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81화
“제국 개편이라…….”
칼 프란츠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내.
발타자르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이른 아침부터 입궁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이런 안건을 가져올 줄이야.
발타자르의 계획은 표면적으로 볼 때 중앙의 힘을 약화하고 지방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으로 자칫 전 대신들이 집권하던 시기보다 더 제국이 뒤흔들릴지도 몰랐다.
중앙 집권화를 노리는 칼 프란츠로서는 응당 거절해야 함이 옳지만, 마냥 그럴 수도 없었다.
아직은 발타자르와 대립각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둘째가는 큰 세력을 이루었음에도 발타자르의 세력과 비교한다면 압도당하는 것이 현실이니까.
또한, 발타자르가 이 계획을 자신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세력들의 포섭이 이미 끝났거나 확실하게 포섭할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렴. 발타자르가 이 계획을 내밀었을 때 거부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무려 일국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것을 제 발로 걷어찰 멍청이가 있을 리가.
‘이종족, 바이칸, 남부 귀족 연맹, 동부 해상 동맹 등 기존 세력들의 몰락 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세력들은 이 계획을 적극 찬성할 터. 그나마 믿어볼 곳은 황제파이지만…….’
그쪽은 큰 기대를 하기 힘들었다.
이번 제도 사태로 인해 대다수가 목숨을 잃어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위 계승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때 이런 계획을 내어놓는 것은 후일을 대비하기 위함이겠지.’
제국 개편은 발타자르가 북부로 돌아간 이후를 위한 안전장치임이 분명했다.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지가 관건이로군…….’
고뇌하는 속내와는 다르게 칼 프란츠는 웃는 낯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원하는 대로 하게.”
칼 프란츠의 허락이 떨어지자 발타자르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무얼. 자네 덕분에 황위에 오르는 데다 왕 중의 왕이라는 최초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 다만.”
말을 끊으며, 칼 프란츠가 형형한 안광으로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서부 곡창지는 내게 내어주어야겠네.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칼 프란츠의 말에 발타자르는 속으로 피식 웃어버렸다.
과연.
그 짧은 새에 자신이 취할 이득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해 낸 것에 대해 절로 감탄이 일었다.
‘주도권만 잡는다면 이후 펼쳐질 난세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 보군.’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대륙의 중심인 중앙과 대륙 최대 곡창지인 서부 곡창지는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줄 테니까.
‘다른 이였다면 내 눈치만 보다 마지못해 승낙했겠지.’
새삼 칼 프란츠를 차기 황제로 추대한 결정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집권한다면 이후 제국은 내부의 암투는 치열할지언정,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전란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칼 프란츠는 충분히 황제로 추대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뭐. 칼 프란츠가 이후 펼쳐질 난세를 평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제국 개편이 시행된다면 적어도 몇 세대 동안 만큼은 누구도 북부에 그 어떠한 수작질을 부리지 못할 테니까.
그 이후는…….
‘후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냉정하다면 냉정한 말이지만 후대까지 신경 써줄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니까.
뒤치다꺼리는 이 땅에서 마왕을 모두 몰아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내어줄 생각이었던 땅이었기에 발타자르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칼 프란츠의 안면에 미소가 맺혔다.
“좋군. 좋아. 한데 이것은 언제 공표할 생각인가?”
칼 프란츠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바알의 토벌이 끝난 직후가 좋을 듯합니다.”
그 대답에 칼 프란츠가 눈동자를 빛냈다.
“토벌에서 얼마나 공적을 쌓는지에 따라 군왕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가 판가름 되겠군.”
자신의 의중을 단박에 간파한 칼 프란츠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다들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칼 프란츠의 처소를 벗어나기 직전.
발타자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대공께옵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위에 오르시려면 말입니다.’ 하고 뒷말을 남기고 나서야 발타자르가 완전히 자리를 벗어났다.
발타자르가 떠나가고 홀로 남게 된 칼 프란츠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야 원. 못 당하겠군.”
군왕의 위位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될 다른 이들과 달리 칼 프란츠는 바알의 토벌에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레오노플과 발타자르에게 황위를 약속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다른 세력들의 수장은 달랐다.
발타자르가 언급한 대로 바알의 토벌에서 어느 정도의 공적을 세우느냐에 따라 군왕 직을 하사받느냐 마느냐 혹은 통치하게 될 땅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기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참에 바알 토벌 전에서 경쟁자들의 전력을 대폭 축소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서부 곡창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공적이 필요했기에 어느 정도 토벌에 집중하는 시늉은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레오노플도, 발타자르도.
그에게 황좌를 주겠다 했지 언제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옥좌라는 인질이 있는 한 칼 프란츠는 발타자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수밖에 없었다.
* * *
제국 남부.
무너진 성벽의 잔해 위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삭-
빨갛게 익은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문 소년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두 발을 동동 휘저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흐흥~ 그래서. 발타자르가 날 찾고 있다고?”
소년, 바알의 물음에 그의 발치 아래 바짝 엎드려 있던 마족 중 하나가 고개를 치켜들며 답했다.
“예. 그, 그렇습니다.”
말하는 마족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몸, 눈동자.
겉으로 내비치는 모든 외형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성터 인근의 숲에는 바알의 손에 목숨을 잃은 마족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내걸려 있었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심심해서.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수백의 마족들이 사망했다.
그러니 이렇게 두려워할 수밖에.
“그래?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네?”
아삭-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가 적막한 성터에 울려 퍼졌다.
“이거 맛있네. 너도 먹을래?”
바알이 몇 입 베어 문 사과를 내밀며 물었다.
이에 마족은 재차 몸을 바닥에 바짝 엎드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저것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선택에 자신의 목숨이 걸렸다는 것을 직감한 마족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가, 감사합니다.”
마족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과를 받아들자 바알이 말했다.
“먹어봐. 잘 익어서 맛있더라.”
“예, 예.”
아삭- 마족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때? 맛있지?”
사실 극도의 공포감 때문에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족은 이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 먹어본다는 투로 답했다.
“아, 아주 맛있습니다.”
그런 마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알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예. 이런 사과는 제 일평생 처음입니다.”
“이상하네.”
“……예?”
“난 별로던데.”
바알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마족이 고개를 치켜든 순간.
그의 머리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살점 덩어리와 검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바알이 손등에 묻은 피를 할짝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별로네.”
입에 머금었던 피를 퉷- 하고 뱉어낸 바알이 울창한 숲 너머를 응시했다.
“빨리와, 발타자르. 기다리다 지치면 덜 익었어도 잡아먹으러 갈 테니까.”
* * *
“아저씨! 찾았어요!”
이른 아침부터 신시아가 찾아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타자르는 그녀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에 있던가?”
“남부 슐레르망 백작령이요. 영주성을 초토화시키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더라구요.”
슐레르망 백작령이라면 제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였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찾아올 생각이군.’
어차피 바알의 유예기간 따윈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휘하 마족 50만 정도가 함께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바알과 함께 있는 마족들은 필시 바싸고가 이끌던 마왕 군이 분명했다.
“가웨인.”
“예, 장군.”
“지금 즉시 입궁할 걸세.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발타자르의 지시에 가웨인이 작게 고개 숙여 보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신시아 자네는…….”
“네. 말씀하세요.”
잠시 말을 멈추고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발타자르는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재차 입을 열었다.
“소문을 퍼뜨려 주게.”
“소문이요? 어떤 소문요?”
신시아가 되묻자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국 개편.”
지난번엔 방심하여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농락당했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하여, 바알의 목을 치리라.
* * *
아가레스를 토벌하기 위해 소집령을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재차 소집령이 내려졌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귀족들이 대거 반발하며 소집령에 불응했겠지만, 이번 바알 토벌전에서의 공적에 따라 작게는 승작에서 크게는 군왕의 위를 하사받게 된다는 소문이 퍼진 터라 소집령에 불응하는 귀족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제국이 한창 시끄럽던 때에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았던 대영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참전 의사를 밝히니 그 아래의 귀족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용병들을 고용하며 바알의 토벌에 참여하기 위해 제도로 상경했다.
그렇게 벌떼처럼 모여든 병사들의 숫자만 물경 300만.
제국의 존립 위기에서나 동원할 수 있을 법한 규모였다.
“어마어마하군요.”
성벽 위에서 모여든 병사들을 바라보던 가웨인이 감탄했다.
“대체 제국 어디에서 이만한 병력들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웨인의 밀에 제도로 입성하는 귀족들의 행렬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처럼 저들 영지에 틀어박혀 있다간 도태될 것을 깨달은 것이겠지.”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많은 영주 중 반이라도, 아니, 반의반만이라도 제국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국이 이 지경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아쉬워한들 뭐 하겠나.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을.”
“그렇긴 하지요.”
가웨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발타자르는 그런 가웨인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인 후 성벽 아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 가세.”
모든 준비가 끝이 났고.
이제.
사냥을 시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