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9화
부우우우웅─
뿔 나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며 출정식이 시작되었다.
본래라면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을 출정식이지만, 상황의 긴급함을 고려하여 황제를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배웅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북문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을 토해내고, 말을 탄 장교들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도록 지시했다.
그러한 가운데 북문에서 기수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황금빛 바탕에 은색의 방패와 그것을 교차하는 두 자루 검이 인상적인 프락시온 황가의 문장이었다.
그 뒤로 발타자르 공작가, 칼 프란츠 대공가를 비롯한 각 가문의 깃발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오노플은 팔짱을 끼고선 옆에 서 있던 칼 프란츠 대공에게 말을 걸었다.
“참 대단하군.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말입니까?”
“이렇게 제국의 모든 봉신 가家들이 하나로 결집한 것 말이네.”
레오노플의 말에 칼 프란츠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확실히.
레오노플의 말대로 대단했다.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저마다의 세력을 구축하던 가문들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이것은 자신이었다면 적어도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일을 단시간 내에 해낸 발타자르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 기분인가? 저런 후원자가 뒤에 있는 기분은.”
레오노플의 물음에 칼 프란츠 대공이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심유한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칼 프란츠 대공은 직감했다.
발타자르가 그에게 황위를 제안한 일을 레오노플이 알아차렸다는 것을.
“글쎄요. 아직 확정된 것이 없기에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든든하긴 하군요.”
칼 프란츠 대공의 말에 레오노플이 피식 웃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황위에 욕심을 내도 좋다고 허락했음에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듯했다. 여전히 의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그러면서도 과감할 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이가 바로 칼 프란츠였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를 후계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 마왕들을 몰아내는 일이 끝나게 되면 발타자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북부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그의 공백으로 인해 제국에는 다시 한번 혼란이 찾아올 것이었다.
물론 발타자르가 대비하지 않고 떠날 리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보다 확실한 통치자가 정국을 주도해야만 했다.
명분을 따지자면 레오노플 슬하의 자식들이 뒤를 잇는 것이 응당 옳겠지만 자신만의 세력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그들이 황위에 오를 경우 권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여 낙점한 것이 칼 프란츠 대공이었다.
지닌바 역량은 물론 세력 또한 강성했으며, 황실의 서열 또한 높았다.
모든 면에서 칼 프란츠 이상의 재목은 없었다.
‘발타자르 공작도 같은 생각이겠지. 그러니 레온하르트에게 황위를 제안했을 것이고.’
때마침 한참을 이어진 기수들의 행렬 끝에 발타자르가 드러내었다. 군타낙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발타자르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순간 레오노플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레오노플을 향해 경례를 올리곤 떠나갔다. 그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레오노플이 등을 돌리곤 말했다.
“자. 가세.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 * *
수백만에 달하는 원정군이 북부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도 북쪽의 관문 요새에 설치된 군용 게이트를 통과한 원정군은 발타자르의 영지인 레오나스에 도착하였고 다시 레오나스에서 출발하여 비프로스트를 향해 진군을 재개했다.
그렇게 제도에서 출정한 원정군이 비프로스트 요새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일은 고작 이틀이었다.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어서 오십시오. 각하.”
비프로스트 요새에 도착한 원정군을 마중 나온 것은 요새 사령관 베디비어였다.
“상황은 어떠한가?”
“여전히 관문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몇 번 정찰을 보내기도 했지만, 성벽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두 관문 모두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마족들은 무척이나 호전적이었다.
그런 놈들이 눈앞에서 정찰하고 있음에도 내버려 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관문에 틀어박혀 수성을 통해 시간을 벌겠다는 뜻이로군.”
발타자르가 눈보라 너머를 응시했다.
북부 최전선, 비프로스트 요새는 협곡에 건설된 두 개의 관문과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제1관문에는 바알이 이끄는 본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제2관문의 경우 중상위 서열의 마왕 셋이 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쉬이 점령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가웨인.”
“예. 장군.”
“자넨 2관문을 공략하게. 병력 70만과 마스터 다섯, 그리고 아크메이지 셋을 붙여주겠네.”
원정군의 전력을 2관문에 집중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가웨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바알과의 전투에서 바르바토스를 제외한 전력은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러니 1관문에서 낭비하는 것보다는 2관문에 투입시켜 보다 빨리 2관문을 함락시키는 편이 옳았다.
그리고 2관문에 주둔하고 있을 마왕들을 압도하려면 그 정도 전력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쪽은 바르바토스로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게.”
발타자르가 바르바토스 진영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려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들은 전쟁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 마수들과 마족들이 포효하며 안달을 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이동할까요?”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트리스탄을 불렀다.
“트리스탄! 전군에 진격령을…….”
꽈아앙─
발타자르가 말을 끝내기 직전.
갑작스레 폭음이 들리더니 요새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기사 하나가 거칠게 말을 몰며 다가왔다.
“저, 적습입니다! 제 1관문에서 출격한 마왕 군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선수를 빼앗겨 버렸군.”
마냥 관문에만 틀어박힐 줄 알았건만 예상을 깨고 관문을 뛰쳐나와 선공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제 발로 지리적 이점을 버리고 뛰쳐나와 전면전을 유도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원정군에게 있어서는 호재였다.
“자네는 어서 군을 이끌고 2관문으로 진격하게.”
“알겠습니다.”
발타자르의 명에 가웨인이 경례를 올리곤 떠나갔다.
뒤이어 발타자르 역시 자리를 박차고 성벽을 향해 움직이자 지휘관들은 저마다의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래. 발타자르가 요새에 도착했다고?”
바알의 물음에 까마귀의 얼굴을 한 마족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바알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자신이 기껏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는 발타자르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사실은 진미를 맛볼 기회가 사라진 것에 대한 분노였다.
조금.
아주 조금만 무르익었다면 극상의 진미를 맛볼 수 있었을 것을.
그것을 발타자르가 다 망쳐 버렸다.
“그래.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살기로 번들거리는 두 눈을 빛내며 바알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마족을 향해 말했다.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바알의 지시에 마족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마족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출정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곳에서 농성을 하시는 것이…… 컥.”
마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샌가 다가온 바알이 그의 머리를 발로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더냐?”
머리통이 터져 나갈 듯 가해지는 압력에 마족이 고통을 참아내며 황급히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전 그저 아가레스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대업이 눈앞이니 잠시만 더 인내하심이…… 어어억!”
고통으로 인해 마족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두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내가.”
마족의 머리통이 터져 버렸다.
곤죽이 되어버린 마족의 살점을 짓이기며 바알이 주위에 기립해 있던 마족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말했잖나.”
하나같이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마족들임에도 바알의 시선을 마주한 마족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병사들을 준비하라고.”
바알이 활짝 미소 지었다.
무척이나 천진난만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마족들은 그가 행여나 자신들에게 손을 쓸까 두려워하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뭣들 하고 있어? 준비하지 않고.”
마족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며 사라졌다.
바알은 머리통이 터져 나간 마족의 시체를 잠시 응시하더니 툭- 하고 발로 차고는 자리를 떠나갔다.
* * *
탁-
성벽 위에 오르자 새하얀 설원 위를 검게 물들이며 포효하는 마왕 군이 두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알이었다.
발타자르를 빤히 응시하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던 바알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마왕 군 진영에서 투사체들이 솟구치며 성벽을 향해 날아왔다.
쿠웅─
살점과 뼈다귀 따위로 뭉쳐진 투사체가 성벽에 적중하자 녹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끄아악─”
그 연기에 노출된 병사들이 제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성벽에 치덕치덕 묻은 살점들은 조금씩 성벽을 녹이고 있었다.
“쯧.”
이에 발타자르가 혀를 차며 한 손에 마나를 휘감아 휘두르자 성벽에 자욱이 내리깔린 녹색 연기가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이야. 눈치 한번 빠르네. 꼴을 보아하니 네가 여기 도착한 것을 느끼자마자 바로 온 것 같은데?”
어느샌가 다가온 바르바토스가 발타자르의 옆에 나란히 서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바로 싸울 거야?”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것을 신호로 제국군 진영에서도 투사체가 일제히 쏘아 올려졌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함께 투사체들이 일제히 마왕 군 진영을 강타했다.
꽈아앙─ 꽈아아앙─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격이다아아──!”
바르바토스의 외침에 그녀의 수하들이 일제히 성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간다.”
말과 동시에 바르바토스가 성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대장. 진격령을.”
트리스탄이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
발타자르가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준비시켰는지 트리스탄이 이끄는 기병대를 비롯하여 원정군이 출진 준비를 끝마치고 도열해 있었다.
바알의 돌발 행동으로 계획이 어긋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발타자르가 검을 뽑아 들더니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전군!”
검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며, 바알을 향해 겨누어졌다.
“진격하라!”
발타자르의 지시에 맞추어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최후의 전쟁이 그 서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