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71화
카앙- 카앙-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바르바토스가 정면에서 바알의 이목을 강제로 잡아끌면 발타자르가 빈틈을 노리고 일격을 가해왔다.
마치 수십 년간 손발을 맞춰온 이들처럼 자연스레 연계가 이어지며 바알을 압박했다.
어지간한 마왕들이라면 진작에 나가떨어질 공세 속에서도 바알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둘을 상대했다.
“하하! 바알! 언제까지 막기만 할 테냐!”
바르바토스가 마구잡이로 낫을 내려쳤다.
일격 하나하나가 강맹한 기운을 머금고 있어 그대로 적중당한다면 치명상을 면하기 어려울 일격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알의 몸에 하나둘씩 상처가 늘어났다.
특히나 위협적인 것은 발타자르의 공격이었다.
바르바토스의 공격이 치명상을 입힐 수준이라면 발타자르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것이었다.
위급한 상황이 분명했지만 바알의 속내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확실히 지난번보다는 강해지기는 했다만…….’
본능에 몸을 맡겨 날아오는 공세들을 쳐내고 눈동자는 연신 발타자르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으며 간간이 튀어나오는 에테르 블레이드는 바알조차도 맞받아치는 것을 꺼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지난번보다 강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바알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이 협공한다 해서 바알이 위기감을 느낄 리가 만무했다.
파지지직─
교차한 바알의 두 팔 위로 샛노란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일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발타자르와 바르바토스가 재빠르게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바알의 몸을 중심으로 전류의 기둥이 치솟았다.
그것은 점점 몸집을 불리며 퍼져 나갔다.
전류의 기둥에 닿은 것은 순식간에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치솟은 바알은 전장을 바라보았다.
전열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고 후열은 이제 막 트리스탄이 이끄는 기병대의 급습으로 빠르게 와해 되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
뭐. 상관없었다.
애초에 구색 맞추기로 데려온 것들이었으니까.
바알은 시선을 옮겨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바르바토스와 함께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아쉬운걸.’
조금.
아주 조금만.
저기서 조금만 더 무르익는다면 극상의 쾌락을 선사해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찌한다…….’
먹음직스럽지만 바로 잡아먹기에는 아쉬웠다.
고민은 짧았다.
바알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마신의 강림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일전에 신계의 조율자를 집어삼키며 극상의 쾌락을 맛보았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파앗-
바알의 신형이 모습을 감추었다.
“귀찮은 날파리는 미리 치워둬야겠지?”
사라졌던 바알이 바르바토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간 바르바토스의 두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어.
푸욱-
바알의 손이 바르바토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이었다.
“커억…….”
속절없이 심장이 꿰뚫린 바르바토스가 두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발타자르가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바알이 몸을 뒤로 빼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내었다.
붉게 물든 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바라본 바알이 씨익- 웃었다.
“발타자르.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바알의 몸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이에 발타자르가 허공을 박차며 바알을 따라갔지만 쏟아지는 마기의 창에 의해 얼마 가지 못해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바알이 그런 발타자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가레스를 물리치고 와.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이번에는 잘해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바알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전장을 떠났다.
* * *
“괜찮은가?”
“킥…… 괜찮냐고?”
바르바토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처참했다.
꿰뚫린 심장에선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얼굴에선 점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가 멍청했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너무 자만했다.
바르바토스도.
그리고 발타자르 자신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상대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상대였다.
하지만 자만한 나머지 만용을 부려버렸다.
회귀 전의 발타자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당시의 발타자르는 항상 모든 것이 불안했고 주변은 변수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일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최근의 일 처리는 어떠한가?
거듭된 성공은 발타자르를 안일하게 만들었고 일을 진행하는 것에 있어 실패할 것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단 말인가.
바알에게 치욕을 당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발타자르.”
바르바토스가 자괴감에 빠져 있는 발타자르의 멱살을 잡아채며 끌어당겼다. 둘의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아가레스와 손을 잡아.”
순간 발타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가레스는 마신의 강림을 갈망하는 마왕이며 유일하게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마왕이기도 했다.
그런 자와 손을 잡으라니.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해야 함이 옳았지만 바르바토스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하여 발타자르는 말없이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가 죽으면 너 혼자서 바알을 상대하기는 무리야. 이건 너도 인정하겠지?”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야?”
“사실이지 않나. 한데, 아가레스가 순순히 협조를 할까?”
그는 마신의 강림을 원하는 자.
반면 발타자르는 그것을 막으려는 자였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상반되니 아가레스가 발타자르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 거야. 무조건. 바알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아가레스가 비프로스트 요새의 관문들에 전력을 집중시킨 것은 바알이 그곳들을 지키겠다 나섰기 때문이었다.
바알이라면 마신의 강림의식을 진행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바알은 제 욕망을 위해 전장을 이탈했다.
이는 심각한 배신 행위였다.
비록 떠나기 전, 바르바토스를 쓰러뜨렸다고는 하나 발타자르가 건재한 이상 관문들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까.
“아가레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테고 아가레스는 그 분노를 네가 아닌 바알에게로 돌릴 거야. 네가 먼저 손을 내밀 필요는 없어. 상황 파악이 끝난다면 알아서 굽히고 들어올 테니까.”
아가레스는 합리적인 마왕이었다.
지금쯤 전황을 보고받고 어떤 선택이 실리적인 것인지 계산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계산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뿐일 것이었다.
당장 발타자르와 싸우는 것보다는 그와 손을 잡고 바알을 물리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현재 그가 처한 상황에서는 최선이라는 결론 말이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어. 그렇다고 네가 그를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는 것은 낙관적인 생각일 뿐이지. 그렇다면 현재로서 네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야. 숫자로 찍어누르는 것.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 특히 용사들은 경험을 겪을수록 강해지니까. 아가레스의 도움을 받아 다듬는다면 단시간 내에 바알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패로 쓸 수 있을 거야.”
아가레스는 불사의 왕이며 망자들의 군주.
따라서 그라면 용사들의 성장의 원동력인 실전 경험을 끝없이 선사해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용사들은 바알을 상대할 비장의 카드가 되어줄 테지.
다만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용사들을 최대한 다듬을 시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히 바알이 노리는 것은 발타자르의 성장이었다.
그것을 위해 아가레스를, 나아가 마신을 배신한 녀석이니 발타자르가 아가레스와 바싸고를 물리치고 한 단계 더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아가레스와 손을 잡고 그를 이용해. 그래서 바알. 그 빌어먹을 놈의 숨통을 끊어버려.”
발타자르의 멱살을 쥔 바르바토스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할 수 있겠지?”
집념에 가득찬 눈동자가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것을 마주한 발타자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발타자르의 확언에 바르바토스의 손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 믿을게.”
바르바토스는 발타자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들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별들이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풍경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빌어먹을. 바알의 목은 내…… 손으로…….”
말을 모두 끝맺지 못한 채 바르바토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잿가루가 되며 흩날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지켜보던 발타자르가 이내 등을 돌렸다.
바알이 떠나고, 바르바토스가 사망했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 * *
“아가레스 님! 큰일 났습니다!”
한창 마신의 강림 의식을 진행하던 아가레스에게 휘하 마족이 헐레벌떡 날아왔다. 막 전투를 치르고 온 것인지 온몸이 붉은 피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이냐.”
“관문, 관문들이 모두 함락당했습니다.”
마족의 보고에 아가레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것은 상정 외의 사태였다.
바알이 지키고 있을 관문이 이렇게 빨리 함락되었다? 무언가 이변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상세히 말해보거라.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냐!”
아가레스가 언성을 높이자 마족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관문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바알의 배신부터 관문들이 어떻게 함락되었는지까지 말이다.
마족의 장황한 보고가 끝나자 아가레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강림 의식을 진행 중이던 마족들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멈추어라.”
“예? 하오나. 이제 조금만 더 진행한다면…….”
“이미 실패로 돌아간 일이다. 무리다.”
“……알겠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바알의 배신으로 마신의 강림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곧 발타자르가 자신의 목을 치기 위해 달려올 테니 말이다.
바알을 믿고 전력을 관문에 투입했기에 벌어진 불상사였다.
“배신이라…….”
아가레스는 바알이 배신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잠시 지켜본 것뿐이지만 바알은 발타자르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바알의 갑작스러운 배신은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까득-
아가레스가 이를 갈았다.
“감히. 마의 종주에게 도전하려는 것이냐. 바알.”
오래된 전설이 있었다.
그것은 신계와 마계 그리고 중간계의 용이 하나가 될 경우 종을 초월하여 신의 좌에 오른다는 전설이었다.
바알이 발타자르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 거라고 확신한 아가레스의 두 눈동자에 시퍼런 불길이 치솟았다.
“바알. 내 모든 것을 걸고 네 야욕을 저지하고 말겠다.”
바알이 하려는 것은 마신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아가레스는 바알이 신의 좌에 오르는 것만큼은 기필코 막아내겠다 결심했다.
“발타자르에게 전령을 보내라.”
발타자르는 열쇠였다.
그만이 바알을 물리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그만이 바알을 신의 좌에 오를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바알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발타자르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어서!”
아가레스의 호통에 마족 하나가 황급히 대전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서슬 퍼런 눈동자로 응시하던 아가레스가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 떠 있던 비석이 쿵- 하고 지면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