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75화
피잉-
어둠을 가르며 한 발의 화살이 탈라브 하임의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발타자르가 쏘아 보낸 화살은 정확히 성벽 위의 깃대에 꽂혀 들었다.
휘하 기사들과 함께 야간 순찰을 돌던 사그레모 백작은 갑작스레 날아든 화살에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리며 성벽 너머를 응시했다.
성벽 인근은 어둠이 짙게 내리깔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대체 누가 쏜 화살인지 알아낼 수 없었던 사그레모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살이 꽂힌 깃대를 바라보았다.
“……음?”
깃 촉에 묶여 있는 종이를 발견한 사그레모 백작은 날랜 움직임으로 깃대에서 화살을 뽑아내곤 묶인 종이를 펼쳐보았다.
발타자르가 보낸 밀서였다.
순식간에 밀서를 훑어본 사그레모 백작은 성벽 위에 설치된 화로에 밀서를 던져 태워 버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수족인 몰타 기사단원들을 제외하고는 밀서를 목격한 이는 없었다.
내심 안도한 사그레모 백작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사들을 이끌고 순찰을 재개했다.
* * *
날이 밝아 올랐다.
발타자르는 방어선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조반니의 반역으로 인해 칼 프란츠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지휘부는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방어선의 주축이 되는 것이 칼 프란츠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휘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철저한 준비가 무색하게 방어선은 마왕 군을 상대로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작금에 이르러선 제도 인근까지 전선이 밀려났다.
다행히 발타자르가 투입한 로키와 에리스 할데의 활약으로 방어선은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안정한 것이 현실이었다.
칼 프란츠가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빠른 시일 내로 방어선의 한 축이 무너지고 그 틈으로 마왕 군이 제도까지 진군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리고 발타자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방어선만이 아니었다.
“조반니가 이종족 연합의 수뇌부와 접촉을 시도했다니…….”
발타자르는 수인족의 호야와 오거족의 적귀가 보낸 밀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이종족 연합의 수뇌부가 심상치 않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흔들린 것은 엘프와 드워프로군.”
보지 않아도 뻔했다.
두 종족은 인간이 악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종족들이었다.
당장 이종족 연합의 영토가 불모지가 되어 버리고 백성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었기에 발타자르에게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하긴 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반기를 들어 올릴 이들이었다.
이제 와 다른 마음을 품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생각보다 일 처리가 꼼꼼하군.”
대치상황을 유도한 조반니의 뜻대로 이곳에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축낼 경우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다.
이종족 연합과 동부의 병사들 그리고 마왕 군이 일제히 제도를 향해 진격해 올 것이고 발타자르의 진영에 합류해 있는 연합의 병사들은 발타자르를 향해 검을 겨눌 것이었다.
결국, 발타자르는 이렇다 할 소득도 없이 제도에서 물러나야 하게 될 것이고 상황은 조반니의 의도대로 흘러가겠지.
“재밌네.”
발타자르는 피식 웃었다.
조반니는 자신이 꺼낼 수 있는 패를 모두 꺼내어 발타자르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회귀 전의 발타자르였다면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귀 전이었을 경우이고 현재의 발타자르가 보기에는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한 발버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웨인.”
“예. 장군.”
“적귀에게 전하게. 때가 되었으니 움직여도 좋다고 말일세.”
적귀.
오거족의 수장인 라쿤타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오거족 내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이였다.
이종족 연합의 영토에서 발타자르가 선보인 무위에 반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발타자르가 오거족을 통제하기 위해 준비한 안배였다.
발타자르가 신호만 보내면 당장 반기를 들고 라쿤타를 몰아내리라.
적귀가 오거족을 장악한다면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수인족의 수장인 호야는 발타자르에게 호의적이었으며, 리자드맨과 요정 그리고 드래고니안들은 발타자르의 편으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오거족이 새로운 족장을 맞이하게 되는 그날.
이종족 연합은 피의 숙청이 이루어질 것이고 엘프와 드워프들은 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불모지가 된 연합의 영토로 쫓겨날 것이었다.
이는 이종족 연합이 건재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벌레 군주와의 전쟁으로 엘프와 드워프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 점.
엘프와 드워프들의 거듭된 실책과 오랜 시간 두 종족이 연합을 통치하며 권력을 독점한 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발타자르가 시선을 옮겨 맞은 편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는 관찰하는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께옵선 방어선으로 향하시어 상황을 정리해 주십시오.”
발타자르의 말에 제국 유일의 대공.
레온하르트 칼 프란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문득 깜빡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참. 약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겠지?”
칼 프란츠의 입장에선 실로 합당한 요구였다.
드러난 상황만 보자면 조반니에게 유리한 상황임에도 칼 프란츠는 발타자르의 편에 섰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발타자르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테지만 덕분에 발타자르는 앞으로 일어날 변수들을 모두 차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합당한 대가를 치러주어야만 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으로 말이다.
발타자르가 양손에 깍지를 끼며 답했다.
“제도의 정리가 끝나면 제국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칼 프란츠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막사를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제국의 옥좌에 대한 야망은 여전했다.
서로의 뜻이 달라 갈라섰고 적대하던 사이었지만 그 한결같은 모습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좋은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군.”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발타자르는 그가 성군이 되든 폭군이 되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 누가 황제가 되건 이 제국을 사분오열 찢어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이후 발타자르가 북부에 칩거하였을 때 그에게 함부로 수작질을 부리지 못할 테니까.
* * *
와아아아─
탈라브하임의 내성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사그레모 백작과 그가 이끄는 몰타 기사단이 소란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감금된 황제파의 귀족들을 탈출시키는 한편 이목이 그쪽으로 쏠린 틈을 타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
그러한 사그레모 백작의 움직임을 뒤늦게 눈치챈 조반니는 황급히 병사들을 황궁으로 급파했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금방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조반니는 조급해하기보다는 여유로운 심정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발타자르 공작도 어지간히 조급했나 보군요. 이런 조잡한 술수를 부리다니 말입니다.”
조반니가 웃으며 말하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요제프가 조반니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애써 미소짓는 것과 달리 요제프의 속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믿고 있던 수하가 배신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의 사람이 이렇게나 소란을 일으켰으니 앞으로는 조반니의 눈치를 봐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요제프의 속내를 눈치챈 조반니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발타자르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물론이고 이 일이 호재로 작용하여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금방 정리될 겁니다.”
“수하 하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소란을 일으켜 송구스럽습니다.”
요제프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조반니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과는 달리 눈동자는 한없이 차가웠다.
“뭘요. 의도하고 벌이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반니의 눈동자를 마주한 요제프는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조반니가 그를 어떻게 압박해 올지 눈에 선했다.
“자자.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 우린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나 지켜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갑작스러운 기사의 난입에 조반니가 미간을 곱게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소란이냐? 내성 때문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니…….”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북문에서 근위대와 황실 기사단이 저희 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평소라면 자신의 말을 끊은 기사에게 크게 호통을 쳤을 조반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탓인지 얼굴을 와락 찌푸리기만 할 뿐이었다.
“조, 조반니공…….”
요제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반니를 불렀다.
이에 조반니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바라보자 요제프가 남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저기 좀 보십시오.”
요제프의 말에 조반니가 남문을 가리키자 그곳에는 발타자르의 군대가 일제히 침공을 개시하고 있었다.
“하, 하하. 발타자르가 노리는 것이 이것이었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반니는 되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판단하기로 발타자르는 지금 양동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발타자르가 노리는 것이 북문인지, 아니면 남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어느 한쪽에 시선이 끌리면 다른 한쪽이 무너질 테지.
“역시 쉽지만은 않구나. 발타자르!”
이를 빠득- 하고 갈며 조반니가 소리쳤다.
“바싸고에게 북문을 맡아달라 전해라! 그리고 아이린 공녀를 데려와라! 지금 당장!”
조반니의 외침에 기사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네놈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조반니의 눈동자가 서문을 향했다.
발타자르가 있을 그곳으로 말이다.
* * *
병사들이 탈라브하임의 남문을 공략하기 시작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가웨인이 물었다.
“장군. 어째서 남문만을 공격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전 성문을 일제히 공략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답했다.
“바싸고 때문일세.”
바싸고는 아이린을 구출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변수였다.
따라서 그를 다른 곳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하여 서문만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만약 제도의 전 성문을 일제히 공략한다면 바싸고가 어느 성문으로 향할지 확신할 수 없다네. 반면 남문만을 공략한다면 조반니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북문에 바싸고를 투입하여 서둘러 북문의 소란을 잠식시키고 전력을 남문에 집중시키려 할 것일세.”
물론 바싸고가 자리를 비운다면 조반니의 전력만으로는 발타자르를 막을 수 없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수가 있었다.
바로 아이린이었다.
그녀를 인질로 내세워 남문을 공략하는 발타자르 군의 발목을 붙잡으려 들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발타자르가 원하는 바였다.
“조반니가 린을 내세워 시간을 끌려 한다면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발타자르가 잠시 자리를 비울 것처럼 말하자 가웨인은 남문만을 공략하는 이유가 앞서 말한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제도에 잠입하시려는 거군요.”
지금쯤 적들의 이목은 북문과 남문.
그리고 내성에 집중되어 있을 터.
따라서 서문과 동문의 경계가 부실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발타자르는 그 틈을 노리고 제도에 잠입하여 아이린을 구출할 생각이 분명했다.
“린과 함께 돌아오겠네. 그러니 뒤를 부탁하네.”
그 말을 끝으로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사라지자 가웨인은 시선을 옮겨 공략 중인 남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조반니가 아이린을 내세우며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광경을.
“병사들을 물려라!”
가웨인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남문을 공략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퇴각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