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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77화 (177/183)

공작이 회귀함 177화

남문의 성벽 위에 오른 조반니는 저 멀리 보이는 발타자르 군의 진영을 안주 삼아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흐흐…….”

입가에선 절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

발타자르가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소란을 모두 종식시킬 수 있었다. 나름대로 비장의 한수로 사용한 것 같았지만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이제 발타자르는 북부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을 것이었다.

연합과 동부의 군대.

그리고 마왕군 까지 모조리 제도에 집결하면 제아무리 발타자르라고 해도 막아내지 못할 테니까.

“이제. 발타자르를 누르고 내가 제국의 실세가 된다.”

조반니가 손에 쥔 와인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조반니의 곁으로 내려섰다.

까마귀의 얼굴에 외눈 안경과 작은 중절모.

전체적으로 신사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이종족이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바싸고…….”

마계 서열 3위.

탐욕의 귀공자 바싸고의 등장에 조반니가 손에 쥔 와인 병을 흔들어 보였다.

“한잔하겠나?”

조반니의 제안에 바싸고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축배를 들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

바싸고가 우려를 표했다.

반면 조반니는 승리를 확신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발타자르 공작이 준비한 비장의 한 수는 물거품이 되었고 우리는 이곳에서 승리의 여신이 찾아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인데 말입니다. 그동안 발타자르 공작이 이룩한 업적들은 실로 대단한 것이지만 그도 엄연히 인간입니다. 한 번쯤 실수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요.”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거사였다.

그러니 이리 자신만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싸고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낙관하는 조반니와 달리 도저히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바싸고는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발아래로 제도의 전경이 한눈에 담길 정도로 솟아오른 바싸고는 발타자르 진영을 바라보았다.

“잠깐 얼굴이나 봐야겠군.”

직접 발타자르를 대면하지 않고서는 이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바싸고는 결정을 내리는 즉시 발타자르 진영을 향해 날아갔다.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간 바싸고는 발타자르 진영이 가까워지자 망설임 없이 두 팔을 앞으로 내질렀다.

꽈과과광──

발타자르 진영을 향해 대대적인 폭격이 시작되었다.

마구잡이로 공격을 때려 붓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오밤중에 펼쳐진 이 기습에 병사들은 비명과 함께 막사를 뛰쳐나왔으며, 지휘관들은 그런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개중에는 바싸고를 발견한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직접 덤벼들기보다는 노련하게 마법사들을 불러들여 바싸고의 기습 공격에 대응했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마스터와 아크메이지들 그리고 수백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제아무리 바싸고라고 해도 충분히 위협적인 전력이었지만 지금 바싸고의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냐. 어디 있는 것이냐. 발타자르.”

바싸고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이며 발타자르를 찾았지만, 그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불안감이 점점 짙어져만 갔다.

그때, 바싸고의 예감이 들어맞은 듯 그의 등 뒤에서 강력한 기운이 밀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제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제도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광경이 그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이런 빌어먹을!”

단박에 발타자르가 제도에 잠입했음을 깨달은 바싸고는 제도로 향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섬광이 번쩍이더니 볼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주르륵─

뺨을 타고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에 바싸고가 재차 몸을 돌려 자신을 공격한 이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가웨인이 바싸고를 향해 가라틴을 겨누었다.

시위를 밝히는 찬란한 서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 * *

조반니와 바싸고가 남문의 성벽 위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발타자르는 그 즉시 아이린을 구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전에 숙지한 대로 아이린이 구금되어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건물의 지붕 위를 통해 이동한 덕분인지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택의 인근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수는 어림잡아 100~200명 정도.

정면으로 맞부딪쳐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는 전력이지만 아이린이 인질로 잡혀있는 점을 감안하여 최대한 은밀하게 저택으로 잠입했다.

제도의 성벽을 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인식 장애 마법이 새겨진 로브가 톡톡히 제 역할을 다해 주었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저택의 지붕에 도착한 발타자르는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며 미리 눈여겨 보았던 테라스에 착지했다.

방안의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방안은 깜깜하기만 했다.

끼이익-

문을 열어 방안으로 들어선 발타자르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조반니가 거처로 사용하는 곳이라 들었건만 시종들은 보이지 않고 기사들만 복도를 오가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린이 감금된 곳이 지하라고 했던가?’

아이린이 갇혀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향하는 길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갑작스레 쇳소리가 들려오자 순찰을 돌던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지는 것이 더 빨랐다.

스걱-

일 검에 기사 둘의 머리를 베어버린 발타자르는 성큼성큼- 1층을 향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1층의 홀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수는 열둘.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단숨에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탁-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 발타자르는 기사들의 중심에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휘둘러지는 검.

삐르륵-

현란한 발놀림과 함께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일격에 넷.

재차 몸을 회전시켰다.

삐르륵-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이 신발과 마찰을 일으키며 기분 나쁜 소음을 내었다.

스걱-

이번에는 다섯.

이쯤 되자 기사들도 침입자가 있음을 눈치채고 대응하려 들었다.

하지만 대응할 수 있을 리가.

그들의 검이 검집을 반쯤 벗어난 순간 목이 달아났다.

기사 열둘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개중에는 로열 랭크 급의 강자도 둘 정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은 발타자르의 앞에선 한없이 무기력할 뿐이었다.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기사들을 쓰러트린 발타자르는 검을 휘둘러 검신에 묻은 혈흔을 털어내었다.

투두둑-

붉은 핏방울이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쓰러진 기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적셔진 바닥이기에 별다른 티는 나지 않았다.

기사들을 베어내면서 피가 튀었는지 로브의 후드가 축축했다.

더 이상은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에 망설임 없이 벗어던져 버렸다.

툭-

그러곤 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터벅터벅- 홀의 우측 편으로 향했다.

지하 통로로 향하는 방문의 손잡이를 잡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갑작스레 문이 열리며 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억!”

기사가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발타자르의 검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러나 방 안에 있던 것은 이 기사만이 아니었다.

“침입자다!”

방 안에 있던 기사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좀 더 빨리 움직일 필요성을 느낀 발타자르는 거침없이 오러 블레이드를 줄기줄기 뽑아내었다.

휘이익─

기사들의 몸이 순식간에 횡으로 베어졌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른 채 기사들은 몸이 반으로 토막 나며 즉사했다.

“쯧.”

이 소란을 감지했는지 저택 바깥에서 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지하 통로로 향하는 문에서 기사들이 몰려나왔다.

“최대한 고통 없이 죽여주마.”

붉은 빛무리가 퍼져나가고.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 났다.

* * *

지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밝고 호화로운 방안.

어두컴컴한 통로와 쇠창살만 아니라면 감금되어있는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동의 자유가 없다뿐이지 이곳에서 아이린은 황족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이는 발타자르를 억제할 유일한 수단이 아이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식사를 거부하며 단식 투쟁을 감행했다.

이에 조반니는 방치하기를 택했다.

진짜 굶어 죽을 것 같으면 그때 강제로 음식을 먹여도 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것이 벌써 이틀째였다.

카자크는 힐끗-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이틀째 식음을 전폐한 탓인지 죽은 듯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들 늦는데…….”

위에서 들려온 소란으로 카자크를 제외한 기사들은 모두 위층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아무 일도 없다면 바로 돌아왔을 텐데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크자카는 직접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런 감시도 없이 두고 가는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혹여나 정령의 힘을 빌어 탈출할까 싶어 마력 구속구를 착용시켜 놓은 상태이니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탈출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해서 카자크는 소식이 없는 동료들을 찾아볼 겸.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겸 해서 자리를 비우기로 결정했다.

“얌전히 계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말하며, ‘다 죽어가는 애가 뭘 하겠어’ 하고 중얼거린 크자카는 위층으로 향했다.

그렇게 쇠창살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죽은 듯 누워있던 아이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색은 초췌했지만, 눈빛만은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꼬르륵-

침상에서 내려온 순간 뱃속에서 밥을 달라며 소란을 부렸다.

이틀간 굶은 탓인지 허기가 심하긴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린은 밀려오는 허기를 참아내며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머리핀을 뽑아낸 후 쇠창살로 향했다.

달그락- 달그락-

신시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나름대로 꾀를 내어 문을 열어보려 한 것이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울 리가.

맘처럼 되지 않음에도 아이린은 포기하지 않고 자물쇠를 따는 것에 집중했다.

하늘이 그런 아이린의 정성을 갸륵하게 본 것인지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자물쇠를 따는 것에 성공했다.

끼이익─

쇠창살이 열리고, 아이린이 방을 벗어났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만약 탈출하다 붙잡히게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어.’

발타자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아이린은 나름대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결심을 되새겼다.

그때였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통로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응시하기를 잠시.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아이린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내였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이린은 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라버니.”

사내, 발타자르를 부르며 아이린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 * *

아이린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온 발타자르는 저택을 향해 병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가용 가능한 병력을 모조리 끌고 왔는지 저택을 중심으로 사방이 대낮처럼 훤했다.

다가오는 병사들 너머로 조반니와 요제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바싸고 역시도.

발타자르는 품에 안은 아이린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런 아이린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발타자르는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젠.”

발타자르의 부름에 그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로젠다르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 그에게 아이린을 조심스레 건네준 발타자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린을 데리고 안가에 가 있게.”

“같이 가시지 않습니까?”

로젠다르크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린을 안아 든 로젠다르크가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로젠다르크의 기운을 감지하던 발타자르는 이내 코앞까지 다가온 바싸고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걸어와 주니 실로 반갑기 그지없군.”

그 모습에 자신이 한발 늦었음을 깨달은 바싸고가 황급히 선회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도망치려 했다면 발타자르가 제도에 잠입한 것을 눈치챈 순간 도망쳤어야만 했다.

발타자르의 눈에 띈 이상 그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놈은 오늘.”

발타자르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치솟고.

“여기서 죽는다.”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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