제안은 실로 합당한 것이었으나 발타자르는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따로 쓰임이 있습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일순간 미간을 찌푸렸던 칼 프란츠는 이내 발타자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깨닫고는 혀를 내둘렀다.
현재 상황에서 기사들이 따로 투입될 곳은 없었다. 적의 예비 전력을 대비하는 것은 바알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는 마법사들로도 충분했으니까.
따라서 기사들을 전장에 투입하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어쩐지…… 바알의 행방을 찾아내기가 무섭게 출진을 서두르더라니 만. 이 기회에 각 세력의 전력을 갉아먹을 생각이로군.”
현재의 토벌대는 모든 면에서 조잡했다.
군의 편성이 끝나지도 않은 데다 군에서 가장 중요한 병참선까지 준비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여러 자잘한 문제 거리가 산재한 상황이기에 바알의 행방을 찾았다고 해도 출진 일정은 빨라도 한 달 후 정도로 예상하던 칼 프란츠였다.
한데 바알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출정식을 올리고 출진을 개시했다.
이 갑작스러운 출진은 발타자르가 내린 판단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급작스러웠다.
하여 대체 발타자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는데 그 이유가 세력간의 균형을 조정하는 것이었다니.
생각할수록 감탄만 새어 나왔다.
“하하. 제국 개편이 내게 조금 불리하다 싶었더니 뒤에서 이런 준비를 하고 있었군. 확실히. 이렇게 되면 제국 개편은 내게 이득이지.”
칼 프란츠가 껄껄 웃기 시작하자 발타자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능구렁이가 눈치챌 것은 예상했지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칼 프란츠의 짐작대로 발타자르는 이번 바알 토벌을 통해 각 세력의 전력을 재조정할 생각이었다.
권력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안달 내면서도 동시에 손에 쥔 권력을 휘두르지 못해 안달 난 족속이니까.
제국 개편을 통해 지방의 독자적인 통치권이 보장된다면 각 주의 군왕들이 가장 먼저 할 행동은 하나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제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은 뻔한 일.
그렇기에 각 세력의 전력을 대폭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임시방편이지만 현재 상황에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전력을 회복할 때까지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정치 공작이 주를 이룰 테고 각 세력이 잃었던 전력을 회복할 즘이면 권력 구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일 테니까.
물론 먼 훗날.
각 세력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는 제국에 거대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발타자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중요한 것은 발타자르와 아이린이 살아갈 동안 제국이 평화로운 것이었으니까.
“대공.”
발타자르가 나지막이 칼 프란츠를 부르자 그가 웃음을 뚝 그치고는 발타자르에게 조금 다가가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어느 정도의 전력은 나도 소모 시키도록 하겠네. 트집 잡힐 일을 만드는 것은 나도 사양이니 말일세.”
칼 프란츠의 말에 발타자르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보다 슬슬 바알이 나타날 것 같은 데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인데.”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하며 발타자르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이에 칼 프란츠가 그곳을 바라보니 과연.
각 교단의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것이 발타자르가 준비한 수라는 것을 깨달은 칼 프란츠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작정하고 준비했군그래. 그 고고한 교단들을 순순히 참전할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제국 개편을 미끼로 저들을 끌어들인 것이로군. 확실히. 마족을 상대함에 있어 사제들만 한 전력은 없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투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내가 바로 칼 프란츠 대공가의 쌍두마차. 외눈의 타우렐이니라!”
제 몸집보다 큰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타우렐 서머셋이 마족들을 휩쓸었다.
“하하! 약하구나! 약해! 마족이라고 잔뜩 기대했건만 너무 시시하지 않느냐!”
마스터를 목전에 둔 그는 그 실력에 걸맞게 양 떼 속에 난입한 늑대처럼 거침없이 마족들을 곤죽으로 만들며 날뛰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트리스탄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혀를 쯧쯧 하고 찼다.
“무식하네. 지휘관이 저렇게 싸움에 눈이 돌아가서야 되겠어? 안 그래?”
옆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갤러해드가 그게 네가 할 소리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에 트리스탄이 발끈하며 물었다.
“뭐야! 그 눈빛은!”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흠. 저쪽이 살짝 밀리는 것 같군. 먼저 가 보겠네.”
말하며, 갤러해드가 말을 몰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트리스탄이 그런 갤러해드의 뒷모습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이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 * *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전은 토벌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승리에 환호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그저 몸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이어 적들의 본대가 몰려오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터.
지휘관들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다시 대열을 갖추고 다가올 적들에 대비하던 그때.
저 멀리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먹구름이 밀려오고, 뒤이어 괴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는군.”
적들이 밀려오는 곳을 가만히 응시하던 발타자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그것을 신호로 먹구름 사이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디어 왔구나. 발타자르.]
소년의 모습을 한 바알의 목소리가 천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자아! 시작해 보자! 최후의 결전을!]
세 쌍의 날개가 펄럭였다.
무척이나 단순한 동작.
그러나 그것이 일으킨 현상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바알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유리창이 깨지듯 균열이 일어났다.
스아아아아─
균열의 틈새로 눈동자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소름 끼치는 광경에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당황하지 마라! 보병들은 전열로! 궁수들은 불화살을 준비해라!”
“투석기 발사 준비!”
“방금 싸웠던 것처럼만 싸우면 된다! 쓰러뜨리지 못할 상대가 아니다! 다들 침착하게 움직여라!”
정신을 차린 지휘관들이 서둘러 병사들을 지휘하며 대열을 갖추던 그 순간.
바알이 균열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찢어 벌렸다.
키이이이잉─
스산한 괴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공간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강렬한 마기가 균열로부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준비한 수가 저것이로군.”
수백, 수천 개의 눈알이 깜빡거리는 균열의 틈을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조소했다.
저 균열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로 짐작하건대 균열 너머는 마계와 연결되어 있거나 혹은 저 균열이 바알에게 힘을 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대응하는 것이 이치겠지.”
발타자르가 검지를 들어 올려 머리 위로 원을 그렸다.
그것을 신호로 준비하던 교단의 사제들과 일부 용사들이 일제히 신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마기와 충돌한 신성력이 거친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었고 직후.
하늘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천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펄럭─
새하얀 순백의 날개를 펄럭이며.
주신主神을 보필하는 일곱의 대천사.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신계의 군대가 이 땅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