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78화
“발타자르.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조용히 보내주마.”
도착한 군세를 등에 업고 바싸고가 허세를 부렸다.
“설마 이만한 병력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는 것은 아니겠지? 개죽음을 당하기 싫다면 내가 자비를 보일 때 물러가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비록 바알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를 제외한다면 그 어떠한 마왕도 적수가 되지 못하는 발타자르였다.
그런 그에게 숫자놀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을 바싸고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바싸고를 향해 검을 겨눈 채로 발타자르가 말했다.
“말했을 텐데. 네놈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그 말에 다급해진 바싸고가 황급히 소리쳤다.
“제도의 인간들을 모두 죽일 셈이냐!”
그 말에 휘둘러지던 발타자르의 검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이번에는 제도의 신민들을 인질로 잡을 생각이더냐?”
발타자르의 물음에 타협의 여지를 본 바싸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 조반니와는 이미 얘기가 끝난 사항이다. 만약 네가 여기서 싸우고자 한다면 나는 제도의 인간들을 제물로 바쳐 힘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네가 지게 되겠지.”
바싸고는 자신만만해했다.
마왕과 반군을 잡기 위해 수만의 백성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은 제도의 신민들에게 큰 원망을 살 만한 일이었다.
한둘도 아니고 무려 수만에 달하는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리 발타자르라고 해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발타자르가 그동안 보인 행보는 제국을 위한 희생적인 면모가 컸다. 따라서 제도에 거주하는 인간들을 희생시킨다는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바싸고의 오판이었다.
발타자르는 이 땅에서 마왕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제도의 신민들을 희생시킬 용의가 충분했다.
그러니 바싸고의 협박은 발타자르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게 끝인가?”
“……뭐?”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졌다.
동시에 바싸고의 가슴이 베어지며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자 바싸고는 황급히 옷자락을 움켜쥐며 물러났다.
“정녕 해보자는 것이냐!”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바싸고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의 날개에서 검은 깃털들이 하늘하늘 흩날려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깃털들은 순식간에 제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조반니는 상정했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바싸고가 작정하고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니 제도에서 안전한 곳은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는 황궁뿐이었다.
이제 곧 황궁을 제외한 제도의 온 땅이 죽음의 대지로 변모하리라.
“따라와라! 황궁으로 향한다!”
조반니가 황급히 말을 몰아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수하들이 그 뒤를 따라 이동하자 졸지에 남겨진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자리를 지켰다.
* * *
최상위 서열의 마왕들은 각자의 이명에 걸맞은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권능이라고 칭하는데 예를 들어 불사왕 아가레스의 경우 죽음을 피해가는 불사의 권능을 지니고 있고, 파멸공 바알의 경우 모든 것을 분쇄하는 힘을 가진 파멸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탐욕의 귀공자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바싸고의 권능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이었다.
어찌 보면 신에 가까운 권능.
하지만 그런 만큼 제약이 큰 권능이기도 했다.
이 탐욕의 권능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수만에 달하는 제물을 바쳐 특정한 무대를 만들어내야만 했고 그것마저 한시적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강력한 권능임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 힘이 지금.
제도를 무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 * *
꽈앙─ 꽈앙─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지며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그것을 맞받아치는 바싸고는 일격 한 번을 막아낼 때마다 사지가 하나씩 사라져갔다.
처음에는 오른팔.
그다음은 왼팔.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가고 두 날개마저 베어지던 그 순간.
사방으로 흩날려간 바싸고의 깃털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제도를 뒤덮었다.
땅속에서 차오르는 붉은 물결이 순식간에 제도를 집어삼켰다.
근처에서 포위망을 구성하던 병사들이 붉은 물에 잠기며 허우적대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마지막 손길이 완전히 물에 잠기고, 푸른 장막에 휩싸인 황궁을 제외한 제도 전역이 붉은 물결에 잠긴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흐…… 흐하하하!”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강력한 힘을 느낀 바싸고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려 나간 사지는 순식간에 회복되고 등 뒤로 세 쌍의 날개가 새로이 생겨났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힘의 기운이 바싸고에게서 느껴졌다.
“노리던 것이 이것이었나?”
제물을 바탕으로 힘을 얻는다.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자그만치 수만에 달하는 제물을 바쳐 힘을 얻었으니 그 강함이야 오죽하겠느냐마는 그것이 발타자르에게 위협으로 다가올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군.”
바싸고가 홍옥처럼 영롱히 빛나는 두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아무런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만한 힘을 가졌음에도 그대를 이길 수는 없겠지.”
바싸고가 순순히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패배를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안에서 마물들의 앞발이 치솟기 시작했다.
하나, 둘.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마물들의 향연.
“적어도 네놈의 사지 하나 정도는 가져가기에 충분하지.”
바싸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물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크와아아아앙─
마물들의 포효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바싸고는 등골을 스치는 전율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사지 하나를 잃은 넌 결코 바알을 이길 수 없으리라.”
포효하는 마물들의 등 위로 날개가 돋아나고, 마물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떠올랐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명백했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우리 마왕들이니라!”
바싸고의 손짓을 신호로 발타자르를 향해 마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성문을 열어라! 어서!”
황궁의 성문 앞에 도착한 조반니는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급한 마음에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직접 성문을 쿵쿵- 두드렸다.
“문을 열라니까!”
조반니는 소리치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아래 바싸고가 발타자르가 대치하는 곳에서부터 붉은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반니는 더욱 다급하게 성문을 두드렸다. 그때, 성벽 위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 이놈! 어서 문을 열지 못하겠느냐!”
조반니가 소리치자 고개를 내민 인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미소지었다.
“많이 급하신가 봅니다?”
명백한 조롱이 담긴 목소리에 조반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평상시에는 항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일관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사뭇 대조되는 얼굴이었다.
“네 이노오옴! 죽고 싶은 게냐!”
순간, 화살 한 발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주르륵─
조반니의 뺨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이 상황이 더 충격적이었는지 조반니는 입만 뻐끔거리며 화살을 쏘아보낸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송구스럽지만 현재 황궁은 발타자르 공작 각하의 통제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잉─
파공음과 함께 한 발의 화살이 또다시 쏘아졌다.
머리를 관통당한 조반니의 말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꺼져.”
흘러내리는 흑발을 찰랑거리며 신시아가 비웃음과 함께 성벽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광경을 황망히 바라보던 조반니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문을 열어라! 빨리!”
그러나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조반니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멍하니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수하들이 있었다.
“망했군.”
조반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땅에서 차오른 붉은 물결이 어느새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 * *
키에에엑─
마물들이 성난 노도와 같이 밀려왔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죽어 나간 마물 만큼 같은 숫자의 마물이 다시 태어나며 덤벼들었다.
그렇다고 바싸고를 직접 노리자니 덤벼드는 마물들이 죽어라 앞을 막아섰다.
팟-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발타자르는 달려드는 마물들을 일제히 베어버린 후 마물의 시체를 발판 삼아 위로 치솟아 올랐다.
발아래로 날아오는 마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붉은 소용돌이가 용솟음치는 것만 같았다.
키이이잉─
발타자르의 검을 휘감은 오러 블레이드가 맹렬히 회전했다.
붉은빛은 사라지고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에테르 블레이드 Ether Blade.
발타자르가 벽을 넘어서며 체득한 신성과 마나가 뒤섞인 새로운 힘.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표출했다.
“죽어라.”
사형 선고와 함께 검이 휘둘러졌다.
에테르 블레이드와 마물의 소용돌이가 충돌했다.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꽈아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내부에서부터 폭발하듯 소용돌이가 터져 나갔다.
수만에 달하던 마물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
이내 수면에서 마물들이 재차 생성되기 시작했다.
파앗-
그 잠시간의 틈을 노리고 발타자르가 바싸고를 향해 쏘아지듯 달려나갔다.
크게 치켜떠진 그의 두 눈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황급히 휘둘러지는 두 팔.
물줄기가 마치 창처럼 치솟아 오르며 발타자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그것들을 쳐내기보다는 발판으로 삼아 이리저리 기민하게 움직였다.
발타자르를 막아서기 위한 일격이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발타자르가 바싸고에게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 준 격이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바싸고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몸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수작이었지만 그보다 발타자르의 검이 한 발 더 빨랐다.
바싸고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지고 바싸고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크아아악!”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싸고의 비명이 들려왔다.
절단 부위에서 검은 피가 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상처 부위를 수복하려 들었지만, 통증만 증가될 뿐 수복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무대에 한정해서만큼은 신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바싸고였다.
그런데 신체를 수복할 수 없다니.
“대체 무슨 힘이냐!”
이런 이변이 발생한 것이 발타자르의 검을 휘감은 저 기묘한 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바싸고가 소리쳤다.
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검을 한 바퀴 휘돌리곤 허공을 박찼다.
팟-
발타자르가 재차 바싸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속도로 움직이자 바싸고는 본능적으로 다시 한번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스걱─
이번에도 늦었다.
또 다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싸고는 오른팔이 잘려 나가 있었다.
“젠장. 빌어먹으을!”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제도가 붉은 물길에 잠긴 덕분에 사방이 탁 트여 어디로 도망가든지 발타자르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반니 그 멍청이가 일만 그르치지 않았어도!”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성급하게 축배를 들던 그 멍청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제대로 인질 관리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후…… 어쩔 수 없지.”
자신했던 힘도 통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발타자르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
솔직히 이 방법으로도 발타자르의 사지 하나를 가져가는 것조차 힘겨울 것 같지만 이젠 달리 수가 없었다.
첨벙─
바알이 붉은 수면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수면에서 물로 된 손길이 솟아오르더니 바싸고의 몸을 수면 아래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붉은 물이 자신을 양분 삼아 힘을 키워나가는 것을 느끼던 바싸고가 이를 악물었다.
“발타자르. 이 개자식아아아아!”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검을 찔러오는 발타자르의 모습이 그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콰아아앙─
붉은 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고 주변 일대의 붉은 물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빈 공간을 다시 집어삼키기 위해 붉은 물이 밀려오는 가운데 바싸고의 가슴팍을 짓밟은 발타자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힘이냐고 물었나?”
바싸고가 간신히 눈동자만 움직여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빛으로 인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발타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알을 쳐죽일 검이다.”
이윽고 발타자르의 검이 바싸고의 심장에 틀어박히고.
밀려들던 붉은 물길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