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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80화 (180/183)

공작이 회귀함 180화

제국 개편.

이것은 발타자르가 막연히 생각만 해왔던 것으로,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배신을 계기로 하여 점점 뚜렷한 계획으로 변화했고 조반니의 역모 사태 건에 이르러서는 이 계획을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큰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제국의 상징성을 감안하여, 프락시온 제국의 이름과 황실은 그대로 유지하되 제국을 13개의 주로 분할 한다.

단, 북부와 중부는 그대로 두되 서부와 동부는 두 개 주로, 남부는 일곱 주로 분할 한다.

각 주를 통치하는 이들에게 군왕郡王의 위位를 하사하며, 이 군왕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주에 한하여 황제의 명보다 군왕의 명을 우선시하는 통치권을 부여한다.

단순히 보자면 기존 체제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선제후를 군왕이라 칭하는 것.

주와 선제후의 숫자가 늘어난 것.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선제후들의 권한을 수면 위로 드러낸 것.

달라지는 것은 이 세 가지뿐이었고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제국 개편의 핵심은 늘어난 군왕의 숫자와 기존 선제후들이 가졌던 권한을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이었다.

군왕들이 독자적인 통치권을 획득함으로써 황제는 필수 불가결하게 군왕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군왕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는 위정자들에게 정치적 역량이 중요시되게 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었다.

황제를 제외한 모든 위정자들은 이것을 두 손 들고 반길 것이 확실했다.

왜 거부를 하겠는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합법적으로 손에 쥘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인데.

반면 황제 혹은 황실의 입장에선 상당히 꺼려할 만한 계획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권한이 약화되는 것이니까.

적잖은 반발이 예상되지만 그들의 입에 물려줄 당근 또한 생각해 두었다.

발타자르가 준비한 당근은 총 세 개였다.

첫 번째는 기존 선제후들에게 막강한 힘을 부여했던 황제 선출권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황제는 이전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 줄 수 있게 되니 이전처럼 선제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는 황제가 중앙과 서부 곡창지가 포함된 주를 통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륙의 중심과 대륙 최대 곡창지를 손에 넣음으로써 황제는 군왕들보다 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황제에게 큰 힘이 되어줄 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명예였다.

선제후들을 군왕이라 칭함으로써 황제는 왕들을 다스리는 왕 중의 왕. 진정한 의미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좀 더 다듬을 필요는 있겠지만…… 좋군요. 이것이라면 향후 각하께옵서 북부로 돌아가신다고 한들 큰 무리 없이 제국이 운영될 것입니다.”

글루스가 감탄하며, 뚫어지라 제국 전도를 응시했다.

“여기엔 바이칸들을 배치하고 여기엔 이종족들을. 그리고…….”

쉴새 없이 중얼거리며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글루스를 바라보던 신시아는 이내 시선을 옮겨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북부의 군왕은 아저씨가 되시는 거겠죠?”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타자르 휘하의 무장들은 대다수가 그와 함께 겨울 전쟁을 이겨낸 역전의 용사들로 그런 만큼 하나같이 성향이 호전적이고 발타자르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났다.

따라서 발타자르가 아닌 다른 이가 북부의 군왕이 된다는 것을 그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단박에 북부 전역에 걸쳐 전화의 불길이 치솟으리라.

“그래야지. 다른 이를 군왕에 앉혔다간 여기저기서 잡음이 나올 테니.”

발타자르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신시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왜 남부만 일곱 주로 나누는 거예요?”

비록 남부의 땅이 다른 지방에 비해 광대하다고 해도 그것이 일곱 주로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부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 드넓게 펼쳐진 곳이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슈리마 왕국과 대수림.

이것들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남부는 향후 정체될 다른 주들에 비해 끝없이 영토를 넓혀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물론 이것을 감안해도 일곱 주로 분할한 것은 과했다.

하지만 남부의 일곱 주에 터를 잡을 군왕들이 이종족 연합의 장들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암묵적인 제국의 적으로 남게 하여 제국이 오만과 나태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채찍 역할을 맡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견은 없는 듯하니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그리고.”

신시아와 글루스.

두 사람이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치자 발타자르가 말했다.

“주교들을 소집하게. 슈미트라 교단만이 아니라 사교를 제외한 모든 교단의.”

제국이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었으니 이제는 바알의 토벌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 *

천 년을 이어져 온 프락시온 제국은 그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교단이 존재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지고 번영한 것이 슈미트라 교단이었다.

사교들을 포함하여 제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교단을 합쳐야 겨우 비교가 가능할 정도.

처음부터 슈미트라 교단이 이러한 성세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번영과 성세는 오직 황제를 견제하기 위한 간신들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간들을 통치하는 것은 황제이지만 그것은 신께서 허하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며 간신들은 누대에 걸쳐 제국의 황제들을 압박했고, 여기에 앞장선 것이 바로 슈미트라 교단이었다.

간신들과 슈미트라 교단의 압박과 황제들의 연이은 실책, 그리고 무능한 황제들의 배출이 맞물려 결국 제국의 주도권은 간신들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 결과 슈미트라 교단은 제국 최대 종파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뭐, 지금에 이르러선 자비에고 주교의 일로 완전히 발타자르의 눈 밖에 난 덕분에 이전보다 그 세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 * *

“이해할 수가 없군. 발타자르 공작 각하는 대체 무슨 일로 우릴 불러 모은 것인가.”

자비에고 주교의 사후 새로이 주교의 직에 오른 도이체 주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에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갈라토스 교단의 멜리앙 주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이번 메디치가의 역모 사건으로 저희를 소집한 것은 아니겠지요?”

멜리앙 주교의 말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카슈마르 교단의 멜레바르 주교가 도이체 주교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우린 그들과 아무런 접점도 없고 또한 그들이 모반을 일으킬 당시 제도를 떠나 있었소. 역모 사건 때문에 소집한 것은 아닐 것이오. 아! 물론 도이체 주교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은 국교로 지정된 슈미트라 교단 외에도 다른 교단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교 활동을 허가했다.

하지만 다른 교단의 성장을 우려한 슈미트라 교단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슈미트라 교단을 제외한 교단은 제도에 신전을 건설하지 못하게 조치하였고 이 때문에 다른 교단과의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멜레바르 주교. 말조심하게.”

도이체 주교가 서슬 퍼런 기색으로 경고했지만 멜레바르 주교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아직도 슈미트라 교단의 위세가 이전과 같은 줄 아는가 보군. 내가 그런다고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소?”

“……뭐라?”

“아직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나 보오. 자비에고 주교의 실책으로 발타자르 공작 각하의 눈 밖에 난 슈미트라 교단이오. 이제 몰락할 길만 남았는데 이 자리에 모인 주교 중 그 누가 두려워하겠소.”

“이이익…….”

도이체 주교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당장 발타자르의 부름에 헐레벌떡 달려온 것도 그의 눈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여기서 더 언쟁을 벌여봐야 자신의 체면만 상하는 일이라 판단한 도이체 주교가 경고와 함께 대화를 끝마치려 했다. 그러자 멜레바르 주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두고 보자면 누가 무서울 줄 알고?”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에 도이체 주교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발타자르가 등장했다.

“소란스럽군.”

갑작스러운 발타자르의 등장에 응접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이체 주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반쯤 일어선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넨 왜 그러고 있는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발타자르가 물음에 도이체 주교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멜레바르 주교가 비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봤지만, 도이체 주교는 입술을 질끈 깨물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모일 사람은 얼추 다 모인 것 같으니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발타자르는 깍지낀 손에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이 땅에 마지막 남은 마왕. 바알을 토벌할 계획이네. 하여 각 교단에서는 사제들과 크루세이더들을 지원해 주었으면 하네.”

발타자르의 말에 대부분의 주교들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을 거부할 교단은 없었다. 그의 요청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으니까.

마왕은 신의 뜻에 반하는 자.

그런 만큼 교단에 몸 담고 있는 이들에게 마왕의 토벌에 참전은 의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교단들에게 참전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저…… 어느 정도의 지원을 원하시는지요?”

멜리앙 주교가 조심스레 묻자 발타자르가 자신을 주목하는 주교들을 한번 훑어보며 답했다.

“근시일 내로 황위 계승식과 함께 제국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릴 걸세. 이만하면 답이 되었는가?”

말인즉, 교단들 역시 모든 전력을 동원하라는 뜻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교단으로 돌아가는 즉시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교단의 세를 확장할 기회였기에 도이체 주교를 비롯해 제법 큰 규모의 교단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했다.

하지만 중소규모의 교단들은 달랐다.

동원할 수 있는 사제와 크루세이더들의 규모가 작아 참전한다 해도 큰 공을 세우기는 어려운 데 반해 자칫 투입한 이들이 전멸할 경우 교단이 그대로 몰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교단의 존망이 걸린 일.

따르자니 무리가 따르고, 따르지 않자니 그 후환이 두려웠다.

그러한 주교들의 심정을 예상이라도 한 듯 발타자르는 그들이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내밀었다.

“바알의 토벌이 끝나면. 황제 폐하께 한 가지 안건을 제안할 생각이라네.”

발타자르가 운을 떼자 주교들의 이목이 단박에 집중되었다. 혹시나 자신들에게 꿀 가루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발타자르는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명색이 종교인이라는 작자들이 제국의 위정자들 못지않게 탐욕스러웠다.

“신의 축복을 받은 땅. 성스러운 성지 교국. 그리고 그 땅을 다스리는 신의 대리자. 교황.”

정확한 설명 없이 추상적인 말들만 내뱉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주교들의 입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교들의 두 눈동자에 서서히 탐욕이 서리기 시작하자 발타자르가 그것에 마침표를 찍었다.

“바알의 토벌에서 얼마만큼의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교국에서의 위치가 달라질 걸세.”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내 말. 이해했는가?”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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